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유병덕
수필가(2019 수필과비평), 수필울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동인
수필집 <명함, 버렸습니다>, 한시 번역 <존재 유진하선생 유고시집>
전화다.
“회장님 회의가 있습니다.”
뜬금없이 회장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처음 보는 번호라 보이스 피싱인 듯하여 뚝 끊었다. 요즘 선거철이라 몸과 마음이 바쁘다. 지인의 출판기념회에 다녀와서 미루어 놓았던 글을 쓰던 중이다. 글 나부랭이를 쓴답시고 출마하는 이들이, 더러 글을 써달라고 하여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날이 잦다.
또 전화가 걸려 왔다. 귀에 익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첫마디가 바쁜데 미안하다며 조금 전에 전화한 이가 후원회 회계 책임자라고 소개다. 문득 일전에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조용히 살고 싶어 정중하게 사양했는데…. 그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참신한 인물이 없다며 재차 부탁이다. 어렵사리 후원회를 꾸렸는데 이끌어 갈 대표가 없다고 간곡하게 청하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후원회장을 맡았다. 회의 시간이 다가와서 서둘러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큰길에 들어서자 중고차 시장을 방불케 한다. 길옆 둔치에 차를 세워두고 부지런히 걸었다. 천변을 따라 걷다 보니 저녁노을에 비친 윤슬이 금빛처럼 반짝거린다. 물결 위 스미는 빛 사이로 학생들이 보인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오는 모양이다. 마치 군에서 행군하는 모습처럼 길게 늘어서 징검다리를 건너온다. 외길이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순간, 돌을 몇 개만 더 놓았더라면 서로 편하게 건널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인지 사람들이 넘쳐난다. 회의실 입구에 앉아 있던 그는 시간 내주어 고맙다며 정월 초하루처럼 반긴다. 회계와 감사를 맡은 이를 인사시키더니 참석한 이들에게 후원회장이라고 소개다. 초면이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 하자, 지역에서 민간단체장을 맡거나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들이라고 귀띔이다. 그리고 작가, 연설자, 초중등 교장 출신도 있다고 덧붙인다.
단상에 서자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서다. 창밖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가로등 불빛을 삼킨다. 그 불빛 사이로 조금 전 건너온 징검다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후원회가 후보자와 시민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면 좋을 듯하였다.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후보자와 시민을 잇고, 간격을 메워주는 존재. 누군가 중심을 잃고 헛발을 내딛지 않도록 손잡아주면 어떻겠냐고 묻자 고개를 끄떡인다.
“그럼, 징검다리 얘기를 해 보실까요.”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본다. 후보자의 인지도나 조직력 그리고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시민의 생각이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듯 시의 주인은 시민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뜻을 정확히 알고 후보자는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고 하니 이런저런 얘기가 쏟아졌다.
가만히 들어보니 교육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학교장들의 의견이 마음에 닿았다. 시민의 눈높이에 맞게 후보자의 공약을 가다듬자는 거다. 글귀를 놓고 다듬느라 난상 토론이 이어졌다. 한 사람 의견에 다른 이의 의견을 보태고 또 더하니 윤곽이 잡힌다. 앞표지는 후보자 사진 곁에 ‘교육의 나침판’이라고 정하고 그 아래, ‘균형, 안정, 변화’라는 지향하는 가치를 담았다, 뒤표지는 아이처럼 예쁜 새싹 사진 아래‘학부모는 안심, 선생님은 존경, 학생은 행복’이라는 글귀를 넣어 수혜자와 마음을 나누어 보자고 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다음날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기 위하여 회계 책임자가 찾아왔다. 그가 가져온 서류를 꼼꼼히 작성하고 서명하여 보냈다. 그런데 선관위 직원이 서명이 아니라 날인을 해야 한다며 연락이다. 번거롭게 일 처리 한다고 두런거리며 다녀왔다. 이어 회계를 보는 이가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을 하고 은행에서 후원회장 명의 법인 통장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능시험 보는 학생처럼 낯선 곳에 찾아가서 빈칸을 메우느라 끙끙거렸다.
돌아보면 정치는 사실의 영역이 아닌 인식의 영역이다. 같은 얼굴을 놓고 개인 역량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보자는 뜻을 이루려면 능력보다 보이지 않는 풍향이나 풍속을 잘 맞추어야 하리라. 후원회장은 물가에 놓인 허접한 작은 돌처럼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저 후보자와 시민 사이를 이어주는 단단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지 싶다.
이따금 통장으로 후원의 손길이 전해진다. 조용히 앉아 회계장부를 톺아 본다. 수백만 원도 있지만, 단돈 십만 원이라도 의미가 크다. 이 숫자는 단순한 금액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 되는 작은 참여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도와준 이의 성의에 한결같이 고마움을 표한다. 작은 정성이 모여서 후보자의 꿈을 지탱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묵직하게 한다. 동시에 잘못된 기록 하나가 법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이 나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얕은 잠결에 꿈과 현실 사이를 떠돌다 깨어났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부드럽게 다가온다. 문을 여니 잎샘추위가 여전하다. 가벼운 목도리를 두르고 후원회 사무실로 향한다.
- 한국문학시대 2026-6 여름 제85호.
첫댓글 수필 <징검다리>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