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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여유 스크랩 (6) 곤명, 대리, 여강, 샹글리라 여행기
jose 추천 0 조회 118 09.08.19 21: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곤명(昆明, 쿤밍)

 

    곤명은 운남성(雲南省)의 성도이며 인구 약 250만의 중국 서남지역 최대 도시이다. 운남성은 남쪽으로 월남 라오스 미얀마와 접경하고 있으며 높은 산과 깊은 강으로 생활터전이 분화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여러 종류의 소수민족들이 제마다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지니고 살았던 곳이다. 이에 따라 운남성에는 현재 26 종이나 되는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곤명시에도 이러한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한편 곤명은 운귀고원(雲貴高原)의 중앙부분 분지 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시내 바닥의 높이가 해발 1900m에 가깝다. 겨울은 춥지 아니하고 여름에도 섭씨 30도 이상 되는 더위가 없어 일년 내내 봄과 같은 날씨라 하여 일명 춘성(春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동백 목련 철쭉 개나리 등 꽃이 유명하고 시내에도 연중 꽃이 떨어지는 때가 없다.

   곤명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만년전 구석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진국(眞國)이라는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전한의 무제는 기원전 109년 진국 왕에게 진왕지인(眞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어 이 나라를 정식으로 인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남조국(南詔國) 시대에는 현재의 곤명 땅이 선단성(敾闡城) 이라는 도성으로서 다소의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대는 변경의 산악지대라서 중원과는 거리가 멀고 교통이 발달되지 못했던 때에는 낙후된 오지로 취급되어 주목을 받지 못한 지역이었다.

 

 화정선사

 

    그러다가 13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선단성과 이 지역 전체가 진기스칸의 손자인 제5대 몽골 대칸(大汗) 후비라이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으며 1271년 중원에 원(元)나라가 건국되면서 이 지역에 운남성(雲南省)이 설치되었다. 한편 선단성이 있었던 일대는 곤명현(昆明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명나라 때에 들어와서 곤명은 운남성의 성도로 지정되어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개혁 개방 이후에 와서는 곤명은 특히 경제적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다. 철도와 항공편으로 전국의 주요 도시와 연결되고 특히 외국과의 항공 교통이 열리면서 중국 서남부 지역의 경제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1999년 세계원예박람회가 개최되어 곤명은 한번 더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최근에는 야금 기계 전자 방적 등 제조업이 발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곤명에는 지금 관광산업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곤명의 토산품으로 운남성 남부 보이현(普?縣)과 시상반나(西?版納) 지방에서 나는 보이차(普?茶)가 유명하다. 보이차는 교목(蕎木)이라는 나무의 잎을 발효시켜 건조한 대엽차의 일종인데 몸을 따뜻하게 하고 코레스테롤과 지방질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오래된 것일수록 효능이 좋다고 한다.

    곤명에서 약 40km 떨어진 교외에 있는 춘성리조트라는 골프장도 유명하다. 양종해(陽宗海)라고 하는 호수 가에 자리 잡은 36홀 양 잔디 코스인데 경관과 코스 설계 및 관리상태가 모두 좋아 스스로 중국제일의 골프장이라 자랑하는 곳이다. 숙박 설비와 음식도 좋은 편이다.

 

서산 용문(龍門)

 

   곤명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15km 가량 떨어진 곳에 싱가폴 면적의 약 절반만큼 된다는 곤명호가 있다. 일명 진지(眞池)라 불리기도 한다. 이 호수 바로 오른편에는 지표에서 약 400m 높이가 되는 직벽의 서산(西山)이 있어 근처의 풍치가 매우 아름답다. 서산에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타고 산위에 올랐다가 절벽을 타고 내려오면서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길이 마련되어 있다. 산길 중간쯤 내려온 곳에서 부터는 암벽을 뚫어 통로를 내고 용문(龍門)을 세워 두었으며 그 옆에는 도교 신들을 모신 배단(拜壇)을 마련해 두고 있다. 용문을 통과하면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처럼 행운이 따른다는 전설이 있다. 이 용문석굴 통로는 청나라 건륭(乾隆)황제 시대에 오래청(吳來淸)이라는 도사가 1781년부터 파기 시작하여 무려 72년이 걸려 1853년에 완성된 것이라 한다.

