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큰일을 이루리라.
그분께서 우리 원수들을 짓밟으시리라
(시편60,14).
시인의 공동체는 다시 한번 폭력의 은유를 사용하여 신뢰와 확신을 고백하며 시를 끝맺는다.그들이 하느님을 통해‘큰일을 이룬다’는 것은 원수들의 힘을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실제로 원수들을 물리치고 짓밟을 분은 하느님이심을(44,6참조)확신한다.비록 우리가 어떤 활동들을 삼위일체의 한 위격에만 돌리더라도 경건한 이들이 선한 일(큰일)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루스페의 풀겐티우스).
시편 60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60편은 하느님 백성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한다.그들은 하느님께 버림받고 전쟁에서 참패한 것을 애통해하면서도 하느님이 반드시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또한 하느님께 버림받는 느낌 속에서도 자신들을 하느님의 사랑받는자들로 자처한다.이것은 하느님 백성이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특별한 방식이다.그들의 믿음은,계약의 하느님이 잠시 고통을 허락했지만 반드시 자신들을 구해주시리라는 희망에 기초한다.그들은 처참한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이 자신들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을 믿으며 확신한다.그래서 원수들이 위협하는 상황에서도“사람의 구원은 헛됩니다”(13절)라고 고백하며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었다.이 시편은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은 반드시 회복시켜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23-2 시편 42-89편/바오로딸)
Ⅵ.미약한 반응
53.이러한 상황은 누이인 지구가 세상의 모든 버려진 이들과 더불어 부르짖으며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볼 것을 호소하게 합니다.우리가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의 집을 아프게 하고 잘못 다룬 것처럼 그렇게 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도구라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그래서 지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바라신 그대로 존재하고 평화와 아름다움과 충만함을 위한 당신의 계획에 맞갖은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위기에 맞서는 문화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후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모든 이를 고려하여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지도력이 부족합니다.한계를 분명히 정하고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는 법적 틀을 반드시 수립해야 합니다.그러지 않으면 기술-경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힘의 구조가 우리의 정치는 물론 자유와 정의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54. 국제 정치의 반응이 얼마나 미약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환경에 관한 세계 정상 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기술과 금융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너무나 많은 특정 이익 단체들이 있고,경제적 이익 단체들은 손쉽게 공동선을 장악하고 그들의 계획에 영향이 없도록 정보를 조작하기에 이릅니다.‘아파레시다 문헌’은 “생명의 원천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경제집단의 이익이 천연자원을 다루는 일에서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경제와 기술의 동맹은 그 즉각적 이익과 무관한 모든 것을 결국 배제시켜 버립니다.그래서 여기에서는 기껏해야 피상적인 말,어쩌다 하는 자선 행위,마지못해 보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반면에,사회 안에 있는 단체들이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기울이는 참다운 노력은 낭만적인 환상에 근거한 골칫거리나 회피해야 할 걸림돌로 여겨집니다.
55.일부 국가들은 점진적으로 중요한 진전을 이루고 더욱 효과적인 규제를 개발하여 부패와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사람들이 생태계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나쁜 소비 습관은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러한 습관은 사라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간단한 예로 냉방기 사용의 증가와 그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판매를 통하여 즉각적 이익을 얻는 시장은 더 많은 수요를 자극합니다.지구 밖에서 이 세상을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때로는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행동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56. 그러는 사이에 경제 세력들은 투기와 경제적 수익 추구를 앞세우는 현재의 세계 체제를 계속 정당화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체제는 인간 존엄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여기에서 환경 파괴와 인간적 윤리적 타락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방해 공작으로 세계가 실제로 얼마나 유한하고 덧없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그 결과로,“절대규칙이 되어 버린,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57. 어떤 자원이 고갈된다면,고귀한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결국 새로운 전쟁의 상황이 조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전쟁은 언제나 환경과 풍부한 민족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누군가 핵무기와 생물학적 무기 사용을 고려한다면 그 위험은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화학전,세균전,생물전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에도 자연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공격 무기의 개발을 위한 실험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정치는 새로운 갈등을 예견하고 그러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에 커다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그러나 강력한 경제 세력들은 이러한 노력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고,정치적인 계획에는 넓은 시각이 부족합니다.이러한 상황에서는,시급하고 반드시 실행할 필요가 있는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한 정치인으로 기억될 뿐일 터인데 그 누가 권력을 잡으려 하겠습니까?
