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신 5장 1-6(오늘의 언약)15030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269페이지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끄집어 낸 능력은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의 덕분이다.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서 있는 분이 일을, 어떤 일을 해야 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시를 받았는지를,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애굽이라는 나라가 설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의 전부다 연극무대 같아요. 왜 저기는 행인2가 걸어가고, 저쪽에는 가정집이 있고, 저쪽 이층집에서는 애가 왜 공부를 하고, 이런 모든 세트장의 세트는 필요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애굽은 왜 있고 애굽에서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왜 나왔느냐. 그거는 중간자, 중간에 있는 분이 하나님께 뭘 부여받았느냐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트를 그렇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분, 그 중간자가 해야 될 일, 부여받은 그것이 중간에 있는 자만, 중보자만 아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다른 사람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거기서 쏟아져 나온 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겁니다.
풍선 안에 물이 들어 있는데 풍선을 톡 터트리게 되면 물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모세를 톡 터트리면 모세가 혼자서 시내산에서 봤던 그 내용물이 이제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산 밑에까지 파급이 됩니다. 퍼져버립니다. 그 밑에 퍼져서 생산된 그 집단이 있는데, 그 집단을 가지고 언약된 백성이라고 하고, 요걸 약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거룩한 제사장나라 라고 합니다. 제사장나라 라는 것은 왕은 필요 없다. 다만 왕과 너희들 사이, 하늘에 계신 분과 너희들 사이에 필요한 것은 제사다, 라는 말이죠.
제사, 피 있는 제사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죄인으로 출생했으나 의인으로 끝마치리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는. 죄인으로 시작한 인생이 영광된 의인이 되어서 가게 되는데 줄창 계속해서 제사가 거기에 따라붙어야 돼요. 제사가 딱 밑에 깔려야 돼요. 하루만 제사장나라가 아니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제사장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약에서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그 세일sale, 기간이 없어요. 그런 세일 기간은 롯데백화점이나 있는 것이지. 고거 끝나면 세일 안 한다는 그런 게 없어요.
끝까지 그 밑에 언약이 바탕이 되어서 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의 탄생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사가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제사의 원형, 모델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모델을 주께서는 미리 정답을 주고 왜 그런 정답이 나오는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광야에서 상황 봐서 튀어나오도록 조치합니다. 그 정답이 뭐냐, 어린양의 피를 문에다가 페인트칠하니까, 죽음이라는 사자가 “어, 여기는 내가 손댈 필요가 없네. 건너뛰고.” 해서 건너 뛰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유월절이라 하는데, 죽음이라는 사자는 높이뛰기 선수인지 건너 뛰어버려요. 건너뛰고 다른 집 갔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을, 심판을 행사하는 천사가 뭘 보고 건너뛰었냐 하면, 그 사람의 직업이나 인품이나 양심이라든지 그런 걸 보고 건너뛰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이트 보니까 ‘양심사랑’이라는 사이트가 있어요. 기독교 계통 사이트인데, ‘피사랑’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양심사랑이라고 했는지. 피를 보고 넘어가요.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찬송가에 그런 가사 있죠?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그렇다면 피를 보고 넘어가려면, 우리가 그러면 히브리인처럼 살려면 우리 안에서 뭐를 생산해내야 하느냐 하면, 피를 생산해내야 하는데, 우리가 만들어낸 피는 안 받습니다. 참, 여기서 골치 아프죠. 우리가 만들어낸 피는 또 받지도 않아요. 주께서 유발시키신 피, 그것만 받아내시는 겁니다. 이 피를 주께서 생산해내 받아내기 위해서 꼭 여기에 역할 해야 될 존재자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고 악마입니다.
마귀와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좌절케 해버려요. 이 마귀가 하는 일이 고소하는 거거든요. 고소나 고발하니까. 일종의 양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적하는 일을 마귀가 담당해서 하는 겁니다. 스가랴 4장인가 보게 되면 천상회의에 마귀가 꼭 참석합니다. 옆에 좌의정인가 우의정인가 옆에 꼭 참석합니다. 여호수아가 여기 올라오는데, 여호수아가 세상에 살면서 옷에 때가 너무 묻었어요. 살다보니까 그렇겠죠. 살다보니까. 촛불집회도 해야 되고 데모도 해야 되고 할 게 너무 많다 이 말이죠.