   시내 방향으로 나오는 길가에 화정선사(華亭禪寺)라는 선종(禪宗) 사찰이 하나 있다. 잠시 쉬어 갈 겸 우리 일행은 이 사찰에 들렸다. 절 안마당에는 큰 연못이 만들어져 있고 법당 입구에 해불양파(海不揚波)라 쓴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다. 곤명호의 물결이 잦아들듯이 내 마음속의 파도를 잠재워야 부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다는 뜻인가?

 

                                                                                   서산 용문

 

 

석림(石林)

 

   곤명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석림(石林)이다. 석림은 곤명에서 남동으로 약 100km 떨어진 교외에 있는데 버스로 한 시간 조금 넘게 소요되는 거리이다. 요즘은 왕복 6차선 곤석(昆石)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전보다 가기가 아주 쉬워졌다. 행정적으로는 로남이족자치현(路南?族自治縣)이다. 석림은 광대한 지역에 솟아 있는 석주군(石柱群)을 말한다. 석림풍경구(石林風景區)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약 3억년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바다 밑이었는데 지각변동으로 육지가 되면서 석회암이 지상에 노출되어 오랜 세월 빗물에 씻기고 깎여 내려서 많은 석주들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한다. 뾰족뾰족한 석주들이 마치 수풀을 이루듯 밀집되어 솟아 있다. 석주들은 작은 것은 5m 전후의 높이이고 큰 것들은 10-20m 씩이나 된다. 멀리서 보면 마치 칼끝이 하늘을 향해 총총히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일명 검산(劍山)이라고도 부른다. 이 지방의 석림은 세계에서도 오직 여기 밖에 없는 유일한 풍경이라 한다.

   풍경구 안에는 50 여 곳의 석림지대가 흩어져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곳은 석림호(石林湖) 부근의 소석림(小石林)과 대석림(大石林)지역이다. 이 지역만 해도 그 면적이 12 평방 킬로나 된다. 일반 관광객이 들리는 곳은 이곳이며 소석림 주차장 근처에는 공원과 식당가 매점들이 잘 정비되어 있다.

 

                                                    

 

 

 

 

 

 

 

금전(金殿)

 

    곤명시 동쪽으로 1999년 세계원예박람회가 열렸던 곳을 지나 조금 더 나가면 명봉산(鳴鳳山) 언덕 위에 금전이라는 도교 사원이 있다. 이것은 동(銅)으로 지은 전각이며 그 안에는 진무대제(眞武大帝)라는 도교 신을 모시고 있다. 대리석 좌대위에 기둥 대들보 서가래 기와 대문짝과 안에 있는 신상까지 모두 동으로 만들었다. 금전 뒤쪽 종루에는 무게 14톤이나 된다는 커다란 동종(銅鐘)이 걸려 있다.

   청나라 때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가 청(淸)나라에 반기를 들지 아니 하겠다는 것을 조정에 보여 주기 위하여 무기 제작에 필수적인 합금소재인 동을 모아 이 금전을 짓고 동종을 주조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명나라 말기이후의 역사를 잠간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명나라가 역졸 출신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패하여 망하게 되자 이자성은 자금성을 차지하고 황제를 자처하였으나 산해관(山海關)에서 여진족을 견제하는 대군을 거느린 오삼계(吳三桂)를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오삼계는 누루하치의 열네번째 아들이며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르곤과 손을 잡고 스스로 관문을 열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청군과 함께 북경으로 진군, 이자성군을 쳐부수니 이것으로 여진족(淸)이 중국 전토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1644년) 청나라는 여진족의 자금성 진입을 결정적으로 도왔던 오삼계를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하여 멀리 떨어진 산악지방 운남성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나중에 결국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는 패망으로 이어졌다. 지금 곤명에서 볼 수  있는 오삼계의 치적(?)으로는 금전(金殿)과 함께 곤명호와 곤명시를 연결하는 수로(水路)를 하나 판 것이 남아 있다.

