▲ 삐그덕 소리나는 문을 열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마시고 기왓장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질반질한 기둥에 기대 한옥 내음을 맡는다. 외국인 사로잡은 락고재의 안 영환은 "가슴이 짜릿해진다"고 말했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외국인들이 말했다… "한국문화 정체성이 뭐냐… 규모는 중국이 크고… 디테일은 일본에 밀린다"… 그가 말했다… "한옥에서 한번 자보라"…
어떤 사람이 한옥 헐고 빌라 짓는데… 나한테 자문을 해달래… 가서 보니 허물기는 그렇고 수리를 하는데… 숨어있던 한옥의 선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버렸지…
#1.락고재
종로구 계동 뒷골목에 한옥 한 채가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대금(大琴) 가락이 객(客)을 맞았다. 방 네 칸에 정자(亭子) 하나, 한복판에 한 그루 소나무가 굽어 있는데 모습이 영락없는 거북이 등껍데기이다. 200평 공간. 청아하기 그지없다.
'락고재(樂古齋)', 이 집의 이름이다. '옛것을 즐긴다'는 뜻이다. 이 터의 주인은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 거기서 문일평, 최현배 같은 우리 선비들이 일제에 맞서 '한국학'을 지키려 했다. 1934년 발족한 진단학회(震檀學會)다.
그 집에 일본인들이 줄서 있다. 하루 자는 데 20만원 가까운 돈을 기꺼이 지불할 태세다. 터와 인연 맺은 주인이 말했다. "한옥을 보면 가슴이 짜릿해지지요. 온돌에 누우면 '시원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 문화유전자지요."
#2.진사댁(進士宅)
명동파출소 옆 골목은 어른 셋 지나기도 비좁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하고 목울대가 울린다. 기와지붕이 맞은편 건물과 닿을 듯 하늘로 솟아있다. 에게해 어느 절벽에 매달린 수도원처럼 기이한 풍경이 좁은 골목 안에 있다.
이 자리엔 낡은 건물이 있었다. 70년도 넘어 전선이 안에서 얽히고설켜 있었다. 거기서 불이 났다. 음식 만들던 아주머니는 집을 잿더미로 만든 뒤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한다. 그는 불난 집에 대운(大運) 터진다는 말을 알았을까.
"이왕 다 타버린 거 한옥을 만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자재며 기와를 전부 몸으로 실어날랐어요. 그래도 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명동 한가운데, 이런 골목에도 한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요, 하하하!"
#3.안동 부용대 옆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95번지를 몇 시간째 돌던 나그네가 있었다. 돈깨나 있어 뵈는 그는 과연 서울 강남에 빌딩만 여덟채를 가진 이였다. 그가 말했다. "이런 명당이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이가 주인인지 얼굴 좀 보고 싶소."
안동 락고재 맞은편 부용대는 해발 64m다. 언뜻 뒷동산 같지만 어엿한 태백줄기 자락이다. 정상에 오르면 태극 모양으로 하회마을을 휘도는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그 뒤로 하회(河回)마을을 보호하고 있다는 만송정 솔숲이 짙다.
거기 네채의 초가가 세워졌다. 초가 안에는 편백나무 욕조가 있다. 거기 몸을 적시며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다 외국인들은 운다. 조선 선비들의 품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초가집 주인이 또 큰소리쳤다. "그게 우리 풍류(風流)지요."
인생 전사(前史)
안영환(安永桓·53)은 영락없는 '밥 장수'다. 마포·명동·선릉에서 한정식집 '진사댁(進士宅)'을 한다. 목동·명동·여의도에선 '제주미항'이란 고등어·갈치 전문점도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한옥(韓屋)예술가'라 했다.
'몽중(夢中)', 그의 호(號)다. '꿈속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호로 그의 팔자(八字)를 풀어보면 초년운(初年運)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서울교대부국 나와 K중에 가려 했지만 나라가 정책을 바꿔 그를 '뺑뺑이 1세대'로 만들었다.
K고에 두 번 도전했다 다 낙방했다. 2차 명문(名門) 대광고에 진학했더니 이번엔 원치 않는 종교 문제로 말썽에 휘말렸다. "종교자유를 외치다 흠씬 두들겨맞았어요. 후배 중에 강모라고 있었죠? 사실 제가 그 친구의 원조였습니다."
▲ 남에게 맡기고 손 놓기보다는 주인이 나서서 움직여야 제대로 돌아간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얘기다. 제주도에서 새벽에 고등어 공수하던 '극성 음식점 주인' 안영환은 목수 사서 직접 한옥을 지어 올렸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입학 때 전교 20~30등쯤 하던 성적이 내리 비탈길을 탔다. 고3 때 반(班) 성적을 돌아보니 뒤에 야구특기생 두 명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 차려 공부했지만 다시 서울대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모두가 의욕상실 때문이었다.
겨우 힘내 나라에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번엔 호메이니가 혁명을 일으켰다. 팔레비왕(王)은 호메이니에게 쫓겨났고 장학금은 그의 품에서 날아갔다. 그 뒤 안영환은 테니스로 소일했다.
군 복무 하던 어느 날 광화문 외국어학원에서 만나 사귀던 지금의 아내가 선언했다. "나, 미국 이민 가야 해. 부모님 따라서. 같이 갈래, 헤어질래?" 제대 후 가보니 아내는 캘리포니아주립대 3학년 과정에 남편을 편입시켜 놓고 있었다.
전공이 듣도 보도 못한 '컴퓨터 사이언스'였다. 한국에서 팽팽 놀던 사나이가 된통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였다. 그가 말했다. "왜, 수석들은 예습·복습만 한다잖아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거 맞는 말이던데요."