그렇게 올 때에 마귀가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다. “얼레리 꼴레리! 저 것 보세요. 살라고 저렇게 더럽게 살았잖아요?” 다른 천사들은 아무 말 못 하죠. 왜? 그 말이 사실이니까. 팩트fact니까. 정말 살다보니까 온갖 짓을 다 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 한마디가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옷을 벗겨라! 그 더러운 옷을 벗겨라!” 게임 끝났습니다. 게임 끝났어요. 누가 지적해주고 그 지적에 대해서 당사자가 아무 소리 못하죠. 왜, 마귀의 말은 다 맞는 말이니까. 그래서 아무소리 못했는데 옷을 벗기라는 그 순간에 여호수아 머리에는 하나님이 주신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예상한 바가 아니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가지고 노는 바비bobby인형 같아요. “옷을 오늘은 이걸로 한번 갈아 입혀볼까? 머리 요걸로 한번 씌워볼까? 아이고 이쁘네! 이걸로 하면 더 이쁠까?” 주님의 노는 마당에 인형으로 가담이 된 거죠. 하나님의 자기 놀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가 만족하실 때, 나오는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고 만족이고 의로움입니다.
그것은 이방나라,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는 좀 이상해보이지만,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충분하게 그 증거를 찾아낼 수가 있어요. 이제부터 그 찾아내는 방법을 언약가지고 설명을 할 텐데. 상당히 좀 난해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해보려고 제가 애를 쓰겠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여기서 오늘날, 투데이today, 하여튼 아는 영어만 써. 아는 영어만. 비겁하게. 투데이, 오늘 있는 우리들에게 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언약 안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개념은 여기에 투입되지 않습니다. 시간 개념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거거든요. 시간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그래서 인간세계에 시간으로 도입된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내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 원인은 뭐지? 내가 지금 요런 행동을 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오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적인 텀term을 둬가지고 내가 행함으로 내가 얻고자 하는, 내가 기대하는 실적을, 내가 뽑아내겠다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인간세계에는 역사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 인간은 스스로 자부하기를 ‘역사는 발전 한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역사는 발전 한다.’ 진리라 하는 것은 상황 따라 다르기 때문에 참된 진리는 오직 역사, 변화시키는 역사만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딜타이Dilthey라는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떤 의미냐, 이런 의미죠. “자족하지 마라. 앞으로 더 좋은 게 있는데 여기서 멈추지 말자.” 이거는 회사에서 데이터data 그려놓고 “올해 실적은...2015년 실적은...” 이런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요새 교회도 그런 것 하지만. 우리교회는 실적 같은 그런 것 없어요. 왜? 묵시세계기 때문에. 참, 제가 말하고도 부끄럽지만. 우리는 묵시세계기 때문에 그런 실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죠.
“오늘날 너희에게” 라고 해서 시간을 전부 껴안은 그것이 오늘이라는 텀term. 내일이 아니고 어제가 아닌 그 텀term. 어제와 내일 사이에 그 텀term으로 존재하는, 그 해안선 같은 오늘에다가 비집고 하나님께서는 전부를 다 거기다가 쏟아 붓습니다. 꼭 뭐냐, 깔대기 같은 형식이에요. 들어가는 입구는 넓고 빠져나가는 입구는 좁고. 깔대기에다가 집어넣고 뽑아내듯이. 그 거대한 것이 한꺼번에 다 들어옵니다. 다 들어오게 되면 그 안에서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하면, “시간 따라서 구원되겠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구원이 되는, 구원 그 이후가 없는 거예요.
