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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으랴
모든 山脈(산맥)들이
바다를 戀慕(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곧을 犯(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光陰(광음)을
부지런한 季節(계절)이 픠여선 지고
큰 江(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白馬(백마)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曠野(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1904~1944)의 유고작인 ‘광야’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또 다른 유작 ‘꽃’과 함께 발표됐다. 원작의 감흥을 살리기 위해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꿔 발표 당시의 표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작품 아래에는 이육사의 친동생인 이원조가 “눈물을 뿌리며 썼다”는 짤막한 쓴 후기도 붙어 있다. 후기는 다음과 같다.
“家兄(가형)이 四十一歲(41세)를 一期(일기)로 北京獄舍(베이징 감옥)에서 永眠(영면)하니 이 두 編(편)의 詩(시)는 未發表(미발표)의 遺稿(유고)가 되고 말엇다. 이 詩의 工拙(공졸)은 내가 말할 바 아니고 내 혼자 남모르는 至寬極痛(지관극통: 寬은 寃의 오기로 보아 ‘지원극통’이라고 읽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편집자주)을 품을 따름이다. 一九四五年十一月十八(1945년11월18일) 舍弟(사제) 源朝放漏(원조방루) 謹記(근기)”
육사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광야’라는 제목 아래 ‘광음’ ‘매화’ ‘산맥’ ‘백마’ 등의 시어가 거친 움직임으로 덮쳐 온다. ‘초인’ 앞에서는 숨조차 멎을 듯하다. ‘초인’이라는 시어는 이제 육사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필자는 이 작품을 중학생 때 국어책에서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배웠다. 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지문으로 등장했다. 그때 내게 문학이란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청순한 아사꼬,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은 반짝이는 언어들일 뿐이었다. 이들 언어가 우리 민족의 정서가 한(恨)이라는, 거북하지만 당시로서는 반박할 수 없는 담론과 함께 풋내 나는 내 감성을 채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광야’는 그때까지 나로서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충격이었다.
‘광야’는 일단 묵직했다. 거칠지만 아름답고, 황량하지만 빛났다. 서부영화나 로마신화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던 백마가 우리 전설 속의 신묘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초인’은 고대의 동굴에서 미래의 하늘로 달려가는 환상으로 울려왔다. 하느님이나 신이라는 존재보다 훨씬 강렬한 현실적 존재로 내 인식의 빈 공간을 채우고는 날아가는 듯했다. 이런 느낌은 내 10대가 다 가도록 지속됐다. <광야>로 인해 나는 국어 교과서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 ‘광야’의 ‘초인’은 점차 거북한 것으로 변해갔다. ‘광야’와 ‘초인’과 육사는 그대로였지만, 내 인식이 변했던 것이다. 총을 들고 싸웠어도 모자랄 판에 글이나 끼적거리는 모습이 무기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지식인이랍시고 골방에서 지사(志士)라도 되는 양 소리도 나지 않는 글로 툴툴거리다 무기력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끌려다니면서 치욕스럽게 산 것 아닌가 하는 심사였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그 후 나는 우리 현대사를 적당하게 외면하면서 살았다. 돌아보면 어리석고 유치하기까지 한 인식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몇 년의 반항 뒤에는 그보다 훨씬 긴 일상이 세월을 덮었다.
‘초인’의 실제 주인공은 허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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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인의 말에 따르면, 초인의 실제 모델은 허형식이다. 허형식은 육사의 외당숙, 곧 어머니인 허길의 사촌동생이다. 1930년대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의 핵심 간부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인 독립투사와 중국공산당이 합작한 단체로, 항일 무력투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군의 잔혹한 토벌에 밀려 1940년 겨울 소련 땅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과 김책도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허형식은 이들과 달리 피신하지 않고 북만주에 남아 끝까지 저항하다. 1942년 8월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만주 최후의 파르티잔이라고 불렸다.
나는 지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출판계의 한 지인은 박도라는 작가가 쓴 <들꽃>이라는 실록소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신문 연재소설이어서 쉽게 검색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얼마 전인 2016년 11월 <허형식 장군>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가 쓴 <이육사 평전>(2010)도 읽어보았다.
그런데 고구마 줄기 같았다. 육사에 다가서니 김원봉이 등장했다. 육사는 김원봉이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었다. 허형식을 더듬다 보니 박정희도 등장했다. 허형식은 경북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났고, 박정희는 임은동에서 철길 건너인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1942년, 허형식이 북만주의 하얼빈(哈爾濱) 인근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게릴라전을 벌이며 사투를 하고 있을 때, 먼저 소련으로 피신했던 동북항일연군은 88여단으로 재편됐다. 1영장은 김일성이었고, 허형식은 3영장이었다. 그러나 허형식은 3영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전사했다.