아침 7시 도서관에서 2시간 예습했다. 10%가 이해됐다. 교수 강의 들으면 80~90%가 머리에 들어왔다. 다시 교수 방 찾아 1~2시간 이야기하니 그제야 하루 배운 게 자기 것이 됐다. 졸업 때 그는 난생처음 수석(首席)이란 걸 해봤다.
1985년부터 91년까지 그는 EDS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거기서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수습에서 정사원 되는 데 3년 걸리던 것을 8개월 만에 해치웠다. 월 2000달러 하던 연봉을 2년 6개월 만에 '더블'로 만들었다.
그때 아버지가 2남3녀의 장남을 한국으로 불렀다. 그 호출이 없었다면 안영환은 평생 모기지론 갚다 인생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라고 했다. 은행원 출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령했다. "부동산 시행업을 하는데 와서 도와. 빨리 와!"
진사댁
―그래 한국에 들어와 뭘 했습니까.
"선친을 도와 경기도 광명과 목동에 상가 세 채를 지었습니다. 분양이 다 잘됐는데 꼭 안 팔리는 곳은 있지요."
―미국에서 그냥 번듯한 직장 그냥 다니지.
"선배들 보며 회의를 느꼈어요. 모기지론 갚고 그럭저럭 살다 퇴직하는. 20년 후 제 모습이 저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즈음 한옥과의 인연이 생겼어요."
―어떻게요.
"한옥 헐고 빌라를 지으려는 이가 자문을 해달래요. 마포구 대흥동이었어요. 사람도 살지 않고 팔리지도 않아 토초세(土超稅)만 무는 애물단지였어요. 아무리 봐도 빌라 지을 자리는 아닌 것 같았어요. '그냥 수리해서 한정식집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요.
"주인이 '난 자신 없으니 당신이 해보라'는 겁니다. 뭐에 씌었는지 그냥 맡았어요. 수리를 시작했지요. 콘셉트를 노출(露出)로 잡고 천장 뜯고 시멘트 발라놓은 것 뜯어냈지요. 아! 그런데 그제야 숨었던 한옥의 선(線)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 모습이란…."
―한옥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보통 집이 아니었습니다. 마포 황부자 아시죠? 그가 살던 집이었어요. 상량문(上樑文)엔 광서 6년이란 글귀도 보이고."
―거기가 원조 진사댁이지요? 이름은 왜….
"락고재와 진사댁이란 택호(宅號)에 유래가 있어요. 락고재는 선친께서 '학고재'를 봤다며 권한 이름입니다. 어찌 보면 표절이지요. 아버님 위로 3대째 성균관 진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생긴 이름입니다."
―음식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데, 겁이 없나요.
"처의 이모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식점을 했어요. '우래옥'이라고…, 서울 우래옥과 동업하다 나중에 인수했지요. 제가 우래옥 전산관리 시스템을 만들어줬어요. 몇달 하다 보면 운영과 재고관리를 훤히 알게 되지요."
―그래서 잘 됐습니까.
"된장찌개 파는 5000원짜리 밥집으로 시작했는데 하루 손님이 댓명도 안 될 때가 많았어요. 1년 반가량 정말 고전했어요."
―음식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던데요.
"이유가 있어요. 주방장 아주머니가 아침에 밑반찬을 한꺼번에 해놔요. '손님이올 때마다 해야 맛있을 텐데'라고 하니 음식점은 다 그렇대요. 간장게장도 너무 짰어요. '이게 아니다' 싶어 후임자를 물색하고 다녔지요."
―은인을 만났겠군요.
"'왕 실장'이란 할머니가 있어요. 경기도 기흥에 손님들이 줄서 기다리는 집이 있었어요. 왕 실장이 거기서 일했는데 빚을 3000만~4000만원쯤 지고 있었어요. 월급 130만원 받아 주인에게 월 3부 이자 내니 어땠겠어요. 제가 모셔왔죠."
―대박입니까.
"그때부터 손님이 몰렸어요. 각종 메뉴를 머리 싸매고 개발했으니까요. 간장게장도 짜지 않게 만들고. 손님이 많아지니 실내에서 가야금, 대금 연주도 하게 됐고요."
제주미항
황부잣집에서 열었던 원조 진사댁과의 인연은 6년 만에 끝났다. 어느 날 교회에 팔렸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집 팔겠다고 해 한참 흥정하던 참이었다. 안영환이 깜짝 놀라 쫓아갔지만 이미 계약이 끝나 있었다. 인연은 왔다 간다.
―진사댁 다음이 '제주 물항'이지요.
"친척 동생이 제주도에서 고등어와 갈치를 팔았어요. 테이블이 8개뿐인데 수입은 월 300만~400만원이나 됐어요. '되겠다' 싶어 '서울에서 해보면 안 될까'라고 물으니 안 된대요."
―남 잘하는 걸 공짜로 하겠다니 싫다고 했겠군요.
"고등어, 갈치는 금세 상한다고 생각했잖아요. 아무도 그걸 비행기로 공수(空輸)해 올 생각을 못한 겁니다. 운임(運賃)이 들어도 부가가치가 20~30%는 넘어보였어요. 동생을 석 달이나 설득했습니다. 매일 새벽 첫 비행기 편에 선어(鮮魚)를 부쳐주고 전 찾으러 다녔어요."
―정성이 대단합니다.
"공항 직원들도 제가 이상하게 보였나 봐요. 사정을 안 뒤 편의를 많이 봐줬어요. 아침에 제주도에서 온 생선을 저녁에 서울서 먹는다는 게 특이해 보이잖아요. 언론에 여러 번 소개됐어요."
―그래도 생선은 조심스러울 텐데.
"나중에 진사댁 한정식 코스에도 고등어와 갈치를 내놓았습니다. 그 전에 테스트를 했지요. 제가 한 달 동안 먹어봤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왜 상호(商號)를 '제주미항(美港)'으로 바꿨나요.
