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은 도라지 꽃밭 위에 없다
외갓집은 지금
부흥수퍼 전망부동산 위 3층에 있다
북두칠성 아래 감나무와 수국나무 사이
우물도 없다
그 자리엔 흑장미비디오가 있다
외삼촌은 빚더미 위에 있고
장턱거리 밭은 가압류 중이고
구불거렸던 길은 곧게 펴졌다
외갓집은 지금 서기 2000년이고
부엌엔 김치냉장고와 정수기가 있고
엿 밥풀강정 술찌게미 따위는 없다
잔칫집에서 술 취해 돌아오다
얼어죽었다는 애꾸 김석출
때문에 무서워 외면하고 건너뛰던
도랑은 사라졌다
아라비아식 지붕을 모자처럼 올려놓은
모텔이 서 있다
방앗간은 연성공업사가 되었고
간판엔 이렇게 써 있다
각종 플라스틱 통
저주소 물탱크 함지박 빨간 다라이 개집
(창비시선 210 최정례 시집 <붉은 밭>에서)
1.
지하실에 연탄을 다 쌓아 놓았다고 겨우살이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겨우 한 고개를 넘었을 뿐, 우리는 더 큰 고개를 곧 만나게 된다. 이번에 넘어갈 고개는 만만치 않다. 시간도 제법 걸릴 뿐만 아니라 어머님과 나, 둘이서만 넘을 수도 없는 고개다. 바로 '김장'이라고 불리는 고개이다.
겨우내 먹을 맛난 김치를 마련하기 위한 이 연례행사엔 어머님 못지 않게 할머님도 당당한 주역이셨고 때로는 이웃집 여인네들도 가세했다. 김장을 담그는 날은 여인네들의 새된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그네들이 한바탕 늘어놓는 수다가 김치와 함께 버무려지는 이 떠들썩한 잔치에 어머님께서는 종종 나를 초대하시곤 했다.
옆에서 김치속의 간을 맞추는데 필요한 각종 양념을 넣어주거나 어머님과 할머님의 흘러 내린 고무장갑을 다시 치켜 올려주는 일과 같은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었는데, 맨손이 요구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매번 고무장갑을 벗었다 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나의 역할은 그들에게 퍽이나 요긴한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옆에서 나는, 소금물에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었던 푸르딩딩한 배추가 고춧가루와 온갖 고명들을 버무린 새빨간 김치속과 만나 놀라울 정도로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모습을 황홀하게 지켜보곤 했다. 특히 샛노란 배추 고갱이에 묻혀진 김치속은 새빨간 고명이 더욱 도드라져 보여서 나는 자주 입맛을 다시곤 했다.
그러면 그걸 눈치 채시고는 어머님께서는 노란 배추 고갱이만 뚝 떼어서 내 입에 쏙 넣어 주시곤 했다. 아, 그 때의 그 맛이란……. 그러나 그 맛을 보는 대가로 나는 어머님의 신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어떠니, 간이 잘 맞았니? 너무 싱겁지는 않니?"
이 때 바로 대답을 해버리면, 막 담근 김치 맛을 보는 일은 그걸로 끝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명확하게 대답을 하지 않고 좀 우물거린다. 그러면 어머님께서는 다시 내 입에 배추 쪼가리를 넣어주시는데, 이번에는 배추의 노란 고갱이가 아니라 시퍼런 잎사귀 부분이다. 사실 간이 제대로 되었는지 맛보려면 이 부분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에, 내게는 다소 아쉽게 생각되어도 어머님의 선택은 정당한 것인 셈이다.
그제야 나는 "됐네요. 아주 딱이예요" 라고 말하며 물러난다. 아쉽지만 그쯤에서 내가 물러선 것은, 그날 저녁 밥상에 맛나게 고명을 한 겉절이 김치가 올라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금에 절인 배추와 새빨간 김치속의 만남이 다 끝나갈 무렵이면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2.
비록 김치를 담그는 양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기는 해도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고 나서부터는 아내와 함께 손수 김치를 담가 먹으니, 내게는 이러한 김장 담그기의 추억이 그렇게 그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빨간 다라이와 까만 김장독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름철에는 두 꼬마 동생들의 간이 수영장 역할을 하기도 했던 크고 둥근 다라이. 혼자서 들기에는 조금 버거웠던 빨간 고무 다라이. 단수예고가 있는 날이면 목욕탕과 부엌에 저수용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던 커다란 다라이.
그런데 크기가 조금씩 다른 그 빨간 다라이들은 김장을 담그는 날에는 수십 포기의 배추를 절이는 소금물통이 되고, 고춧가루와 갖은 고명을 버무려 김치속을 만드는 양념통이 되고, 또한 담근 김치들을 가지런히 받아내는 김치통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걸 지금은 볼 수가 없으니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와 함께 어머님과 함께 땀 뻘뻘 흘리며 마당 한 구석에 구덩이들을 파서 묻어 넣은, 얌전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윤기 흐르던 까만 김장독도 김장 담그기의 추억을 떠올릴 때, 늘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다. 어머님께서는 몸을 기울여 막 담근 배추김치를 차곡차곡 그 김장독 안에 재어 놓으셨고, 그 중의 하나에는 시원한 동치미를 담가 넣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김장독 주위에 볏짚을 두둑하게 깔고,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두껍고 빳빳한 비닐로 독의 아가리를 덮은 다음에 고무줄로 동여 맨 후에, 독의 뚜껑을 닫아놓으셨다. 이제 따스한 땅 속에 묻어 놓은 김장독 안에서 김치가 익어가는 일만 남았고, 그 일은 매년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마당이 있는 옛집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하지만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마당을 잃고 나서, 우리는 김장독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김장독만이 아니었다. 어머님께서는 김장독을 잃은 후로는 김장 담그는 일도 시들해졌는지 겨우 열 포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빨간 다라이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으로만 여겨져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 담근 김치를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레스 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나중에는 김치전용 냉장고인 딤채를 사서 보관했지만, 예전에 맛보았던 그 김장 김치 맛이 아니었다. 눈 내린 겨울날 아침 뚜껑에 수북히 쌓인 눈을 털어내고 김장독에서 막 꺼내 온 김치를 먹을 때, 이빨에 씹히던 얇게 낀 얼음의 촉감과 혀끝에 느껴지던 사이다처럼 찡한 김장 김치의 맛은 이제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김장을 담글 때 배추에 스미는 김치의 그 오묘한 맛은 재료가 아니라 용기(容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김장 김치의 맛은 갖은 양념과 젓갈이 아니라 바로 그 빨간 다라이와 땅 속에 파묻은 까만 김장독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나의 이 엉뚱한 생각은 분명 억측이리라. 하지만 우리가 빨간 다라이와 까만 김장독을 잃어버린 후 김장 김치의 참맛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운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있듯이, 우리가 잃어버린 김장 김치의 맛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빨간 다라이와 까만 김장독에 있다. '전통 김치의 맛'을 표방하며 공장에서 김치를 생산하고 있는 '종가집'이나 '농협'은 무슨 소리냐고 눈을 부라리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