박영선 목사님 책 제목을 잘못 한 거예요.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그냥 이 순간 구원이 되는, 순간적인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근데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지금 구원받았고, 또 뭐 계속 구원의 날을 이뤄가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이렇게 되면 구원파 유병언이나 박옥수나 그런 사람들한테 걸려드는 거예요. “몇 월 며칠 구원받았습니까?” 구원파한테 걸려드는 거예요. 구원파에게. 언약적에 시간 요소를 제거하는 그 이유가 있어요. 언약적인 시간을 째고 들어왔을 때에 그 내용이 하나님보시기에는 다 있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그 언약적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요게 오늘 설교하는데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언약적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없으니까 그 언약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 쪽에서 언약에 내용에 유사성을 가지고 그걸 채워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침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웃을 사랑하라.” “사랑? 사랑? 해야지.” 하고 내 쪽에서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거기다 동원시킵니다.
그걸 동원시키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뭐가 포함이 되느냐 하면, 거기에 진화와 진보가 포함되어 있어요. 시간요소가 포함이 돼 있어요. 옆집에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밥을 못 먹었다. 그러면 내가 떡을 조금 해줘야지. 해놓고 하는 말이, 지금은 떡이지만 내일되면 현찰로 오 만원 드리겠습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지금은 떡이지만 내일되면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려우면 병원에 입원시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이웃 사랑은 완료된 게 아니고 “앞으로 잘 할게요.” 가 돼요. 앞으로 잘 할게요.
그러면 묵시세계는 시간이 없는데, 인간이 그 율법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받는 순간, 그 내용은 누가 채우느냐 하면, 자기 쪽에서 채워나가게 되는 겁니다. 왜, 언약적 백성인 티를 낸다고, 자기 나름대로의 티를 내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유도한 거예요. 내용은, 언약적 내용은 없어요. 없는데, 말씀을 듣는 순간 인간은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반응을.
이게 서울강의 할 때 했는데요. 온유하라, 인내하라, 사랑하라. 화평하라, 하면 이게 이 내용에 대해서 아, 이거 내가 아는 거다. 이거 아는 거야. 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끄집어내면 순간, 그 아는 것 순간 거기서 자족하지 않습니다. 온유, 이것보다 더 온유할 수 있는데. 이것보다 더 많은 온유를 할 수 있는데. 계속해서 고건 한 달 뒤에, 믿음 좋을 때 할게. 이래 돼버려요. 시간요소가 개입된다고요.
이거는 마치 남자들이 여자 친구나 아내하고 이야기할 때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여자가 이유도 없이 삐졌을 경우에 제일 힘들어해요. 도대체, 남자는 직접 이야기 해주기를 원해요. 그 내용을. “그래 뭣 때문에 삐졌는데?” “말 안 해.” 그러니까 남자 쪽에서는 빨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여튼 미안해. 미안해.” 그럼 여자 쪽에서는 “뭣 땜에 미안한데? 뭣 땜에 미안한데? 이거 성의 없이 빨리...뭣 땜에 미안한데?” “이런 것 때문에 미안하고....” “또 끄집어내봐! 봐! 내용 없잖아?” 남자 쪽에서 자꾸 끄집어내게 하는 거예요. “또, 또” “이것 때문에 미안하고...” “내가 그것 때문인 줄 알아?” 그럼 남자 쪽에서 화가 나가지고 “그럼 뭐? 뭐? 뭐? 왜 그런지 이야기를 해보라니까.” “당신은 내가 왜 이러는 줄 모르나?” “모르니까 이카지?” “모르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꼭 주님이 우리한테 하는 식하고 똑같아요. 니가 아는 것 다 끄집어내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 다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은 어디까지 끄집어내야 하느냐 하면, “주여! 저는 지옥가야 됩니다.” 그 소리까지 끄집어내야 하는데 차마 그 소리를 하지를 못해요.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은 그냥 자기 제물을 드렸어요. 그러나 아벨은 제사를 드릴 때, 아벨의 제사, 하나님께 응답받는 제사에 제일 중요한 요소는 그겁니다. 분리입니다. 몸체와 기름부위를 분리해요. ‘나 아니고 주님’이거든요. 이 기름이라는 것은 기름부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예수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내가 한평생 살면서 이렇게 살아왔지만 그 역사는 분명 아니죠? 그럼 아니고말고. 따라서 우리는 제사하거나 예배드릴 자격도 없어요. 없는데, 문제는 거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주께서 거기다 담아놓은 주님의 것이 있어요. 그걸 분리시키면서, 찢어지면서, 고걸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거 말이죠? 우리 주님 말이죠?” “그래. 바로 그거야!” 역사가 변해도, 아무리 발전해도, 발전해서도 안 되고 달라져서도 안 되는 요소, 궁극적인 요소가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그 내장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주실 때, 언약의 완성도 포함시켜서 준 거예요. 근데 인간은 오해해서 이웃사랑을 자기가 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웃사랑 안에, 그 자체 안에, 그 자체적인 성과가 들어있는데, 우리는 이웃사랑을 내가 성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구약에서, 사무엘하 1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다시 말해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직접 우리가 대조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시간에 속해 있고 주님은 시간을 벗어났기 때문에 대조가 안 돼요.