자료를 찾아 나가다 보니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것을 비로소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불붙은 나의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여행은 정리하자면 ‘육사에서 허형식까지’와 다를 바 없었다.
베이징서 만난 이회영과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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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창후퉁으로 들어서서 100m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에 둥창후퉁 1호가 보인다. 1호는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근대사연구소와 세계역사연구소다.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곳이다. 경비가 정문을 지키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정문 경비실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경비원에게 말을 건넸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둥창후퉁 28호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위치를 아는지 물었다. 간결한 대답이 시원하게 돌아왔다. 후퉁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왼쪽에 28호가 있는데, 28호 안쪽 중앙 건물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도 한국인 수십 명이 단체로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28호에 다가서니 문머리에 ‘둥창후퉁 28호’라는 빨간 번호판이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28호는 건물 한 채가 아니었다. 2층 벽돌건물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단층과 이층의 벽돌집이 둘러싼 구조였다. 워낙 낡고 지저분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세히 둘러보니 일부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었다. 중앙 건물의 쇠락한 현관문에는 ‘28호 주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공지문이 붙어 있었다. 공중변소가 너무 비위생적이니 청결을 위해 한 달에 3위안(元)씩 걷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쓰레기와 버려진 물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화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보고 싶었지만 계단실 입구에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통행이 불가능했다.
이런 주택을 대잡원(大雜院)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재력 있는 사람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대잡원은 지금도 베이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독특한 주거형태다. 이런 대잡원이 베이징의 20세기 후반 50년을 견뎌온 서민주택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도시개발이 급속하게 추진돼 낡은 대잡원이 철거되고 고층빌딩이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육사가 순국한 곳은 아직 철거되지 않아 낡은 대잡원 모습 그대로였다. 몇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1층 내부를 돌아보았다. 주민이라도 보이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대부분은 이미 이주했고, 일부만 남아 있는 철거 대상이 아닐까 싶었다.
1년 후인 2016년 11월 다시 한번 둥창후퉁 28호를 찾아갔다. 혹시라도 철거됐으면 어떡하나 하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28호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낡고 지저분하고 쓰레기와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건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주민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가운데 2층 벽돌집은 일제의 감옥이었고, 대문 바로 안쪽에 있는 2층 건물이 사무실이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육사 이원록은 이곳에서 1944년 1월 16일 새벽 숨을 거뒀다. 아니 숨이 끊겼다. 고문치사였으니 말이다. <이육사 평전>을 쓴 김희곤 교수는 육사의 시신을 인수한 이병희의 증언과 이곳에서 심문을 당했던 베이징 현지인의 증언, 그 외의 각종 자료를 조사해 이곳에 일제의 감옥이 있었고 이곳에서 이육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옥사 아닌 고문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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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의 죽음 앞에서 발걸음이 더뎌졌다. 늦가을의 축축한 비를 허술한 우산으로 가리고 잡초 무성한 마당을 서성거렸다. 육사는 경성에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이곳 베이징까지 끌려와 죽었다. 육사가 이곳으로 잡혀온 상세한 이유는 아직 불분명한 듯했다. 체포영장도, 재판도 없었다.
육사의 죽음을 옥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육사의 죽음은 분명한 고문치사다. 육사가 시인이기만 했다면 고문치사를 당할 이유가 없다. 그의 시들은 생경하거나 유치한 정치적 선동 문구가 아니다. 작가는 작품을 이유로 고문을 당하지는 않는다. 조선인이 고문치사 당했던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이란 죄뿐이다. 일제가 육사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다그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육사의 행적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육사의 생전을 잠시 돌아보면 이렇다.
육사 이원록은 1904년 출생했다. 20세이던 1924년 1년 정도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 후 대구에서 사회활동을 했다. 1926년에는 베이징에 유학해 7개월 정도 중국대학(中国大学)에서 공부했다.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의거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0년 26세의 나이에 지면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이즈음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나 경찰서에 들락거리는 일들이 이어졌다.
1931년 육사는 3개월 동안 만주에 다녀왔다. 허은(육사의 외사촌)의 회고에 따르면 육사의 외삼촌인 허규가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하는 데 동행한 듯하다. 이 무렵 육사는 외당숙인 허형식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허형식은 1930년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5월 1일 노동절투쟁의 일환으로 조선인 청년 40여 명을 이끌고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을 맨손으로 습격하는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허형식은 북만주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해졌다. 그 이후 항일무장투쟁에서 상당한 전적을 쌓아가고 있었다.