 

                                                                                 金殿

 

 

(2) 대리(大理, 따리)

 

   대리는 곤명에서 서쪽으로 비행기로 약 30분 가는 거리에 있는 고도이다. 최근에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자동차로도 약 서너시간 달리면 갈 수 있다고 한다. 대리빼족자치주(大理白族自治州)의 중심도시(州都)이다. 주변이 온통 산악으로 둘러 싸여 시내의 높이가 해발 2300m 정도가 된다. 비행기로 가드라도 산 위에 있는 공항 활주로가 짧아 날씨가 좋아야 착륙이 가능하고 흐리거나 안개가 끼면 곤명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과거에는 대리국(大理國)이라고 중국 변경에 위치해 있었던 빼족(白族) 중심의 소국이 있었던 곳이며 한장어(漢藏語)계통의 고유한 언어 고유한 복식(服飾) 고유한 축제 등 나름대로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 사람들도 기본적으로는 모계사회이며 흰 색을 가장 귀한 색으로 여기기 때문에 백족(白族)이라 불린다. 현재 대리백족자치주의 전체 인구는 약 45만이라고 하는데 그중 약 65% 이상이 빼족이라 한다. 이밖에도 한족(漢族)을 위시하여 이족(?族) 장족(藏族) 묘족(苗族 ) 회족(回族) 등 실로 다양한 민족들이 같이 살고 있다.

 

                                                   숭성사 삼탑

 

    대리는 자연 풍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4000m 급 이상 되는 연봉(連峰)들이 뻗어 있는 창산(蒼山)과 그 밑에 자리한 남북으로 길게 생긴 맑은 호수 이해(?海)가 어울어져 있는 풍경은 마치 그림과 같다. 창산은 늘 푸르다고 그렇게 불렸으며 이해는 사람의 귀 모양처럼 생겼다고 그런 이름을 얻었다. 이들 산과 호수 사이에 관광 명소 대리고성(大理古城)과 숭성사 삼탑(崇聖寺 三塔)이 위치하고 있다. 조용하고 아름다우며 때 묻지 아니하여 한번 가 볼만한 곳이다.

    대리시는 대리고성이 있는 지역과 이해 남쪽 끝에 자리 잡은 하관(下關)이라는 신시가지의 두 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대리고성이 있는 지역은 옛 시가지이며 그 가운데 구역은 정방형의 성곽으로 둘러 싸여져 있다. 고성 안에도 민가가 많이 있고 많은 선물가게들이 줄지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대리고성을 나와 북쪽으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세 개의 높은 불탑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창산을 배경으로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의 숭성사(崇聖寺) 삼탑(三塔)이다. 가까이 가 보면 옛 절은 살아져 보이지 않고 높은 탑들만 남아 있다. 가운데 있는 사각의 주탑 높이는 16층 약 69m에 이르는데 이 탑은 836년 남조국(南詔國) 시대에 건설된 것이라 한다. 일명 천심탑(千尋塔)이라 부른다. 층마다 부처님이 조각되어 있고 벽돌과 같은 것으로 지어져 있다. 무려 1200년 동안 풍우와 지진을 견디며 아직 건재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탑의 남 북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탑은 각기 10층에 높이 약 42m 로서 건설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주탑이 건축되고 얼마 뒤 대리국(大理國) 시대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세 탑의 남쪽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 연못에 비치는 세 탑의 그림자는 몹시 아름답다. 기념 촬영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최근 정보에 의하면 삼탑 위 창산쪽에 숭성사를 엄청난 규모로 복원해 두었다고 한다. 지나차게 화려하게 복원하여 오히려 고찰의 정취가 나지않는다고 한다. 곤명 - 대리간 고속도로와 함께 관광객 유치를 위한 사업일 것이다.

 

 

    창산(蒼山)은 이해(?海)를 따라 남북으로 42km 넘게 뻗어 있는 산맥이며 정상부분은 만년설이 덮여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열아홉 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으며 최고봉 마룡봉(馬龍峰)은 해발 4122m. 산 속에는 많은 계곡과 못이 있고 곰 표범 과 같은 야생동물도 있다고 한다. 산 밑에는 불교 사찰이 여러 개 있다. 창산은 또한 이곳에서 나는 여러 가지 대리석으로도 유명하다. 대리석이라는 이름 자체도 바로 대리에서 나는 돌이라는 뜻으로 동양 여러 나라에서 그렇게 불린 것이다. 창산에는 관광객을 위한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다. 이해는 매우 큰 호수로서 중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호수라 한다. 물이 맑기로 유명하고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면 경치가 말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대리 관광의 재미는 역시 산과 호수 등 빼어난 자연을 즐기면서 빼족 문화와 접해보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백족의 전통무용을 관람하고 그들이 손님을 맞을 때 내어 놓는 삼도차(三道茶)를 마시며 빼족 요리를 시식해보고 또 시간 여유가 있으면 멀지 않은 시골의 빼족 마을을 찾아 그들의 생활상을 보는 것은 가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길가에는 홀치기한 천에 하늘색 물을 드린 옷가지나 모자를 팔고 있는 부녀자들이 많으며 한 두 점 기념으로 사지 않고 그저 지나갈 수 없다.