"그 부부가 이혼했거든요. 상호를 전처(前妻)가 가져간 거예요."
―진사댁과 제주미항이 잘될 때 차린 게 '한산기획'이란 회사지요.
"처음부터 음식점 하며 평생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만나면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뭐냐? 규모는 중국이 크고 디테일은 일본에 밀린다'고요. 자존심 상했어요. 그래서 개발한 게 안동 고택(古宅)체험여행입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한옥에 묵으며 한국인의 정(情)과 풍류를 느끼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지례예술촌, 경주 독락당, 병산서원, 봉정사를 코스로 잡았어요. 하회마을에 탤런트 류시원씨의 아버님 소유의 담연재가 있는데 거기도 이용했어요. 찜질방도 만들고 쑥뜸 체험도 하게 했습니다."
―한옥이 외국인이 살기엔 불편할 텐데.
"직원들이 먼저 가 준비를 해놓지요. 플라스틱 집기, 포마이카 장롱, 철제 캐비닛을 싹 치운 뒤 가져간 사방탁자, 도자기, 놋수저, 방짜유기를 놓는 겁니다. 3만~4만원 하는 한옥 숙박업소는 이부자리도 지저분하잖아요. 전 풀 빳빳하게 먹인 비단금침으로 준비했어요. 해 뉘엿뉘엿 넘어가면 직원들이 미리 설치해놓은 가짜 달(月)이 뜹니다. 그때 개다리소반에 음식을…."
―가짜 달?
"그거 그럴듯해요. 음식이야 진사댁이 있으니까. 봉정사에 들러 발우공양도 체험하게 하고. 그런 경험 하면 우는 외국인들이 많아요. 특히 일본인들이요. '20년간 한국에 와봤지만 오늘만큼 한국을 이해하게 된 날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때의 전 드라마 PD나 영화감독이었어요."
―외국인들이 다 고택체험을 좋아합니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미국·유럽인들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중국인들이 달라요. 워낙 크고 화려한 걸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한옥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화장실일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지요. 화장실까지 들고 갈 순 없으니까요. 고택의 문제점이 또 있어요. 워낙 제사를 많이 지내니 갑자기 집을 비워줄 수 없는 경우도 생기거든요."
진단학회
그때 종로구 계동 98번지 한옥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학자 이병도가 내놓은 집을 이대 교수가 소유하고 있었다. 주인이 내놓은 집이 잘 팔리지 않아 공시가격 근처까지 값이 떨어져 있었다. 안영환은 당일로 계약했다.
―고택체험여행으로 돈 좀 벌었습니까.
"1인당 30만원쯤 받았는데 한번 하고 나면 100만원씩 적자가 생겼어요. 후회는 없었어요. 한정식 팔고 고등어·갈치 판 돈이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오기가 생겼어요. 내가 꼭 한옥으로 상업적 성공도 이뤄보겠다고. 문화도 돈이 되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잖아요."
―락고재엔 진단학회 원형이 어느 정도 보존돼 있나요.
"기와가 많이 깨졌고 부자재들도 썩어 있었습니다. 1년 반 공사했습니다. 원형은 될 수 있는 대로 살리려 했어요."
―집 지으며 목수를 세 명이나 바꿨다면서요.
"처음엔 동네 목수를 썼어요. 아무리 봐도 '아니다'싶더군요. '집 지어본 적이 있느냐' 물었더니 서까래 고친 적은 있대요. 석 달 만에 바꿨죠. 두 번째는 문화재쪽 인사를 통해 소개받은 젊은이였는데 6개월 만에 본인이 포기했어요."
―왜요?
"자신이 없었대요. 마지막에 대목장 정영진씨에게 맡겼습니다. 그분이 한숨을 푹 쉬더군요. '아니!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하고 갔어'라고. 사연 많은 집입니다. 한옥은 잘못 지어지면 뜯어내고 다시 짓는 게 나아요. 돈 몇푼 아끼려다 잘못된 건물 보고 살면 괴롭잖아요."
―원래 한 채였나요.
"네 채를 사서 합친 겁니다. 락고재 밖에 주차장이 있지요? 그 땅도 산 겁니다. 그게 없었으면 맹지(盲地) 비슷하게 됐을 겁니다."
―마당의 저 소나무가 근사합니다.
"저건 C급인데…. 진짜 좋은 건 거북이 등껍질하고 똑같아야 하거든요."
―제 눈에 저 소나무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데.
"제가 10년 전부터 소나무를 사모으고 있거든요. 한 150그루 돼요. 건물에 10억 들어간 집과 건물에 5억, 조경에 5억 들어간 집, 어느 게 나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조경에 돈 들어간 집이 좋아요. 전 조경에 무척 신경씁니다."
―두 번째 한옥이 명동 진사댁이지요.
"그 건물은 대지 90평에 건평이 50평쯤 됩니다. 원래 제 선친과 다른 한 분이 공동 등기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사려 하겠어요. 4~5년째 안 팔리다 2000년 초엔 가격이 공시지가 근처였어요."
―듣고 보니 부동산 투자의 귀재네요.
"그 건물에 불이 났어요. 식당 아주머니가 뭘 튀기다 불이 옮겨 붙은 겁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그 아주머니도 아주 놀랐겠습니다.
"전 괜찮다고 했는데 본인이 오히려 괴로워했지요. 쾌활하던 사람이 우울증까지 걸리고.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그 집을 제가 목수를 사서 직접 지었습니다. 2층은 건물 안에, 3층은 외부에 목조 한옥을 올렸지요. 한옥으로 만든 후 예약이 꽉꽉 차요. 제가 한옥으로 돈 버는 법 보여주겠다고 했죠? 그때 실천했어요."
