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법문 >
공짜 점심(點心)은 없다
글 / 현일스님
(켈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법왕사 주지
내가 미국에 와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산타 모니카쪽에 있는 신도를 만나러 갔었다. 그런데 신도가 출타를 하여 좀 기다려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맥도날 가계에 가 커피를 한잔 주문해 마시고 있었다, 주루루 중학생 정도의 여학생들이 들어 왔다, 학교가 파하는 시간 이었나 보다. 많은 학생들이 들어와 이것 저것 먹을 것을 주문하여 끼리끼리 태이블에 앉아 먹는데 유독 내 앞쪽에 앉아 먹는 여학생들이 눈에 들어 왔다. 4~5명이 같이 앉아 먹는데 한 학생은 아무것도 산게 없는 빈손이였다. 학생들은 각자 산것을 먹는데 산것이 없는 학생은 우더커니 동료들의 먹는 모습만 지켜 보는데 아무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어찌 저를 수가. 같은 반 학생이거나 친구들이니까 같이 왔을건데, 누구 하나 감자 투김 한 조각도 주지 않는다.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 하다.
공짜점심!
점심 하면 덕산(德山,780~865) 스님의 점심이 빠질수가 없다.
중국의 고서 ‘벽암록’에 의하면, 덕산스님은 당나라 무종 감통(武宗, 感通)때 스님 이다. 감통 6년 74세로 입적하였고, 시호는 견성대사 (見性大師))로, 중국 호북성(湖北聖) 검남(劒南)사람이며 속성은 주(周) 이름은 선감(宣鑑)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율장(律藏)을 깊이 연구, 성상(城相)에 통달 하였으며 불교 경전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금강경(金剛經)>에는 아주 정통하여 좌로끼고 우로끼고 모르는 봐가 없어, 어떤 학자도 <금강경>에 있어 감히 그와 대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성씨를 따서 주금강이라 불렀다. 불교 학계에서는 아무도 그의 학식을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에, 주금강의 학문적 자세는 도도 하였다. 논리 사변적 교리를 깊이 연구한 주금강은 날카로운 비판력을 갖인 교만한 교리 학자였다.
그때 중국 남방에는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 별전(敎外別傳)을 높이 주장하는 선종(禪宗)이 한창 성행하고 있었다. 일찍 부터 이 소문을 듣고 있던 주금강은 남방으로 찾아가서 교외 별전을 주장하는 선객(禪客)들의 기개를 꺽어, 코를 납작 하게 해 주리라 결심을 하였다. 주금강은 <금감경소(金剛經疎)>만 걸망에 잔뜩 짊어지고 남방으로 갔다. 그때 선승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용담 숭신(龍潭崇信)선사를 찾아 가는 길이다. 먼길을 몇날 몇일을 걸어 남방의 풍주라는 곳에 한낮에 도착 하였다. 마을에 도착 하니,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다. 날씨는 몹시 덥고 배는 고픈지라 요기도 할겸 좀 쉬기도 할겸 노파에게 점심을 좀해야 겠으니 떡을 팔라고 하였다.
노파가 주금강을 한참 쳐다 보다가 물었다.
“이 더운 날씨에 무겁게 짊어진 보따리는 무엇입니까?”
“<금강경소> 올씨다,”하고 주금강은 대답 하였다.
“그렇다면 한 마디 묻겠는데, 대답을 해 주시면 이 떡을 그냥 드리고 대답을 해 주지 못하면, 주기는 커녕 팔지도 않겠소”.
주금강은 금강경에 관한 내용이라면 막힐것이 없는 지라, “공짜 점심”이라도 하게 되는구나 싶어 내심 자신 만만 하였다.
노파가 묻기를,
“<금강경>에 과거심(過去心)도 불가득(不可得)이요,
현재심(現在心)도 불가득(不可得)이요,
미래심(未來心)도 불가득(不可得)이라,
과거의 마음도 얻을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수 없다, 하였는데 스님은 도대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작정 입니까?,”
주금강은 앞뒤 말문이 꽉 막혀 버렀다, 허술하게 여겼던 떡장수 노파의 질문에 주금강 눈앞이 캄캄하였다. 점심을 공짜로 먹기는 커녕 사 먹지도 못하고 쫓겨 났다.
