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셨나요?
구원받은 후에도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앙생활"? (국어사전)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을 의지하고 받드는 행위를 말한다.
불교도들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독교에 한정해서 이 주제를 언급한다.
신앙생활? (원론적인 해석)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을 받드는 행위를 가리킨다.
교회생활도 신앙생활의 일부에 해당한다.
성도들은 주일이 되면 교회에 출석한다. 예배도 드리고 교제를 나눈다.
이런 행위들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받든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타인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생활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일부분에 해당한다.
손 쉽게 계산해 보자.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오시는 분은 7일 중 하루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두 번 오시는 분은 7일 중 이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을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교회 생활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이 성실하다고 하여 신앙생활이 성실하다고 단정 짓을 수는 없다.
그럴 가능성은 높지만..
학교 성적에서 학교 전체 수학 1등이 전교 1등이라고 단정 짓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신앙생활은 우리 인생 전체가 되어야 한다.
일주일에 주일 하루를 정해 놓고 이 날은 신앙생활을 하는 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도에게 있어 모든 생활이 신앙생활에 해당한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전부가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 믿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천국 가는 것인가?
"예수 천당"이라고 한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의미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천국 입성에 당첨이 된 것이다.
이 논리가 맞다면, 예수 믿으면 천국 입성이 확실한데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나 자신의 구원자임을 믿습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면 천국 가는데, 굳이 주일날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가?
어떤 이는 수십 년 전에 구원을 확신하고서도 지금까지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기에 천국 입성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아니다.
구원받는 것인가?
아마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구원받으신 분들일 것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가?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미 이루었는데..
신앙생활하는 목적이 천국 가는 것 혹은 구원받는 것이라면 여기 계신 분들은 내일부터 아니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신앙생활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오늘 설교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제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제가 한 주 간 동안 이 본문으로 고민하고 묵상한 결론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 "구원받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이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도는 구원만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 받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주 의미심장한 논리이다. 이 논지의 의미?
구원받은 사람중에 좋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구원 받은 성도들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간혹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교회 다니는 성도라고 소개한다면 어느 누가 교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겠는가?
제가 "간혹 있다"라고 표현했다.
사실은 제법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제가 몇 번 설교 중에 이런 예를 들었다.
오래전 약 20-30년 전, 반송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 분은 은퇴를 했다.
어느 사석에서 자신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 발생했던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목사님이 몇몇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다.
그 당시 반송지역은 인구밀집지역이었다.
부산시의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범일동의 조선방직이 철거되어 그 지역 주민들과 수정동 고지대 주민들이
반송지역으로 유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인수이 늘었다.
그래서 몇몇 성도들이 교회 건물을 건축하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몇 안 되는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하여 교회 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믿음 좋은 건축 업자를 소개받았고 그분에게 공사대금 일부를 지불하고 건축을 맡겼다고 한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라 더욱 신뢰가 갔다.
건축 중에 IMF사태가 터졌다.
그러자 이 분이 공사를 못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전화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작정기도에 돌입했다.
어느 날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왔다. 자신은 이 동네에 사는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교회 건축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왔다고 했다.
자신에게 공사를 맡겨달라고 하면서 공사 대금은 건축 완공 후에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그분은 교회 다니시는 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는 지인을 통해 안타까운 교회 소식을 듣고는 달려왔던 것이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도 못한 사례가 더러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정말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간혹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도 못한 구원받은 성도가 있다는 사실을 직 간접적으로 목격할 때마다 난감하고 곤혹스럽다. 부끄럽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정말 여러분의 구원받음이 확실하다면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셔야 한다.
자녀들로부터 존경받는, 아니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이나 원망받지 않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사회인이 되어야 한다.
좋은 직장인, 좋은 학생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오너가 되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받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목적은?
구원받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이 될수 있을까?(본문 중심)
구원 받은 성도들은 신앙생활 중에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1. 언어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25, 29,31-32)
먼저, 25절을 읽어보자.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만을 말하십시오"(공동번역)
"남을 해치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말을 하라"(29)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버려야 한다"(31)
이 구절들이 언어(말)를 언급한다.
모든 갈등은 말에서 시작된다. 문자메시지, 카톡메시지등..
거짓말(25), 타인을 해치는 말을 삼가라(29)
31절: <독설>? 상대방을 비방할 목적으로 거침없이 내뱉는 모질고 악독한 말
<격정>?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말
<분노>? 몹시 성을 내는 것
<고함>? 크게 부르짖거나 외치는 소리.
사회언어학에서는 사회 계급에 따라 사용언어에 차이가 있다고 분석한다.
인도사회는 계급사회이다.