―설계를 해본 적이 없을 텐데 한옥을 직접 짓다니.
"한옥은 완벽한 설계도가 나올 수 없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80%는 주인의 안목이고 20%는 목수 솜씨라고."
명문의 조건
안영환은 한자를 '榮煥'에서 '永桓'으로 바꿨다. 3년쯤 됐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사주에 불(火)이 많아 그리 했는데 과연 마음이 편해지고 여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환풍류문화원'의 환(桓)은 한(韓)과 비슷한 의미다.
―그리고 세 번째가 안동 락고재지요. 거긴 왜 기와가 아니라 초가로 지은 겁니까.
"초가로 하면 귀찮은 일이 많긴 해요. 특수벼를 써야 하고 벼 벨 때도 손으로 베야 합니다. 기계로 자르면 길이가 짧아지거든요. 2인1실이 25만원(1인당 12만5000원), 1인1실은 18만원 받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를 제공합니다. 백김치, 갈치나 옥돔구이, 성게미역국에 짜지 않은 간장게장, 모듬전이 제공되고요, 아침은 고등어구이에 전복죽이나 콘티넨탈 브렉퍼스트 중에 택일하도록 합니다."
―자꾸 간장게장, 간장게장 하는데 혹시 간장게장에 한 맺힌 게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옛날에 너무 짠 기억 때문에."
―안동은 유림(儒林)들이 많지요. 보수적일 텐데.
"땅 나왔다는 소릴 듣고 곧바로 내려가 계약했어요. 그 후 주변 종가(宗家) 어른들을 찾아뵀지요. 하회마을에 풍산 유씨가 많지만 전에는 광주 안씨도 살았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니 선선히 허락해주셨어요. 전 하회 락고재 지은 후에 주민등록을 아예 안동으로 옮겼습니다. 하회 락고재는 하회마을 안에 있고 밖에 또 한옥호텔도 지을 겁니다."
―경기도 용인에도 지금 뭔가를 짓고 있지요.
"백남준 미술관 옆에 경회루 같은 누각(樓閣)을 짓고 있습니다. 누각은 통풍이 잘못되면 강풍에 휘청거리거나 아예 무너져요. 그래서 몇백명이 올라가도 버틸 신공법을 채용했어요. 통유리를 설치하되 접이식으로 통풍도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달 말에 오픈합니다."
―이름이 특이하더군요.
"운외몽중루(雲外夢中樓)라고, 추사 김정희 선생 친구가 금강산에 여행 갔다 그 풍광에 감탄해 지은 시구인데 추사가 문집명을 '운외몽중'으로 지었습니다. 거기서 유래한 겁니다."
―환풍류문화원은 왜 만들었습니까.
"락고재의 서브 타이틀이 환풍류문화원입니다. 음식, 음주, 음악, 시, 서, 화, 문학을 즐길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전 오래전부터 외국관광객들이 갈비나 뜯고 룸살롱이나 가는 걸 굉장히 못마땅해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것 갖고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북촌 한옥마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잖아요. 평당 800만~1000만원인데 그래선 한옥 대중화가 안 돼요. 평당 450만~500만원으로 낮춰야 하는데, 6·25 이후 60년간 우리 한옥은 사라지고 아파트만 잔뜩 들어섰잖아요. 한옥이 완전히 단절된 거지요. 제가 한옥학교를 만들려 합니다. 부지도 마련했어요. 안동의 고등공민학교 자리 8000평입니다."
―목수 양성소인가요.
"내년 봄부터 1기당 20명씩을 배출할 겁니다. 그 친구들 활용해 전국의 한옥 짓는 거 지원도 하고, 일자리도 알선해주면 일석이조지요. 3년 정도 인력을 배출하면 대단한 자산이 될 겁니다."
―원래 그렇게 거침없이 일을 벌입니까.
"지금까진 약과예요. 락고재를 하면서 다미야라는 일본 출판인을 알게 됐어요. 그분이 '지구여행시리즈'를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본 교토(京都) 부근에 '락고재 재팬'을 지을 계획입니다. 왜 우리만 일본 전통 료칸에 가서 돈을 써야 합니까. 그들도 우리 한옥에서 자고 찜질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혹시 일본의 노(能) 아세요?"
―가면극의 일종 아닌가요.
"가부키가 대중적이라면 노는 옛 일본 쇼군(將軍)이 장수들에게만 보여주는 공연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난(亂)'이란 영화에도 나와요. 이런 식이에요. '둥' 하는 소리에 맞춰 꽃을 턱 꽂는. 그걸 보며 감탄했는데 저도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일본 땅에서."
―업무상 알게 된 일본인과 그런 사업까지 하다니 남을 잘 믿는 모양입니다.
"다미야의 부친이 유명한 컬렉터입니다. 그분이 사는 곳이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요지(陶窯址)이기도 하고요. 그 컬렉션을 지하에 보관하고 위에 한옥호텔로 지으면 일석이조지요. 그분들이 더 열심입니다."
안영환은 락고재 정자 위에서 막걸리를 나누는 게 최상의 대접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호박전과 생선전 3점에 장독뚜껑 같은 그릇에 얼음 동동 띄운 막걸리를 내오니 그야말로 박주산채(薄酒山菜)다. 그가 한잔 들이켠 뒤 말했다.
"아들과 명문가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약속을 했어요. 부모에게 받은 재산의 절반은 무조건 사회에 환원한다고. 그 전통이 3~4대쯤 내려가면 명문가가 될 텐데. 모르죠, 중간이 또라이가 나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텐데…."