 

 

 

 

                                              백족 아가시들     

                                        

 

(3) 여강(麗江, 리쟝)

 

    여강은 운남성 서북쪽에 살고 있는 여러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나시족(納西族)이 건설한 작은 고성(古城)이다. 행정 구역으로는 여강나시족자치주(麗江納西族自治州)의 중심도시이다. 옛날부터 중국에서 인도 미얀마 태국 티벳트 방면으로 가는 교통과 교역의 요충이었다. 이 나시족자치주 서쪽에는 금사강(金沙江)이 흐르고 그 건너편은 티벳트족이 주류를 이루는 디칭(迪慶)장족(藏族)자치주이다. 한편 남쪽으로는 대리(大理)빼족(白族)자치주와 접해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초웅(楚雄) 이족(?族)자치주가 이웃해 있다.

    멀리 옥용설산(玉龍雪山)의 눈 덮인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근처에 금사강(金沙江) 란창강(瀾滄江)이 흐르는 여강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운 고도이다. 여강(麗江)이라는

명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금사강의 아름다운 경관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강고성(麗江故城)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3세기 송대(宋代) 말기에서 원대(元代) 초기 사이라고 한다. 그 때의 도시형태가 그동안 크게 변하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명나라 때 또는 청나라 때의 건축물로 보인다.

    이 고성은 건물과 도로 그리고 도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수로(水路) 등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독특하다. 이리하여 여강 고성과 나시족의 고유한 문화(문자 음악)를 유지하기 위하여 UNESCO는 이를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 다만 최근에 와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불어나면서 고성 남쪽에 신시가지가 새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 새로운 변화라고나 할까.

    도시 모양이 큰 벼루와 같다고 해서 대연(大硏)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명나라 때 여행가 서하객(徐霞客)은 여강 지역을 다녀와서 대연진(大硏鎭)에는 1000여 호의 기와집이 고성을 꽉 메우고 있었으며 부족의 수장 목(木)씨는 왕궁과 같이 크고 화려한 궁궐에서 거처하였다고 기록한 일이 있다.

    여강 고성에는 성벽이 없다. 목씨의 목(木)자를 성벽으로 둘러싸면 곤(困)자가 되어 어려움을 나타내는 꼴이 되기 때문에 성벽을 쌓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는 나라 국(國) 자도 원래는 나라가 아니라 왕궁이 있는 수도를 의미했던 것이다. 즉 국(國)자를 풀어보면 안쪽에 왕궁(口)이 있는 도성을 밖에 성벽(?)으로 쌓고 그 속에서 병사들이 무기(戈)를 들고 호위하고 있는 모양이다. 왕궁이 있는 도성이 곧 나라이었던 것이다.

    목부(木府)에 들어가면 옛날 전각들을 모두 복원해 두었는데 과거에 독립된 나라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곳에는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왕이 직접 멀리서나마 살펴보는 높은 다리를 마련 해 두고 있다. 그 다리 밑에는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이 있다.

 

    여강 상단

 

여강은 변경 무역의 중심지로서 이곳 사람들은 일직부터 말에 짐을 싣고 국경을 넘나드는 상단(商團)에 종사하여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것이 확실하다. 오래된 가옥들도 모두 기와집으로 제대로 건축했으며 도로 광장 수로를 모두 네모지게 잘 다듬은 화강암 석재로 깔아 현대 도시보다 더 견고하게 설계했던 것만 보아도 그들의 경제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강 지역의 나시족(納西族)은 약 3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모계사회라고 하는 이들은 고유한 언어와 고유한 상형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심지어는 고유한 음악으로 기쁨과 슬픔을 표현했고 동파교(東巴敎)라는 종교의식도 따로 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일괄하여 동파문화(東巴文化)라 한다. 대외교역을 주로 해 왔던 개방된 국제도시에서 자기네 고유문화를 그대로 지켜왔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여강 거리와 수로 

 

    더욱 유명한 것은 여강 시내를 흐르는 수로(水路)이다. 흑룡담(黑龍潭)이라는 작은 호수에서 발원한 한줄기의 수로가 시내에 들어 와서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동천 중천 서천이라 부른다. 이들 세 갈래가 다시 아홉 갈래로 나누어지며 이들은 또 골목마다 집집마다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많은 작은 물길로 갈라져 시가지를 흐르고 있다.