주금강은 “이 근처에 훌륭한 선사가 계신 다는데 어디로 가면 되느냐?” 물었다.
노파는 “멀지 않는 곳에 용담사(龍潭寺)가 있고 그 절에 숭신선사(崇信禪師)가 계십니다.”라고 노파는 정중하게 대답 하였다, 주금강은 점심도 못하고 용담사를 찾아가 한 노승을 만났다.
노승을 만난 주금강은
“이곳은 못도 없고 용도 없구나?.”
노승이 답하는데,
“자네가 못도 보고 용도 보았네. 보이는가?”,
이렇게 주금강과 숭신선사는 조실방에서 밤늦게 주거니 받거니 법담을 하였다. 밤이 어석하여 객실에서 묵게 되었다. 숭신 선사는 주금강을 객실로 인도를 하였다. 밖이 어두워 선사는 촛불을 밝혀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찾도록 도와 주었다. 주금강이 막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찾을려고 하는데 선사는 촛불을 훅 불어 꺼 버렸다. 사방은 캄캄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 주금강은 크게 깨달았다. 지금 까지 알고 있던 사변적 지식은 촛불에 불과 하구나.
촛불이 없어면 눈앞이 캄캄한 것을!
숭신 선사가 촛불을 불어 꺼 버렸을 때 이제 까지 딛고 섰던 분별지의 바탕이 무너저 버린것이다. 천지를 분별 할 수 없을 만큼 앞이 새까만 순간, 주금강은 자기를 내려치는 새로운 지혜를 체득 하였다. 이후 주금강은 평생 짊어 지고 다니며 자부심에 가득 차있던 금강경을 불사르고 참선 정진하여 훌륭한 선사가 되었다.
천하를 호령 할것 같았던 주금강도 노파의 떡 “공짜점심”을 하지 못 하였다.
<점심(點心)>
우리가 세끼니를 가리킬때 쓰는 말이 아침, 점심, 저녁인데 이중에 중간에 먹는 때를 점심이라 한다, 점심이란 같은 단어가 우리에게는 점심(點心)이고 중국인들에겐 바로 “담섬”이 된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마음에 점을 찍듯이” 간단하게 요기하는 것이란 뜻이다. 한자의 뜻 자체는 음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먼 옛날에는 하루 두끼니를 먹는것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즉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나중에 저녁을 먹는 것인데 하루가 느리게 돌아가고 식량까지 부족하기 일쑤였던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그나마 두끼라도 항상 먹을 수 있으면 다행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다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말이 낮에 먹는 끼니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을까? 어찌되었던 인류는 불을 사용하게 되어 음식을 익혀 먹어 영양섭취를 많이하게 되어서 뇌는 커지고 머리는 발달 되었다고 한다.
점심에 관한 한가지 설은 중국 남송시대 한세충(韓世忠)이라는 장군의 아내였던 양홍옥(梁紅玉)의 일화에서 점심이란 말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송나라와 북방의 금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장군의 아내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일을 도왔다. 손수 만두를 빚어 병사들에게 나눠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많은 병사의 수에 비해 만두는 턱없이 부족했다. 넉넉히 나눠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만두의 양이 많지 않습니다. 부족하더라도 많이 드신 듯 마음에 점을 찍으 십시요”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 마음에 점을 찍으라고 한것은 부족 하지만 마음 만은 많은듯 받았으면 하는 정성일 게다. 장병 부하들을 아끼는 어진 사모님의 덕인지 사기가 충천한 송나라 군대는 금나라 10만 대군을 단지 8000의 병력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한다. 그 점심의 기운은 승리를 했다.
공짜 점심
프린스턴 대학의 데이비드콜랜드교수가 쓴 경재학 원론에 “탄스타플 “대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왕은 경제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책을 써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5~6년이 걸려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책이 완성됐다. 왕은 기가 찼다. 다시 한 권으로 줄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학자들은 2~3년을 끙끙대며 한 권짜리로 만들어 바쳤다.