▲ 삐그덕 소리나는 문을 열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마시고 기왓장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질반질한 기둥에 기대 한옥 내음을 맡는다. 외국인 사로잡은 락고재의 안영환은 “가슴이 짜릿해진다”고 말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 삐그덕 소리나는 문을 열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마시고 기왓장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질반질한 기둥에 기대 한옥 내음을 맡는다. 외국인 사로잡은 락고재의 안 영환은 "가슴이 짜릿해진다"고 말했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외국인들이 말했다… "한국문화 정체성이 뭐냐… 규모는 중국이 크고… 디테일은 일본에 밀린다"… 그가 말했다… "한옥에서 한번 자보라"…
어떤 사람이 한옥 헐고 빌라 짓는데… 나한테 자문을 해달래… 가서 보니 허물기는 그렇고 수리를 하는데… 숨어있던 한옥의 선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버렸지…
#1.락고재
종로구 계동 뒷골목에 한옥 한 채가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대금(大琴) 가락이 객(客)을 맞았다. 방 네 칸에 정자(亭子) 하나, 한복판에 한 그루 소나무가 굽어 있는데 모습이 영락없는 거북이 등껍데기이다. 200평 공간. 청아하기 그지없다.
'락고재(樂古齋)', 이 집의 이름이다. '옛것을 즐긴다'는 뜻이다. 이 터의 주인은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 거기서 문일평, 최현배 같은 우리 선비들이 일제에 맞서 '한국학'을 지키려 했다. 1934년 발족한 진단학회(震檀學會)다.
그 집에 일본인들이 줄서 있다. 하루 자는 데 20만원 가까운 돈을 기꺼이 지불할 태세다. 터와 인연 맺은 주인이 말했다. "한옥을 보면 가슴이 짜릿해지지요. 온돌에 누우면 '시원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 문화유전자지요."
#2.진사댁(進士宅)
명동파출소 옆 골목은 어른 셋 지나기도 비좁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하고 목울대가 울린다. 기와지붕이 맞은편 건물과 닿을 듯 하늘로 솟아있다. 에게해 어느 절벽에 매달린 수도원처럼 기이한 풍경이 좁은 골목 안에 있다.
이 자리엔 낡은 건물이 있었다. 70년도 넘어 전선이 안에서 얽히고설켜 있었다. 거기서 불이 났다. 음식 만들던 아주머니는 집을 잿더미로 만든 뒤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한다. 그는 불난 집에 대운(大運) 터진다는 말을 알았을까.
"이왕 다 타버린 거 한옥을 만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자재며 기와를 전부 몸으로 실어날랐어요. 그래도 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명동 한가운데, 이런 골목에도 한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요, 하하하!"
#3.안동 부용대 옆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95번지를 몇 시간째 돌던 나그네가 있었다. 돈깨나 있어 뵈는 그는 과연 서울 강남에 빌딩만 여덟채를 가진 이였다. 그가 말했다. "이런 명당이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이가 주인인지 얼굴 좀 보고 싶소."
안동 락고재 맞은편 부용대는 해발 64m다. 언뜻 뒷동산 같지만 어엿한 태백줄기 자락이다. 정상에 오르면 태극 모양으로 하회마을을 휘도는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그 뒤로 하회(河回)마을을 보호하고 있다는 만송정 솔숲이 짙다.
거기 네채의 초가가 세워졌다. 초가 안에는 편백나무 욕조가 있다. 거기 몸을 적시며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다 외국인들은 운다. 조선 선비들의 품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초가집 주인이 또 큰소리쳤다. "그게 우리 풍류(風流)지요."
인생 전사(前史)
안영환(安永桓·53)은 영락없는 '밥 장수'다. 마포·명동·선릉에서 한정식집 '진사댁(進士宅)'을 한다. 목동·명동·여의도에선 '제주미항'이란 고등어·갈치 전문점도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한옥(韓屋)예술가'라 했다.
'몽중(夢中)', 그의 호(號)다. '꿈속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호로 그의 팔자(八字)를 풀어보면 초년운(初年運)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서울교대부국 나와 K중에 가려 했지만 나라가 정책을 바꿔 그를 '뺑뺑이 1세대'로 만들었다.
K고에 두 번 도전했다 다 낙방했다. 2차 명문(名門) 대광고에 진학했더니 이번엔 원치 않는 종교 문제로 말썽에 휘말렸다. "종교자유를 외치다 흠씬 두들겨맞았어요. 후배 중에 강모라고 있었죠? 사실 제가 그 친구의 원조였습니다."
▲ 남에게 맡기고 손 놓기보다는 주인이 나서서 움직여야 제대로 돌아간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얘기다. 제주도에서 새벽에 고등어 공수하던 '극성 음식점 주인' 안영환은 목수 사서 직접 한옥을 지어 올렸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입학 때 전교 20~30등쯤 하던 성적이 내리 비탈길을 탔다. 고3 때 반(班) 성적을 돌아보니 뒤에 야구특기생 두 명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 차려 공부했지만 다시 서울대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모두가 의욕상실 때문이었다.
겨우 힘내 나라에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번엔 호메이니가 혁명을 일으켰다. 팔레비왕(王)은 호메이니에게 쫓겨났고 장학금은 그의 품에서 날아갔다. 그 뒤 안영환은 테니스로 소일했다.
군 복무 하던 어느 날 광화문 외국어학원에서 만나 사귀던 지금의 아내가 선언했다. "나, 미국 이민 가야 해. 부모님 따라서. 같이 갈래, 헤어질래?" 제대 후 가보니 아내는 캘리포니아주립대 3학년 과정에 남편을 편입시켜 놓고 있었다.
전공이 듣도 보도 못한 '컴퓨터 사이언스'였다. 한국에서 팽팽 놀던 사나이가 된통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였다. 그가 말했다. "왜, 수석들은 예습·복습만 한다잖아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거 맞는 말이던데요."