동네 집 앞에 와서는 세 개의 우물(三眼井)을 형성하는데 하나는 식수용이고 다음 것은 야채와 같은 식품을 씻기 위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옷가지 등 세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길가를 흐르는 동천 중천 등 큰 물줄기에는 아취형의 돌다리나 나무다리가 군데군데 걸려있는 모습이 아주 낭만적이며 멋이 있다. 이러한 물가에는 음식점이나 음료수를 마시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동네 광장을 씻어내기 위하여 가끔씩 위에서 큰 물줄기를 막았다가 시내로 넘쳐흐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때는 동네 부인들이 나와 빗자루로 광장과 골목길을 쓸면서 청소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리쟝 나시족  의상

                                     

옥룡설산(玉龍雪山)

 

    여강은 청장고원(靑藏高原) 바로 밑이라 지대가 매우 높다. 고성이 있는 곳이 해발 2,400m 나 된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약 20 km 떨어진 곳에 옥룡설산 (玉龍雪山, 해발 5,596m)이라는 높은 산이 있다. 이 산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13개의 설봉이 있으며 골자기에는 큰 빙하가 흐른다. 산넘어 깊은 골자기에는 금사강(金沙江)이 흐르고 그 건너에는 합파설산(哈巴雪山, 5,396 m)이 솟아 있다. 산세가 마치 흰 용이 비천하는 형상이라 하여 옥룡설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단체로 이 산을 오르기 위하여 이 산을 찾는다고 하는데 우리일행이 갔을 때만해도 등산은 생각도 못하였다. 정상 등반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금지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산소 주머니를 하나씩 메고 cable car를 타고 산 중턱 해발 4,500m지점까지 올라가기만 했다. 때마침 비가 내려 주변 경관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샤모니 몽브랑에 설치된 cable car 도 최고 3,800m 지점까지만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아마 옥룡설산의 cable car 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점까지 오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 샹그리라(香格里拉)

 

    1933년 영국의 작가 James Hilton 이 펴낸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지상 낙원이라 했던 ‘샹그리라’(Shangri-La)는 눈 덮인 고산, 깊은 계곡, 넓은 초원, 맑은 호수와 신비스런 사원이 있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순박하고 싸움을 모르며 지극히 평화로운 고을로 그리고 있다.

    수년전 중국에서는 이러한 조건들과 자연 경관을 가춘 고을을 찾다가 드디어 운남성 디칭장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에 낙점을 하고 주도(州都) 중전(中甸)지방을 샹그리라현(香格里拉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요 공항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광지로 대대적인 선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낙점을 하게 된 배경에는 과거 서양 사람들이 디칭지방에 와서 여러 가지 풍속을 조사하고 가서 남긴 기록들과 유럽인이 남기고 간 카메라 외국 전도사에게 발행했던 중국정부의 여행증명서 등 물증들도 한 몫을 하게 된다. 관광 붐을 일으켜 오지인들의 운명을 좀 바꾸어 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일 것이다.

 

동죽림사 

    이리하여 늘 중국여행을 같이 다니던 우리 일행도 2004년 6월 천하의 오지 중 오지라 할 수 있는 샹그리라를 향하여 여행을 떠났다. 구채구(九寨溝)도 함께 들릴 예정이다.

샹그리라는 곤명에서 서북쪽을 향하여 비행기로 약 한 시간 가는 거리에 있으며 그 위치는 운남성 최 서북단으로 여강(麗江) 북쪽 금사강(金沙江) 건너편이다. 서쪽으로는 미얀마와 동쪽으로는 사천성과 그리고 북쪽으로는 티벳트와 접해 있는 곳이다. 도착해 보니 고급 호텔도 이미 몇이나 지어져 있었으며 외지 손님을 맞을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중전(中甸) 시가지는 인구 5 -6만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도시로서 주민의 약 7할이 티벳트족(藏族)이라 한다. 아직 개혁 개방의 물결이 체 미치지 못한 곳으로 보인다. 이웃에 있는 여강 처럼 외지로부터 관광객이 많이 와 주기를 고대하는 눈치이다.