58, 일부 국가들에서는 환경 개선에 대한 긍정적 모범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수십 년 동안 오염되었던 강을 정화하고 원시림을 복구하였습니다.환경 개선 계획으로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졌습니다.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우고 오염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 생산과 대중교통 개선에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이러한 조치들로 세계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모든 이가 여전히 긍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우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에,우리의 모든 한계에도 관대함과 연대와 배려에서 나오는 행동이 샘솟을 수밖에 없습니다.
59. 또한 자기만족과 경박한 무책임을 부추기는 거짓되거나 피상적인 생태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담대한 결단이 요구되는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종종 그러하듯이,우리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유혹에 빠집니다.겉으로 보기에는 오염과 훼손에 관한 몇 가지 피상적 표징을 제외하고는 상황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고 지구도 한동안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처럼 보입니다.이러한 회피적 태도는 우리가 현재의 생활 양식과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이는 악행들을 알아채고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중요한 결정을 뒤로 미루고,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악행들을 조장하는 길입니다.
Ⅶ.다양한 의견
60. 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상황과 가능한 해결책과 관련하여 다양한 시각과 사조가 전개되었음을 인정합니다.한 극단에서는 발전이라는 신화를 맹목적으로 믿으며,생태 문제는 윤리적 성찰이나 커다란 변화 없이도 단순히 새로운 기술의 적용으로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또 다른 극단에서는 인간과 그 개입이 위험이 될 뿐이라서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하므로 지구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줄이고 모든 개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현실성 있는 미래 계획은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에서 중용을 취한 것이어야 합니다.해결 방법이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여기에는 모두 포괄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여러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61. 많은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하여 교회가 단정적인 견해를 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교회는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이견들을 존중하면서 솔직한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동의 집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이 필요합니다.희망은 우리에게 언제나 헤쳐 나갈 길이 있고,길을 바꿀 수 있으며,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그렇지만 우리는 급속한 변화와 훼손으로 상황이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증상들은 대규모의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심지어 경제 위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세계의 문제는 개별적으로 분석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엄청난 위험에 놓인 지역이 있으며,종말론적인 예언은 차지하고라도 현재 세계 체제는 여러 관점에서 봤을 때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우리가 인간 활동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만약 우리가 우리 지구의 여러 지역들을 살펴본다면,우리는 바로 인류가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이 땅에서 처음 세워진 천주교회들은 ‘복수의 하느님’이 무도한 세속 권력에 희생된 ‘하느님의 성도’들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미래를 예비해주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가시적 증거물이었다.명동 성당은 십자가에 달린 뽀족탑을 경복궁 정문,광화문을 향해 세웠다.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쇠뇌로 경복궁을 겨누는 형국이다.아마도 구약시대의 하느님이었다면‘그의 종들이 폭군의 처소를 향해 쇠뇌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무척 흡족해하셨을 것’이다.
명동 성당이 건립된 지 110년이 넘었다.한국에서는 또 한분의 추기경이 나왔고 천주교회보다 훨씬 많은 개신 교회가 세워졌다.이제 밤에 남산타워에 올라가 서울 도심부를 내려다보면 어느 방향에서나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는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찾을 수 있다.하느님의 복수는 멋지게 성공했다.명동 성당이 경복궁을 겨눈 쇠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시에도 적었고 지금은 더더욱 없다.아마도 경복궁에 살던 고종과 수시로 궁이 드나들던 대관들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일았을 게다.그들이 명동 성당 건축에 그토록 자주 불쾌감을 표시하고 항의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그러나 어쨌든 명동 성당은 그 자리에 그 모양으로 섰고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오랫동안 왕궁을 능가하는 랜드마크 구실을 했다.
높은 언덕 위에 높이 솟은 건물은 한편으로 동양의 세속 전제 권력에 대해 서양의 신성 권력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서구적 공간관이 ‘복수의 하느님’을 매개로 한국적 공간관을 패퇴시키고 서울을 점령한 셈이다.더불어 이는 1,000년 넘게 지속되어온 이 당 사람들의 공간관에 결정적 파열구를 내었다.”
(서울은 깊다,156-157쪽,전용우 著)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머문 자리마다
꽃망울이 터지고
당신의 손길이 머문 자리마다
이파리가 돋아납니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김남권)
늘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