tv프로에 9살 먹은 초등학교 2학년 애가 이런 질문을 해요. 공개적으로. “우리는 인생을 왜 삽니까?” 이래 물어보는 거예요. 9살 먹은 애가 방송에 나와서.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삽니까?” 물으니까 mc가 답변을 못하고 서로 미루다가 지목해서 아무나 답하라고 했는데, 그럴 때, “왜 엄마한테 묻지 않고 왜 우리한테 묻느냐?” 하니까 엄마한테 물으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야야 나도 모르겠다. 왜 사는지...” 이것은 엄마가 진지하게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가 아니라 다른 말로 해서 “야야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못 죽어서 산다.” 그런 뜻이에요. 한탄하지 마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뭐 철학적인 내용은 아니고, 애가, 아홉 살 먹은 애가 인생에 대해서 묻는 것은 그만큼 학원을 적게 다녔고 숙제가 적다는 뜻이에요. 부양해야 할 식구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가 설거지하고 빨래할 게 없다는 뜻이에요. 배부른 소리입니다. 나중에 크면 인간은 왜 사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무엇을 쟁취할 수 있느냐, 그 길을 향하여 달려가는 거예요.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에 가면 아부다비가 수도인데 낙타 경주대회가 있답니다. 낙타경주대회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고기를 하나 물고 빨리 가면 사냥개나 낙타들이 정신없이 경주한다는 거예요. 인간이 꼭 이래요. 왜 사느냐고 물을 사이가 없어요. 남을 이겨야 되니까. 그냥 줄기차게 밟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가야 돼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바로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다윗이, 지금 이스라엘이 암몬나라하고 전쟁하는 중에, 우리아 장군은 전쟁터에 가있고 다윗은 지금 한가하게 걷다가 앞집에 있는 어느 집에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빼앗겨서 그 여인을 불러가지고 동침을 같이 했어요. 동침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자기 부하를 통해서 그 여자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임신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아 장군에게 휴가를 줘서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케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정치권에서 물타기 작전이라고 해요.
물타기 작전해서 그냥 DNA를 섞어버리려고 하는데, 우리아 장군이 곧이곧대로 “지금 전쟁 중이고 내 동료들은 거기에 있고, 하나님의 언약궤도 거기 있는데, 나는 이거 뭐 놀고 아내하고 휴가를 즐길 여유 없습니다.” 하고. 동침을 안 했어요. 술을 먹여도 자기 부하들하고 술 먹지 자기 집에 안 갔어요. 그리고 난 뒤에 우리아 장군을 죽여 버렸어요. 죽이고 난 뒤에 요압보고 하는 말이 칼은 누구나 다 죽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고 깔끔하게 모든 게 다 끝났는데, 지금 언약이 뭐냐를 설명하는 겁니다. 요런 다윗의 행동은, 요런 역할, 우리아 장군이 전쟁터에 나간 것, 그리고 이쁜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든 역할 배치는 하나의 세트가 되는 거예요.