상층민과 하층민의 사용언어에 차이가 있고, 미국에서도 백인들과 흑인들의 사용하는 영어에도 차이가 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구원받아야 한다.
나쁜 언어를 버리고 좋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나쁜 언어? 25절, 29절, 31절
언어는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낸다. 언어가 그 사람의 품격을 만들어준다.
오래전에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목회자 스피치 세미나가 있었다.
강사가 백지연이라는 방송인이었다.
그녀가 강의 중에 목사님들이 설교 중에 사투리 사용을 금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강의 끝난 후 질문시간에 "모든 목회자들이 서울말을 해야 하느냐?"라고 항의했다.
이렇게 대답했다. "서울말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표준말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표준말>?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말.
구원받은 우리는 현재 신앙생활 중이다. 우리 목표는 구원받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의식적으로 좋은 말을 하여야 한다. 사용하는 단어나 용어를 선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나는 나이가 많으니" "나는 못 배워서"같은 말로 회피하지 마라.
좋은 사람은 좋은 언어를 사용한다.
2. 정서적인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26-27)
정서? 감정과 관련된 정신적 상태를 가리킨다.
감정 가운데 급격히 생기는 일시적인 감정을 다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분노이다. 일시적으로 갑자기 생기는 분노를 언급.
그러므로 본문에 소개된 분노는 일시적으로 갑자기 생기는 분노를 가리킨다.
26-27절이 주는 의미 세 가지.
1) 모든 사람은 화를 낼 수가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가? 인격이 완성된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가?
남녀노소, 나이불문,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화를 내 본 적이 있다.
불의를 보고 화를 낸다.
"분을 내어도"? "화를 내세요 하지만 죄는 짓지 마세요"(KJV)
모든 이가 화를 낼 수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이 전개.
2) 화를 내되 화를 품지는 말라.
"품는다?" 간직한다.
비가 내려 빗물이 웅덩이에 고여있다. 그러면 웅덩이 속에 있던 미생물로 인해 물이 부패하기 시작한다.
부영양화로 인해 각종 미생물이 생기고 악취가 나기 시작. 녹조가 발생. 오염된다.
물은 흘러 내려보내야 한다.
화도 마찬가지다. 화병이라고 하지 않는가? 화를 풀어내지 못해서 생기는 질병
다른 말로 울화병? 스트레스를 적절히 풀지 못해서 속상하고 억울한 감정에 계속 쌓여서 생기는 질병.
이렇게 풀지 못하면 큰 병이 생긴다.
물도 흘러내려 보내야 하듯이 화도 흘러내려 보내야 한다.
누구나 화낼만한 일을 만나다. 화는 늘 우리를 찾아온다.
길 가다가 도 지하철 안에서도 운전하다가도 사무실에서도 늘 화를 만나게 된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화를 만난다.
이때 상황에 따라 우리는 화를 낼 수는 있지만, 화를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혹시 교회 안에서 화내는 분들을 보시더라도 이상하게 생각지 마라.
3) 화를 품게 되면 죄를 범할 수 있다.
화를 품고 있으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 마귀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홧김에"
둑에 작은 구멍에 생기면 둑안에 가두어 두었던 물이 그 구멍 속으로 유입되기 시작.
처음에는 미세하게 물이 들어오다가 구멍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둑이 무너질 수도 있다.
구멍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마찬가지다.
화를 품고 있으면 우리 내면에 구멍이 생긴다. 그러면 마귀가 그 구멍 속으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놔두면 그 구멍이 커져서 나중에 자신이 무너지게 된다.
화를 풀어내는 비결을 찾아야 한다. 건전한 비결을 찾아야한다. 예) 술, 마약, 도박, 소비는 건전한 방식이 아니다.
개인의 상황이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비결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가장 적당한 비결이 있게 마련이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사람 만나서 술 마시고 돈을 물 쓰듯 하던 사람이
예수 믿은 후에는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으로 바꿨다면 정서적인 영역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를 풀어낼 수 있는 적절하고 건전하고 성서적인 방식을 찾기 바란다.
이렇게 정서적인 영역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3. 경제적인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28)
다른 이의 도움으로 살던 사람이 다른 이를 도와주는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도움받던 사람이 도움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도움? 경제적인 도움을 말한다.
도독질이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도움 받던 나라에서 도움주는 나라로 발돋움했다고 한다.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도움을 주라"고한다(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결론을 내린다.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구원받았지만 신앙생활을 멈출 수 없다.
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구원받음이나 천국입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새 사람을 말한다.
새 사람이란 언어영역과 정서적인 영역과 경제적인 영역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을 가리킨다.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 알고 재정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원받은 좋은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