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청계공(聽溪公)
휘 덕의(德毅, 1540~1613) 진사 곤(鯤)의 아들, 참봉 진현(晉賢)의 손자이다. 호는 청계(聽溪) 또는 동호(桐湖). 그는 선조(宣祖) 1573년(癸酉)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임란(倭亂)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임금을 알현하니 군신 모두가 놀랐다.
명(明)의 장수(將帥) 여응종(呂應鍾)은 공을 보고 "동국(東國)의 산(山)은 천관산(天冠山)이 있고, 사람은 위덕의(魏德毅)가 있어 보배롭다"고 했다. 왕은 별좌(別座)에 이어 형조좌랑과 영남(嶺南) 운향관(運餉官)을 제수하니 경상도 선산까지 임무를 마치고 귀향해 청금공, 반계공, 만회재 등을 가르쳤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으로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녹훈(錄勳)되고 사후에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추증(追贈)됐다. 졸 후 죽천사(竹川祠) 입사(立祠)와 함께 주벽(主壁)으로 배향되고, 또 광주광역시 대촌동 황산사(黃山祠)에도 배향됐다.
聽溪先生明將呂應鍾丁景達(牧使)金复巽別坐送唱聯句
△謾道才惟子建長 詩腸奈己作愁膓(呂)
△風稜震蕩南天外 危悃崢嶸北斗傍(丁)
△提釰未能埋猰㺄 揮戈空見縱豺狼(金)
△一樽難與消餘恨 更向東邊怒欲狂(魏)
해설 : 부질없이 재주가 자건보다 능하다고 하였는데 시 창자가 어찌하여 수심창자가 되었는고(呂叅軍). 모진 바람은 남천밖에 몹시 울어 흔들리는데 위곤은 북두 곁에 높고도 험하구나(丁牧使). 칼 차고도 알유를 묻지 못했는데 창 휘둘러 속절없이 시랑이만 놓아 보냈네(金別將). 한 동이 술로 남은 한을 녹이기가 어려운데 다시 동변을 향하니 노여움이 미칠 것 같네(聽溪).
6) 훈련부정공(訓練副正公)
공의 휘는 덕원(德元, 1549~1606, 21世, 叅奉 鱣의 子, 叅奉 晉秀의 孫子 지장록p.105, 1010)이다. 왜란(倭亂)이 발발하자 공은 권율(權慄)의 진영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훈련부정(訓練副正: 叅議)에 임명했으나 얼마 후 병사하니 원종이등훈(原從二等勳)에 록(錄)되었다.
7) 판서공(判書公)
공의 휘는 덕화(德和, 1551~1598) 진사 곤(鯤)의 아들, 참봉 진현(晉賢)의 손자이다. 선조(宣祖) 1583년(乙酉)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院)과 부(府)에서 근무했다. 9년 후 1592년 임란(壬亂)이 일어나 서울이 왜군(倭軍)에 의해 함락될 위기에 이르자 임금을 호종(扈從), 밤을 새워 송도(松都)에 이르렀다.
왕의 피난행렬은 마땅한 처소가 없어 민가에 머물렀으나 먹을 것이 없었다. 공이 촌부들에게 서숙 밥을 얻어다 임금에게 바치니 선조는 그 밥을 먹으며 팔진미(八珍味)⑬보다 맛있다고 했다. 송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이를 때 마침 장흥에서 3천리를 걸어서 올라온 중형 청계공(聽溪公)과 극적으로 해후(邂逅)했다.
공은 1593년(癸巳) 환도 후 참상(叅上)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궁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왜군의 괴수 고시니 유끼나가(小西行長) 등이 각 포구를 장악, 불안이 그치지 않자 왕에게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다. 왕은 공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언양현감(彦陽縣監)으로 제수하니 당일로 부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596년 군자훈련정(軍資訓練正)으로 근무할 때 이순신 장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그 후 1598년(戊戌) 신병으로 귀향해 요양하다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선조호종원종훈(宣祖扈從原從勳)과 아들 정철(廷喆)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을 더해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했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됐다.
⑬팔진미(八珍味) : 중국에서 성대한 밥상을 일컫는다. 즉 순모(淳母)․순오(淳敖)․포반(炮胖)․포돈(炮豚)․도진(擣珍)․오(敖)․궤(潰)․간료(肝膋) 등의 여덟 가지 반찬을 갖춘 진미의 밥상을 뜻한 것이다.
오늘도 세분 선조에 대해 배웁니다~~,
휼륭하신 문중조상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