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요한 6,63.3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굳을 대로 굳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시며 그들의 굳은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그 때와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상식적이며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피리를 불며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의 흥을 돋우는데 슬피 우는 사람이나 모두가 곡을 하며 슬피 울고 있는데 혼자서 춤을 춘다면 그 사람의 그 같은 행동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그 행동 자체로 그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심에도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이 마치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웃어야 할 때에 울고, 울어야 할 때에 웃는 이들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와 같이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이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강하게 질책하시며 예수님이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시는 말씀의 참 뜻을 받아들여 함을 역설하십니다.
말길을 못 알아들을 때에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 사람의 어휘 수준에 맞게 그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면 그 누구라도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부터 그 말을 거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그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원천적으로 그 말의 수용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용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따라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말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환하게 열려 있다면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내 마음 안을 더욱 환히 밝혀 참 지혜를 내려주시고 그와는 반대로 내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 있다면 어두운 내 마음은 더욱 어두워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굳을 대로 굳은 마음은 결국 하느님의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하면 변화될 수 있을까요? 돌처럼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움의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굳을 대로 굳은 마음은 도대체 무엇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독서의 코린토서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를 전하는 오늘 독서의 코린토 1서의 말씀은 사랑의 본질과 사랑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름다운 언어와 핵심을 꿰뚫은 명쾌한 논리로 전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랑이 우리의 굳은 마음의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하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9-1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을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사랑뿐임을 이야기합니다. 곧 오직 사랑만이 믿을만하며 오직 사랑만이 온전한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하느님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이하게 되어 하느님이 나를 아시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될 때, 우리의 돌처럼 굳은 마음은 살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며 그 변화가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이야기하면 변화를 갈망합니다. 지금의 내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희망하며 지금의 부족한 내 모습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변화란 말처럼 그리 쉽지 많은 않습니다. 나의 작은 습관 하나 고치려 해봐도 이미 내 몸에 익숙해진 그 악습을 쉽게 변화시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 삶의 진정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마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때, 그 사랑의 은총의 힘으로 우리 안에 하느님을 통한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 그 변화가 바로 우리를 진정 그 근본부터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며 그 사랑만이 우리 삶의 진정한 마음의 문을 여는 길,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피리 소리를 듣고 함께 하는 이들과 춤추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며 곡을 하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되는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영성체송의 시편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꼭 새기십시오. 하느님의 자애, 존귀하온 하느님의 자애가 우리 삶의 유일한 변화의 원동력이며 그 자애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휴식처 우리를 보호하는 피신처가 되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내 마음의 문을 하느님께 활짝 여는, 그래서 하느님이 비추어 주시는 빛으로 내 마음을 밝히고 하느님이 주시는 참 지혜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요한 6,6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