육사는 1932년 베이징과 톈진(天津)을 거쳐 난징으로 갔다. 난징에서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학해 군대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귀국했다. 1933년 경성과 상하이(上海) 등지를 오가며 '레닌주의 철학의 임무' 등의 시평을 썼다. 1934년 난징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발각돼 국내에서 구속되었다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그 이후 1942년까지 건강이 나빠져 요양하는 일이 잦았다. 이 시기에 편집 일을 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사에서 문학으로 글쓰기의 영역을 넓혔다.
사회주의자 이육사
1) 왕산 허위는 의병장으로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이름이다. 서울 동대문 근처 신설동역오거리에서 청량리 밖 시조사삼거리까지 3.2㎞의 도로가 왕산로인데, 바로 이 ‘왕산’이 허위의 호다.
2) 허은은 육사의 외사촌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손자인 이대용의 부인이다. 그가 구술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는 독립투사 가족들의 실생활이 어떠했는지 실감나게 전해주는 귀한 내용을 담고 있다.
3) 허형식에 관한 연구로는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책임연구위원)이 잘 알려져 있다. 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박도 지음)이 최근 출간됐다.
4)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웅배(1928~1997)는 1951년 북한이 국비로 소련에 보낸 유학생이었다. 1958년 다른 유학생 7명과 함께 북한 국적을 버리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육사는 1943년 4월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와 강제 동원이란 엄중한 상황에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육사는 충칭(重慶)으로 가서 요인 한 명을 모시고 옌안으로 갔다 귀국할 때 무기를 반입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문학에서 무장독립운동으로 무게중심이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1943년 늦가을 모친과 맏형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 경성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고문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런 흐름을 보면 육사는 1931~33년과 1943년에 집중적으로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육사가 김원봉이 설립한 군사학교 1기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시인으로만 알았던 육사가 군사학교를 나왔을 뿐 아니라 사격술도 뛰어났다니…. 육사는 고뇌에 빠져있던 문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적의 심장을 향해 즉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준비된 투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평론이 문약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평론은 식민 치하의 암울한 사회를 매섭고 냉철하게 분석했다.
육사에게 1943년의 베이징행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당시의 엄혹한 환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모든 조선인에게 친일과 굴종을 넘어 황국의 신민이 되라고 몰아세우던 시기였다. 문단도 예외가 없었다. 저명한 문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태평양전쟁 지원을 선동했다. 지금 돌아보아도 가장 치욕스런 시기였다.
시인 주요한은 “천황폐하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지원병 참전을 독려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대동아전쟁은 10억 유색인종이 한 덩치가 되어 단란하게 살자는 것”이라며 일제의 파시스트 전쟁을 찬양했다. 시인 서정주는 ‘반도 학도 특별지원병에게’라는 헌시를 지어 바치고, ‘징병 적령기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빨리 아들을 지원병으로 내보내라고 외치던 시대였다. 시인 노천명도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라고 읊조리면서 사악한 미문(美文)으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떼밀었다.
육사는 이런 격랑에 쓸려가지 않고 오히려 항일투쟁의 최 전선인 중국 대륙 한복판으로 나섰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1943년 그의 베이징행은 시인이던 육사가 투사가 되어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행동이었다. 이육사는 베이징에서 충칭과 옌안을 오가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충칭에는 김구의 임시정부가 있었고, 옌안에는 김두봉의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전쟁을 확대할수록 패망이 가까워진다는 판단에 따라 독립운동의 좌우 합작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육사가 고문을 당해 죽음에 이르면서도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은 국내와 충칭과 옌안의 독립운동을 연계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이 아니었을까.
육사의 정치적 이념 역시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육사가 조선이나 중국의 공산당에 가입한 조직상의 당원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육사의 친동생 이원조는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조직해 초대 서기장을 지냈다. 그는 1947년 월북해 활동했고, 1953년 북한에서 박헌영 그룹이 김일성 일파에게 숙청당할 때 함께 투옥됐다. 원조와 원록은 특히 친밀한 형제였으니 육사 생전에도 특별한 연계가 있었을 것이다.
‘초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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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민당과 연계에 대해 당시의 젊은 세대는 대부분 비판적이었다. 무엇보다 장제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부패가 상당했다. 게다가 장제스가 일본제국주의 위협과 침략에 대해 적극적 항전이 아니라 소극적 타협으로 물러나고, 오히려 국내에서 공산당 때려잡기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장제스가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항일에 적극적이지 않으니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다.