아침 7시 도서관에서 2시간 예습했다. 10%가 이해됐다. 교수 강의 들으면 80~90%가 머리에 들어왔다. 다시 교수 방 찾아 1~2시간 이야기하니 그제야 하루 배운 게 자기 것이 됐다. 졸업 때 그는 난생처음 수석(首席)이란 걸 해봤다.
1985년부터 91년까지 그는 EDS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거기서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수습에서 정사원 되는 데 3년 걸리던 것을 8개월 만에 해치웠다. 월 2000달러 하던 연봉을 2년 6개월 만에 '더블'로 만들었다.
그때 아버지가 2남3녀의 장남을 한국으로 불렀다. 그 호출이 없었다면 안영환은 평생 모기지론 갚다 인생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라고 했다. 은행원 출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령했다. "부동산 시행업을 하는데 와서 도와. 빨리 와!"
진사댁
―그래 한국에 들어와 뭘 했습니까.
"선친을 도와 경기도 광명과 목동에 상가 세 채를 지었습니다. 분양이 다 잘됐는데 꼭 안 팔리는 곳은 있지요."
―미국에서 그냥 번듯한 직장 그냥 다니지.
"선배들 보며 회의를 느꼈어요. 모기지론 갚고 그럭저럭 살다 퇴직하는. 20년 후 제 모습이 저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즈음 한옥과의 인연이 생겼어요."
―어떻게요.
"한옥 헐고 빌라를 지으려는 이가 자문을 해달래요. 마포구 대흥동이었어요. 사람도 살지 않고 팔리지도 않아 토초세(土超稅)만 무는 애물단지였어요. 아무리 봐도 빌라 지을 자리는 아닌 것 같았어요. '그냥 수리해서 한정식집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요.
"주인이 '난 자신 없으니 당신이 해보라'는 겁니다. 뭐에 씌었는지 그냥 맡았어요. 수리를 시작했지요. 콘셉트를 노출(露出)로 잡고 천장 뜯고 시멘트 발라놓은 것 뜯어냈지요. 아! 그런데 그제야 숨었던 한옥의 선(線)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 모습이란…."
―한옥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보통 집이 아니었습니다. 마포 황부자 아시죠? 그가 살던 집이었어요. 상량문(上樑文)엔 광서 6년이란 글귀도 보이고."
―거기가 원조 진사댁이지요? 이름은 왜….
"락고재와 진사댁이란 택호(宅號)에 유래가 있어요. 락고재는 선친께서 '학고재'를 봤다며 권한 이름입니다. 어찌 보면 표절이지요. 아버님 위로 3대째 성균관 진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생긴 이름입니다."
―음식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데, 겁이 없나요.
"처의 이모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식점을 했어요. '우래옥'이라고…, 서울 우래옥과 동업하다 나중에 인수했지요. 제가 우래옥 전산관리 시스템을 만들어줬어요. 몇달 하다 보면 운영과 재고관리를 훤히 알게 되지요."
―그래서 잘 됐습니까.
"된장찌개 파는 5000원짜리 밥집으로 시작했는데 하루 손님이 댓명도 안 될 때가 많았어요. 1년 반가량 정말 고전했어요."
―음식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던데요.
"이유가 있어요. 주방장 아주머니가 아침에 밑반찬을 한꺼번에 해놔요. '손님이올 때마다 해야 맛있을 텐데'라고 하니 음식점은 다 그렇대요. 간장게장도 너무 짰어요. '이게 아니다' 싶어 후임자를 물색하고 다녔지요."
―은인을 만났겠군요.
"'왕 실장'이란 할머니가 있어요. 경기도 기흥에 손님들이 줄서 기다리는 집이 있었어요. 왕 실장이 거기서 일했는데 빚을 3000만~4000만원쯤 지고 있었어요. 월급 130만원 받아 주인에게 월 3부 이자 내니 어땠겠어요. 제가 모셔왔죠."
―대박입니까.
"그때부터 손님이 몰렸어요. 각종 메뉴를 머리 싸매고 개발했으니까요. 간장게장도 짜지 않게 만들고. 손님이 많아지니 실내에서 가야금, 대금 연주도 하게 됐고요."
제주미항
황부잣집에서 열었던 원조 진사댁과의 인연은 6년 만에 끝났다. 어느 날 교회에 팔렸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집 팔겠다고 해 한참 흥정하던 참이었다. 안영환이 깜짝 놀라 쫓아갔지만 이미 계약이 끝나 있었다. 인연은 왔다 간다.
―진사댁 다음이 '제주 물항'이지요.
"친척 동생이 제주도에서 고등어와 갈치를 팔았어요. 테이블이 8개뿐인데 수입은 월 300만~400만원이나 됐어요. '되겠다' 싶어 '서울에서 해보면 안 될까'라고 물으니 안 된대요."
―남 잘하는 걸 공짜로 하겠다니 싫다고 했겠군요.
"고등어, 갈치는 금세 상한다고 생각했잖아요. 아무도 그걸 비행기로 공수(空輸)해 올 생각을 못한 겁니다. 운임(運賃)이 들어도 부가가치가 20~30%는 넘어보였어요. 동생을 석 달이나 설득했습니다. 매일 새벽 첫 비행기 편에 선어(鮮魚)를 부쳐주고 전 찾으러 다녔어요."
―정성이 대단합니다.
"공항 직원들도 제가 이상하게 보였나 봐요. 사정을 안 뒤 편의를 많이 봐줬어요. 아침에 제주도에서 온 생선을 저녁에 서울서 먹는다는 게 특이해 보이잖아요. 언론에 여러 번 소개됐어요."
―그래도 생선은 조심스러울 텐데.
"나중에 진사댁 한정식 코스에도 고등어와 갈치를 내놓았습니다. 그 전에 테스트를 했지요. 제가 한 달 동안 먹어봤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왜 상호(商號)를 '제주미항(美港)'으로 바꿨나요.