    과연 디칭 지방에는 해발 5000m 급의 높은 산들이 눈으로 덮여 있고 계곡에는 항시 맑은 물이 흐르는 선경과 같은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약 100km 가량 더 들어가는 덕흠(德欽)지역에는 심산 유곡이 더욱 절경이라 한다. 이 근처에는 장강의 상류인 금사강, 메콩강의 상류인 란창강, 미얀마로 흐르는 이로와티강 등 세 개의 강이 병행해서 서로 가까이 흐르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산과 산 사이에는 넓은 초원과 호수가 있어 그림 같이 아름답고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곳이다. 현대 문명에 전혀 오염되지 아니하였으며 사람과 가축이 자연과 함께 어울어져 살아가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납박해 대초원

 

    우리 일행들이 가본 대초원의 이름은 납박해(納拍海)라 하였다. 소 말 돼지 양들의 무리가 방목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바다 해(海)자가 들어가면 보통 큰 호수를 일컫는데 끝도 잘 보이지 아니하는 대초원을 어찌하여 호수라 하는가. 그러나 설산의 눈이 녹고 비가 오는 여름철에는 이 넓은 초원에 물이 차서 큰 호수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가을을 거처 겨울이나 봄에는 다시 대초원으로 바뀐다. 이 이외에도 이와 같은 호수가 두 곳이 더 있단다.

    초원 근처에 있는 장족 마을에 들려 보았다. 그들의 주택은 목조의 삼층 건물로서 실 평수로 대략 40 -50평은 될 것만 같았다. 일층에서는 가축을 키우고 이층은 침실과 거실로 쓰며 삼층은 곡식이나 물건을 쌓아 두는 창고로 쓰고 있었다. 방에는 컬러 TV가 있었다. 기이한 현상으로는 돼지나 양과 같은 가축들이 방목을 하여도 저녁 무렵에는 한 마리도 빠짐없이 스스로 자기네 집으로 귀가 한다는 것이다. 아마 가축들 사회에도 리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둑이 있을 수 없으며 가축을 두고 이웃과 다투는 일도 없다고 한다. 지상 낙원임에 틀림없다.

 

                                                       송찬림사 

 

송찬림사(松贊林寺)

 

    송찬림사(松贊林寺,쑹짠린스)라고 하는 티베트 불교 사원을 가 보았다. 규모가 꾀 큰 절이었다. 티베트 라사에 있는 포탈라사원을 모방하여 건축한 것으로 보였다. 이 절에는 활불(活佛)이 세 사람 있는데 그 중 우두머리 활불은 이 지방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라마승이다. 전에는 신도들의 신앙심이 대단했었단다. 여기서 그들의 멕카인 라사 포탈라사원까지는 적어도 1800km 이상 떨어져 있으나 그 곳까지 오체투지(五?投地)로 가겠다는 순례자들이 다투어 나왔다고 한다. 몇 년이나 걸리면서 가는 도중에 병이나 기아로 또는 팔 굽과 무릎이 상해서 죽는 자가 대부분이며 라사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자는 아주 드문 데도 불구하고 순례자들은 라사를 향하여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상도 많이 변했고 장족(藏族)들의 신앙심도 바뀌었다고 한다. 중국의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기서 나갈 때는 여강을 통해서 곤명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여강까지는 약 200km가 넘는 길이라지만 우리는 버스로 가기로 하였다. 도중에 호도협(虎渡峽)이라는 금사강 상류의 대협곡을 보기 위해서이다.

 

                                            관음보살봉   

 

 

 장족 가정집

 

예복입은 장족여인 

    

호도협(虎跳峽)

 

   옥용설산 바로 뒤편에는 옥용설산(해발 5,596m)과 합파설산(哈巴雪山, 해발 5,396m)의 사이를 흐르는 호도협이라는 깊은 협곡이 있다. 청해성에서 발원한 금사강이 양쪽에 5,000m 이상 되는 높은 산들을 끼고 대협곡 사이를 구비치며 흐르는 곳이다. 묘하게 협곡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어 호랑이가 합파산에서 뛰어내려 이 바위를 밟고 옥용산으로 뛰어 올랐다는 전설로 호도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협곡 밑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버스 주차장에서 약 500m 가량 절벽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물가에서 보니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으며 물소리도 매우 요란하였다. 양자강상류 금사강 제일의 장관이라 생각된다.

 

                                                  호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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