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언해(杜詩諺解)》는 옛 중국시인 두보(杜甫)의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역(國譯)한 시집이며 국문학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원래의 제목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로 ‘공부’는 두보의 벼슬 이름이고 ‘분류’는 시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실었다는 뜻이다. 초간본의 간행목적은 세교(世敎)였으며 중간본은 초간본이 나온 150여년 뒤에 간행되었다. 초간본을 보기 힘들던 차에 당시 경상감사가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교정(校正)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준다. 두보의 시 164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52부로 분류하였다.
杜詩諺解(두시언해) - 이덕무/청장관전서61권
성화 17년(1481, 성종12) 성종이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유윤겸(柳允謙) 등에게 명하여, 널리 두시(杜詩)에 대한 모든 주해를 모아 구절마다 주소(註疏)를 간략하게 달고, 또한 언문으로 그 뜻을 풀이하게 하였는데, 모두 23권이었다. 수찬(修撰)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서문을 썼다.
숭정 5년(1632, 인조10) 천파(天坡) 오숙(吳䎘)이 영남감사로 있을 때 다시 찍었는데, 신풍군(新豐君)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서문을 썼다. 우리나라의 벽루(僻陋)한 말로써 두보(杜甫)의 심오(深奧)한 시를 풀이하였으니, 그 명물(名物)과 음운(音韻)이 서로 어긋나고 부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제 수백 년이 지나 그 방언(方言)의 변화 과정을 상고할 수 있게 하니, 이 또한 문헌상으로 하나의 보탬이 될 만하다.
重刻杜詩諺解序[두시언해 목각 중간본 서문] - 장유(張維)/계곡집6권
시는 마음속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주해(注解) 따위를 낼 필요가 있겠는가. 주해도 낼 일이 없는데, 더구나 방언(方言)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견식(見識)이 뛰어난 자의 입장에서 논한다면야 물론 이 말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을 경우 어찌 주해를 보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주해를 보아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번역물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이 바로 《두시언해(杜詩諺解)》가 시가(詩家)에 공이 있게 된 이유라고 하겠다.
시는 두소릉(杜少陵.杜甫)에 이르러 고금(古今)을 모두 통틀어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 것이다. 소재(素材) 선택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수가 없고 내포된 의미도 심오하기 그지없으며 어휘의 구사도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만 하다. 그러니 ‘흉중(胷中)에 국자감(國子監)이 들어 있지 않으면 두시(杜詩)를 볼 수가 없다.’는 옛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주해를 낸 사람들이 천가(千家)로 일컬어질 만큼 많다고는 하지만 정작 비밀스러운 뜻과 오묘한 말에 대해서는 드러내 밝혀 놓은 것이 적기 때문에 읽는 이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성화(成化) 연간에 이르러 성묘(成廟.성종)께서 옥당(玉堂)의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여러 주해들을 참고해 보고 이를 바로잡은 뒤 언어(諺語)로 그 뜻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구설(舊說) 중에 해석이 미진했던 대목들도 한 번 보기만 하면 이해되도록 하였는데, 이때 매계(梅溪) 조학사 위(曹學士偉)가 분부를 받들어 서문을 썼었다.
그러나 그때 간행된 판본(板本) 가운데 세상에 유행된 것들이 매우 적었는데, 내 기억으로도 어렸을 적에 언젠가 한 번 어떤 사람을 통해 빌려다가 읽어 본 일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고 나서 뒤에 다시 한 번 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구할 수가 없었으므로 늘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금년에 천파(天坡) 오공 숙(吳公䎘)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으면서 인본(印本) 한 권을 구입하여 선사(繕寫.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베껴 쓰는것)하고 교정(校定.책의 자구를 검토해서 정하는 것)한 뒤 각 고을에 분정(分定)해서 간행하게 하였는데, 대구부사(大丘府使)인 김후 상복(金侯尙宓)이 이 일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일이 마무리가 되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 서문을 부탁해 왔다.
아, 비흥(比興.시를 뜻함)의 의미가 사문(斯文.儒道)에 참여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를 짓는 일도 당장에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없애서는 안 될 점이 있다고 한다면 두시를 어찌 읽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두시를 읽을 때 언해가 있는 것이야말로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언해(諺解)를 엮은 것으로 말하면 성묘(成廟)께서 일찍이 관심을 기울여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이를 재차 간행하고 널리 배포하여 시를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보관하고 사람마다 외우게 함으로써 성조(聖朝)의 온유(溫柔)하고 돈후(敦厚)한 교화에 이바지하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백성의 풍화(風化)를 담당한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라고 할 것이다.
오공으로 말하면 학문을 좋아하고 문사(文詞)에 능할 뿐더러 관리로서의 직책 수행에도 민첩한 재질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야말로 관찰사로서의 바쁜 업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사문(斯文)에 관심을 갖고서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의 없어질 뻔한 책을 눈부시게도 다시금 새롭게 간행해 내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내 입장에서는 오공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어렵거니와 또 노년에 이르지 않은 지금에 와서 옛날 보려고 했다가 구해 보지 못해던 책을 다시금 보게 된 것이 스스로도 기쁘기만 하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서문을 쓰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