"그 부부가 이혼했거든요. 상호를 전처(前妻)가 가져간 거예요."
―진사댁과 제주미항이 잘될 때 차린 게 '한산기획'이란 회사지요.
"처음부터 음식점 하며 평생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만나면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뭐냐? 규모는 중국이 크고 디테일은 일본에 밀린다'고요. 자존심 상했어요. 그래서 개발한 게 안동 고택(古宅)체험여행입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한옥에 묵으며 한국인의 정(情)과 풍류를 느끼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지례예술촌, 경주 독락당, 병산서원, 봉정사를 코스로 잡았어요. 하회마을에 탤런트 류시원씨의 아버님 소유의 담연재가 있는데 거기도 이용했어요. 찜질방도 만들고 쑥뜸 체험도 하게 했습니다."
―한옥이 외국인이 살기엔 불편할 텐데.
"직원들이 먼저 가 준비를 해놓지요. 플라스틱 집기, 포마이카 장롱, 철제 캐비닛을 싹 치운 뒤 가져간 사방탁자, 도자기, 놋수저, 방짜유기를 놓는 겁니다. 3만~4만원 하는 한옥 숙박업소는 이부자리도 지저분하잖아요. 전 풀 빳빳하게 먹인 비단금침으로 준비했어요. 해 뉘엿뉘엿 넘어가면 직원들이 미리 설치해놓은 가짜 달(月)이 뜹니다. 그때 개다리소반에 음식을…."
―가짜 달?
"그거 그럴듯해요. 음식이야 진사댁이 있으니까. 봉정사에 들러 발우공양도 체험하게 하고. 그런 경험 하면 우는 외국인들이 많아요. 특히 일본인들이요. '20년간 한국에 와봤지만 오늘만큼 한국을 이해하게 된 날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때의 전 드라마 PD나 영화감독이었어요."
―외국인들이 다 고택체험을 좋아합니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미국·유럽인들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중국인들이 달라요. 워낙 크고 화려한 걸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한옥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화장실일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지요. 화장실까지 들고 갈 순 없으니까요. 고택의 문제점이 또 있어요. 워낙 제사를 많이 지내니 갑자기 집을 비워줄 수 없는 경우도 생기거든요."
진단학회
그때 종로구 계동 98번지 한옥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학자 이병도가 내놓은 집을 이대 교수가 소유하고 있었다. 주인이 내놓은 집이 잘 팔리지 않아 공시가격 근처까지 값이 떨어져 있었다. 안영환은 당일로 계약했다.
―고택체험여행으로 돈 좀 벌었습니까.
"1인당 30만원쯤 받았는데 한번 하고 나면 100만원씩 적자가 생겼어요. 후회는 없었어요. 한정식 팔고 고등어·갈치 판 돈이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오기가 생겼어요. 내가 꼭 한옥으로 상업적 성공도 이뤄보겠다고. 문화도 돈이 되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잖아요."
―락고재엔 진단학회 원형이 어느 정도 보존돼 있나요.
"기와가 많이 깨졌고 부자재들도 썩어 있었습니다. 1년 반 공사했습니다. 원형은 될 수 있는 대로 살리려 했어요."
―집 지으며 목수를 세 명이나 바꿨다면서요.
"처음엔 동네 목수를 썼어요. 아무리 봐도 '아니다'싶더군요. '집 지어본 적이 있느냐' 물었더니 서까래 고친 적은 있대요. 석 달 만에 바꿨죠. 두 번째는 문화재쪽 인사를 통해 소개받은 젊은이였는데 6개월 만에 본인이 포기했어요."
―왜요?
"자신이 없었대요. 마지막에 대목장 정영진씨에게 맡겼습니다. 그분이 한숨을 푹 쉬더군요. '아니!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하고 갔어'라고. 사연 많은 집입니다. 한옥은 잘못 지어지면 뜯어내고 다시 짓는 게 나아요. 돈 몇푼 아끼려다 잘못된 건물 보고 살면 괴롭잖아요."
―원래 한 채였나요.
"네 채를 사서 합친 겁니다. 락고재 밖에 주차장이 있지요? 그 땅도 산 겁니다. 그게 없었으면 맹지(盲地) 비슷하게 됐을 겁니다."
―마당의 저 소나무가 근사합니다.
"저건 C급인데…. 진짜 좋은 건 거북이 등껍질하고 똑같아야 하거든요."
―제 눈에 저 소나무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데.
"제가 10년 전부터 소나무를 사모으고 있거든요. 한 150그루 돼요. 건물에 10억 들어간 집과 건물에 5억, 조경에 5억 들어간 집, 어느 게 나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조경에 돈 들어간 집이 좋아요. 전 조경에 무척 신경씁니다."
―두 번째 한옥이 명동 진사댁이지요.
"그 건물은 대지 90평에 건평이 50평쯤 됩니다. 원래 제 선친과 다른 한 분이 공동 등기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사려 하겠어요. 4~5년째 안 팔리다 2000년 초엔 가격이 공시지가 근처였어요."
―듣고 보니 부동산 투자의 귀재네요.
"그 건물에 불이 났어요. 식당 아주머니가 뭘 튀기다 불이 옮겨 붙은 겁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그 아주머니도 아주 놀랐겠습니다.
"전 괜찮다고 했는데 본인이 오히려 괴로워했지요. 쾌활하던 사람이 우울증까지 걸리고.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그 집을 제가 목수를 사서 직접 지었습니다. 2층은 건물 안에, 3층은 외부에 목조 한옥을 올렸지요. 한옥으로 만든 후 예약이 꽉꽉 차요. 제가 한옥으로 돈 버는 법 보여주겠다고 했죠? 그때 실천했어요."