육사가 1933년 국내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난징의 군사학교에 입교하기 전에 투고한 것으로, 육사가 난징에 있을 때 발표됐다. 난징으로 가기 전 육사는 이미 공산주의 철학과 정치이념에 상당히 심취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독립운동과 사상편력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경찰 기록과 만주의 항일역사 연구 성과에 접근하면서 구체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했다.
육사는 외가의 독립운동 내력을 상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육사의 외가는 의병장 허위와 허형(이육사의 외조부)은 물론 그 후손들 대부분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투신했다. 외삼촌 허규(1884~1957)도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왕산 허위의 의병투쟁에 형제들과 함께 가담했다 왜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광복단 사건으로 수사선상에 오르자 만주로 망명했다. 3·1운동 때도 6개월간 형을 살았다. 1928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했다 체포돼 또다시 5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동안 20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했다. 허은의 회고에 따르면 육사는 외삼촌 허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촌동생이지만 육사보다 5세 연하인 허형식이란 존재도 육사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육사는 숨이 끊길 때 허형식이 이미 2년 반 전에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가 ‘초인’이라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눌러쓸 때, 백마를 즐겨 탔다던 허형식은 살아 있었을까, 아니면 이미 전사한 다음이었을까?
독립운동사의 모호한 이념 구분
그의 시는 독립운동에 관한 공고한 다짐으로 읽힌다. ‘초인’은 허형식은 물론 허규 또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해방의 깃발 아니었을까? ‘광야’는 투쟁을 포기한 자의 한탄이 아니다. 투쟁에 지친 피로감이나 무력감에서 나온 미래로의 도피도 아니다. 실패와 도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해방이란 목표에 집중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육사의 ‘광야’에 대한 나의 젊어서의 소심한 외면은 베이징의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서 웅장한 영웅의 노래로 되살아났다. 그는 내게 초인으로 나타난 것이다.
육사가 순국하기 전 해에 이곳 둥창후퉁에서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또 하나의 고문치사로 인한 순국이 있었다. 바로 이원대(1911~1943, 건국훈장 독립장)다. 육사가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할 때 간부학교에 입교할 젊은 인재들을 찾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육사는 청년기에 다녔던 경북 영천의 백학학원 후배 이원대와 이진영(1907~1950 건국훈장 독립장)에게 정치학교 입교를 권했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상하이로 가는 우편선을 이용해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가서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특히 간부학교 졸업 후 중국 국민당 군대에 배속돼 지하활동을 하던 이원대는 일본군에 체포돼 둥창후퉁으로 압송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진영은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귀국 후 국방군 장교가 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화순에서 인민군과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비극이다. 이원대와 같이 지하활동을 하던 전우들은 훗날 옌안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핵심이 됐다. 화순에서 이진영과 전투를 벌였던 인민군은 적장이 옛 전우의 절친한 고향친구이자 혁명의 동지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일제의 강점과 남북분단이 이어지며 생겨난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한 단면이다. 이원대와 이진영의 후손들은 호형호제하면서 선친들의 독립운동사를 찾고 알리는 일에 애쓰고 있다.
둥창후퉁 28호를 뒤로 하고 귀국한 후 생각이 많아졌다. 육사는 당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기울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독립운동사를 다룬 지금까지의 저술들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세다. 이 민족주의는 무엇이고, 그 이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짧은 지식으로 곱씹어보면 ‘민족주의’는 체계를 갖춘 철학이나 사상 또는 정치적 이념의 집합체라기보다 ‘민족을 우선하는 태도’라고 두루뭉술하게 묘사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해 국권은 침탈당하고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에 빠졌다. 그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으로 우리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자연발생적으로, 그러나 뚜렷하게 세워졌다. 이런 태도와 지향과 관념 등을 한데 묶어 민족주의라는 말로 압축해야 온당할 것 같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민족주의는 대부분 종교적 배경이 강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천도교·대종교와 같이 태생이 우리 민족인 경우는 예외로 치자.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무관한 외래종교이고 교리상으로도 유일신 체계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다. 3·1운동에서 민족 대표를 자임한 사람들이 모두 종교계 지도자란 점도 주목하게 된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이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독립운동을 논하면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이분법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스스로를 어떻게 칭하느냐는 것도 중요하다는 면에서 민족주의 진영이란 말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슬쩍 가리는 용어라는 게 답사여행 1년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돈 생각이다.
이제 우리 독립운동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 어느 하나도 온전히 담지 못하고 민족주의라는 모호한 말로 묘사되곤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갈 차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누가 뭐래도 헌법상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국가 아닌가? 나는 다시 간단한 배낭을 꾸려 상하이로 향했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