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언약을 보여 줄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제는 언약을 알아야 이스라엘을 언약대로 다스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자기는 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한 마리 있는데, 그 양은 그냥 가축이 아니라 한 침대에서 자고 함께 먹고 같이 살았던 자식 같은, 한 마리밖에 없는 귀한 양인데, 그 주인이 손님 왔다고, 자기는 양이 많으면서도 그 하인에게는 한 마리밖에 없는 그 양을 잡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아 장군에게는 부인이 밧세바 한명밖에 없고, 다윗은 본처가 여섯명이고요. 그 뒤에 첩이 무지하게 많았어요. 지는 양들이 많은 거예요. 김양, 최양, 박양...양들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양을 날름 뺏어다가 잡으니까, 듣는 그 순간 누군지는 안 밝혔으니까, 다윗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 “내가 율법으로 통치하고 내가 왕으로 있는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에서 그런 율법의 위반자가 있다는 것은 이건 용납이 안 된다. 율법대로 4배를 갚아야 하고, 아니 갚을 필요 없이 아예 죽여 버려야 한다.” 하니까, 그때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죄로 드러나게 했을 때, 비로소 율법은 이 땅에서 완성을 보는 겁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께서 그 채찍에 맞으신 것을 남의 일로 여겼는데,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율법이 내 내부까지 파고들어 온 그 증거가 내 속에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죄인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피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자기를 기어이 잘난 사람으로 간주하지, 궁극적으로 뭘 해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언약의 원칙이고 내용입니다. 그 소리 듣고 다윗이 얼마나 울었는지. 그 다음에 다윗은 “내가 바로 하나님의 세트장에 걸려들었다. 맞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던 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아가 죽은 것은 내 죄를 밝혀내기 위해서 희생타로 우리아가 죽어야 했었습니다. 주여, 꺾어진 우리아의 뼈로 인하여 주께서 저를 살게 했습니다. 저(우리아)를 죽임으로 도리어 저(다윗)를 살게 함으로서, 살고 죽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를 택하신, 선택하신 주님이 내 안에서 택했습니다.” 라고 고백하죠. 시편 51편의 고백대로 예수님께서 그것을 묵시적으로 온 역사 속에 끝까지 효과 있도록 십자가라는 묵시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십자가는 날마다 반복되죠. 우리의 시간관과는 관계없이.
또 한 가지 예는 열왕기상 3장에 나옵니다. 3장에 보면 여기 창기가 있었는데, 둘 다 창기가 아들을 낳았어요. 아이들을 놓고 둘이 잠을 잤는데, 그 중 갓난아이가 덩치 큰 창기에게 깔려 죽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계집이 이르되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놓고 싸우게 된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전에 솔로몬이 분명히 하나님께 자기의 오래 사는 것도 원치 않고, 원수들이 망하는 것도 원치 않고, 돈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대로 나에게 임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지혜로 통치하게 해달라고 그 기도에 대해서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첫 번째 숙제가 바로 이 숙제입니다. 인간들로 해서는 이게 해답이 안 나와요. 제가 빨리 결론내리겠습니다. 너희들 둘 중에 애를 위해서 양보할 사람 누가 있느냐? 이걸 묻는 거예요. 나 하나 없앨 수 있는, 스스로 자기는 살 필요도 없다고, 나는 애 없어도 괜찮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그 아들의 엄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주인이 바뀌어요. 내가 주인이 아니고 바로 나를 한 세트로 활용하기 위해서 주인이 따로 나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이미 그 속에서는 언약이 이루어졌어요.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을 잡았잖아요. 어린양을 잡을 때, 우리가 양 잡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양이 우리를 대신한다고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양 잡은 것은 우리가 진작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입장에서 양의 피를 바르는 거예요.
그것이 신약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오셨으면 그런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이제는 우리의 구원문제가 이미 내 손에서 벗어나서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몇 월 며칠에 구원받느냐가 아니고, 내간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 구원됐는지, 그 언약적 효과를 증거 하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제는 너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 증인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나라, 언약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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