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빌라델피아교회를 향한 칭찬과 약속’입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한지 벌써 14주년을 맞았습니다. 삼천포 내려온 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14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삼천포 내려오길 참 잘했다, 삼천포 안 빠졌으면 이런 좋은 성도님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생각하니 하나님께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서울, 부산서 삼천포 오시길 잘 하셨죠?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울긋불긋 가을산도 아름답지만 푸르름이 짙어가는 유월의 산도 참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산이 아무리 멋있어도 가까이 가서 보면 죽은 나무도 있고 볼품없는 바위도 있습니다. 그것만 보고 산을 평하는 사람은 등산할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때마다 도우시고 이끄시는 은혜는 못 보고 성도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합니다. 산 전체를 보듯이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아시아는 신천지에서 말하는 대한민국이 아니고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남서부지역입니다. 그 일곱 교회 중에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았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책망만 받았고, 어떤 교회는 칭찬만 받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았고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한 교회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델피아교회와 서머나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도 칭찬받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칭찬받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빌라델피아는 B.C 140년, 헬라 황제 앗탈루스가 건립한 신흥 도시입니다. 빌라델피아라는 말은 헬라어 '필로스'와 '아델포스'라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필로스'가 '사랑, 우정'을 뜻하고 '아델포스'가 '형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형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 이 지역의 통치자였던 아탈로스 2세에게 유능한 동생 유메네스가 있었는데 간신들이 그를 왕위에 오르도록 충동했지만 동생은 끝까지 거절하고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데서 빌라델피아, 즉 형제 사랑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1.먼저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도요한에게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즉 죄가 도무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실 이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진실하십니다. 그에게는 변함도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판결은 정확하시고 그가 행하시는 일은 공의롭고 공평하십니다. 그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했는데 열쇠는 단순히 열고 닫는 것이기 보다 통치하다, 판결하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통치권, 주권을 가진 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가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인자됨을 인하여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다 주셨다고 했습니다(요5:22). 그래서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통치에 복종치 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판결에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의 주권에 어떤 피조물도 대항할 수 없고 도전할 수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또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적인 구원의 문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2.그리고 빌라델피아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많은 책망을 하셨지만 예수님께 나아오는 무리를 향해서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칭찬도 인색한 경우가 있습니다. 도무지 칭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음이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칭찬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책망은 덜 할수록 유익하고 칭찬은 더 할수록 유익합니다.
8절을 보시면 빌라델피아교회는 먼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받았습니다. 10절에서도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적은 달란트, 즉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의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부여받은 능력이나 재능, 은사가 적었지만 그리고 세상적으로 볼 때 신분이나 재력이나, 지식도 보잘 것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며 직분을 지키며 주의 계명을 지키며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지역은 근교에 포도가 많이 제배되는 곳입니다. 원래 이 도시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주신으로 섬기는 도시입니다. 그 결과는 방탕과 향락 풍조가 도시 분위기를 지배하였습니다. 술과 관련된 산업은 음란 퇴폐 문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발붙이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문화나 풍습을 따라야 합니다. 즉 그런 곳에서 신앙생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주님께 칭찬받을 정도로 주의 말씀을 지키며 바른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양다리 걸치고 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작은 능력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무엇보다 힘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함은 마땅히 행할 도리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치 결혼하는 부부가 서로에게 서약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따르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일 따르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교회, 죽은 신앙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무엇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구원의 이름으로 주신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구원의 이름, 예수 이름을 존중히 여겨 높이고 그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느님, 하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또한 그 이름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빌라델피아 교회는 어떻게 적은 능력으로도 믿음을 지키며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들은 능력의 적고 많음을 서로 비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교하다보면 남의 떡이 커 보여서 불평과 불만이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그저 자기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감사하다 보니 만족할 줄 알고 그러니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다 보면 자신의 적은 능력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더 옹졸한 사람, 인색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비교하면 두 가지,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도리어 마음을 넓히고 더 낮은 마음, 섬기는 자세로 나아갔지 않았나, 그래서 칭찬받는 교회, 성도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도 그리되길 소원합니다.
3.마지막으로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약속과 권면입니다. 적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성도를 향해 주님은 약속합니다. 9절을 그냥 읽고는 무슨 말인가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는데, 그랜드 주석을 참고하면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마치 사탄의 회당처럼 쓰임 받은 자들인데 그들 중 몇 명이 얼마 후에 너희에게 나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너희에게 온다고 해서 두려워마라, 그들이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희 발 앞에 꿇게 될 것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그들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약속합니다.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또한 끝까지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 이름과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고 했습니다. 성전의 기둥은 영원하고 굳건함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지키며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견고히 서게 될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그 믿음도 주님이 붙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인치시고 주님이 소유주가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심판이 얼마나 공의로운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궤 앞에 앉으셔서 지켜보다가 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을 보고 저가 제일 많이 넣었다고 하시면서 주님은 양을 보지 않고 질을 보고 판단하셨던 것처럼 오늘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작은 능력으로도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였으니 장차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공평한 판결이십니까.
말하자면 큰 교회에서 큰 일 했다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기둥이 되는 약속이 아니라 비록 작은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죽도록 충성하는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기준이 적용되어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는 크고 원대한 일만 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주신 능력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에 관심을 두기보다 그가 가진 능력의 범위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가 능력이 모자라 큰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을 때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입니다.
충성된 자는 그가 상상하지도 못할 면류관을,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끝까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충성함으로 받은 구원과 상급을 지켜야 합니다. 빌라델피아교회는 끝까지 인내하여 주님으로부터 마침내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비록 적은 능력이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지만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 나가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칭찬과 약속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빌라델피아 교회처럼 칭찬받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