―설계를 해본 적이 없을 텐데 한옥을 직접 짓다니.
"한옥은 완벽한 설계도가 나올 수 없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80%는 주인의 안목이고 20%는 목수 솜씨라고."
명문의 조건
안영환은 한자를 '榮煥'에서 '永桓'으로 바꿨다. 3년쯤 됐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사주에 불(火)이 많아 그리 했는데 과연 마음이 편해지고 여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환풍류문화원'의 환(桓)은 한(韓)과 비슷한 의미다.
―그리고 세 번째가 안동 락고재지요. 거긴 왜 기와가 아니라 초가로 지은 겁니까.
"초가로 하면 귀찮은 일이 많긴 해요. 특수벼를 써야 하고 벼 벨 때도 손으로 베야 합니다. 기계로 자르면 길이가 짧아지거든요. 2인1실이 25만원(1인당 12만5000원), 1인1실은 18만원 받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를 제공합니다. 백김치, 갈치나 옥돔구이, 성게미역국에 짜지 않은 간장게장, 모듬전이 제공되고요, 아침은 고등어구이에 전복죽이나 콘티넨탈 브렉퍼스트 중에 택일하도록 합니다."
―자꾸 간장게장, 간장게장 하는데 혹시 간장게장에 한 맺힌 게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옛날에 너무 짠 기억 때문에."
―안동은 유림(儒林)들이 많지요. 보수적일 텐데.
"땅 나왔다는 소릴 듣고 곧바로 내려가 계약했어요. 그 후 주변 종가(宗家) 어른들을 찾아뵀지요. 하회마을에 풍산 유씨가 많지만 전에는 광주 안씨도 살았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니 선선히 허락해주셨어요. 전 하회 락고재 지은 후에 주민등록을 아예 안동으로 옮겼습니다. 하회 락고재는 하회마을 안에 있고 밖에 또 한옥호텔도 지을 겁니다."
―경기도 용인에도 지금 뭔가를 짓고 있지요.
"백남준 미술관 옆에 경회루 같은 누각(樓閣)을 짓고 있습니다. 누각은 통풍이 잘못되면 강풍에 휘청거리거나 아예 무너져요. 그래서 몇백명이 올라가도 버틸 신공법을 채용했어요. 통유리를 설치하되 접이식으로 통풍도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달 말에 오픈합니다."
―이름이 특이하더군요.
"운외몽중루(雲外夢中樓)라고, 추사 김정희 선생 친구가 금강산에 여행 갔다 그 풍광에 감탄해 지은 시구인데 추사가 문집명을 '운외몽중'으로 지었습니다. 거기서 유래한 겁니다."
―환풍류문화원은 왜 만들었습니까.
"락고재의 서브 타이틀이 환풍류문화원입니다. 음식, 음주, 음악, 시, 서, 화, 문학을 즐길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전 오래전부터 외국관광객들이 갈비나 뜯고 룸살롱이나 가는 걸 굉장히 못마땅해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것 갖고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북촌 한옥마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잖아요. 평당 800만~1000만원인데 그래선 한옥 대중화가 안 돼요. 평당 450만~500만원으로 낮춰야 하는데, 6·25 이후 60년간 우리 한옥은 사라지고 아파트만 잔뜩 들어섰잖아요. 한옥이 완전히 단절된 거지요. 제가 한옥학교를 만들려 합니다. 부지도 마련했어요. 안동의 고등공민학교 자리 8000평입니다."
―목수 양성소인가요.
"내년 봄부터 1기당 20명씩을 배출할 겁니다. 그 친구들 활용해 전국의 한옥 짓는 거 지원도 하고, 일자리도 알선해주면 일석이조지요. 3년 정도 인력을 배출하면 대단한 자산이 될 겁니다."
―원래 그렇게 거침없이 일을 벌입니까.
"지금까진 약과예요. 락고재를 하면서 다미야라는 일본 출판인을 알게 됐어요. 그분이 '지구여행시리즈'를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본 교토(京都) 부근에 '락고재 재팬'을 지을 계획입니다. 왜 우리만 일본 전통 료칸에 가서 돈을 써야 합니까. 그들도 우리 한옥에서 자고 찜질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혹시 일본의 노(能) 아세요?"
―가면극의 일종 아닌가요.
"가부키가 대중적이라면 노는 옛 일본 쇼군(將軍)이 장수들에게만 보여주는 공연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난(亂)'이란 영화에도 나와요. 이런 식이에요. '둥' 하는 소리에 맞춰 꽃을 턱 꽂는. 그걸 보며 감탄했는데 저도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일본 땅에서."
―업무상 알게 된 일본인과 그런 사업까지 하다니 남을 잘 믿는 모양입니다.
"다미야의 부친이 유명한 컬렉터입니다. 그분이 사는 곳이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요지(陶窯址)이기도 하고요. 그 컬렉션을 지하에 보관하고 위에 한옥호텔로 지으면 일석이조지요. 그분들이 더 열심입니다."
안영환은 락고재 정자 위에서 막걸리를 나누는 게 최상의 대접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호박전과 생선전 3점에 장독뚜껑 같은 그릇에 얼음 동동 띄운 막걸리를 내오니 그야말로 박주산채(薄酒山菜)다. 그가 한잔 들이켠 뒤 말했다.
"아들과 명문가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약속을 했어요. 부모에게 받은 재산의 절반은 무조건 사회에 환원한다고. 그 전통이 3~4대쯤 내려가면 명문가가 될 텐데. 모르죠, 중간이 또라이가 나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텐데…."
▲ 삐그덕 소리나는 문을 열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마시고 기왓장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질반질한 기둥에 기대 한옥 내음을 맡는다. 외국인 사로잡은 락고재의 안영환은 “가슴이 짜릿해진다”고 말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