왕은 또 트집을 잡았다. 정무에 바쁘다는 핑계로 당장 내일까지 한 줄로 압축 보고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맘에 안들면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엄포를 놨다.
뽀족한 수가 없어 학자들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점심이라도 먹고 죽자며 음식 배달을 시켰다. 불행이도 학자들은 돈이 없었다. 그러자 배달원은 “돈도 없어면서 음식을 주문해” 투들되며 음식을 도로 갖고 가버렸다.
끝내 학자들은 왕 앞에 무렵을 꿇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음식 배달원이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폐하 경제를 한 줄로 요약했습니다.”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공짜 점심 같은 건 없습니다.”
(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첫 글자를 조합해 보니 탄스탄플(TANSTAAFL), 곧 대왕의 이름과 똑같았다, 그제서야 깨닫음을 얻은 왕은 처형 대신 후한 상을 내렸다. “탄스타플”은 물론 가공의 인물이다, 콜랜드교수가 경제학을 재미있게 풀이 하려 지어낸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 루이지애나주 뉴 올리언스에서 유행한 공짜 점심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당시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많은 젊은이 들이 전장터에서 돌아 왔다. 술집들이 손님을 끌기 위해 미끼로 던진것이 바로 공짜 점심이다. 술 한 잔을 사서 마시면 점심을 공짜로 준다고 광고를 해댔다. 술 한잔 값은 15센트. 지금 돈으로 약 3달러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 1달러(지금 가치로 19달러)를 줘야 했으니, 술집마다 소님들로 꽉꽉 찼다. 한잔 들이키다 보면 또 한 잔을 마시고 싶은것이 인간의 심리. 술집들은 때돈을 벌었다. 나중엔 저녁까지 주는 술집도 생겨났다. 공짜에 맛들인 사람들은 아예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뿐인가 음주관련 범죄가 기승을 부려 정부는 경찰력을 증원하고 감방을 늘여야 돼 세금을 인상해야 했다.
공짜 점심은 전국적으로 번져 부작용이 매우 컸다. 이걸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도덕적 파탄을 초래해 결국 1920년대 ‘금주령’의 빌미가 된다.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헌법(18조)에명시 됐을 정도다. 공짜 좋아하다 하마터면 나라가 거덜날 뻔 했다. 이 금주령 시기에 마피아는 밀주를 만들어 팔아 때돈을 벌었다 한다.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문제고 못 먹게 해도 문재가 되는가 보다.
미국의 급식은 1949년 트루먼 정권때 시행됐다. 잉여 농산물로 가격이 폭락하던 때였다. 곡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학교 급식을 시작하게 된것이다. 처음엔 무상급식을 고려했으나 경제관료들이 결사 반대했다. 공짜 점심에 혼쭐이 난 탓이다. 빈곤층 학생들에게도 다만 몇 푼이라도 돈을 받았다. 공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교육계도 공짜는 거지 근성을 키워주고 근로 의욕을 위축 시킨다며 무상급식에 부정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공짜에 중독되면 커서도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설 가능성이 높아 교육효과가 반감된다는 논리다.
사실 공짜로 생긴것이 어디 있느냐? 공짜는 없다. ‘공짜 점심’을 바라는것은 공짜인생을 살려고 하는것이다. 공짜로 받다보면 나중에 공짜권리 주장을 하게 된다.
조선의 대학자요 발명가요, 성리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자식들에게 내리는 가계(家戒) 하피첩(霞피帖)(하피의 뜻은 저녁 노을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왕실에서 비(妃)나 빈(嬪)들이 붉은 치마를 입었다, 이것을 하피라 한다)을 만들었다. 다산의 신부가 시집 올때 붉은 치마를 입었다. 치마가 붉은색이라 하피라 이름 붙였다. 다산 정약용 부인이 시집올때 입고온 붉은 치마를 다산이 강진에서 귀향살이 할때 보내와 그 치마를 잘라 배접을 하여 아들 둘에게 가계을 적어 만들어 준 소책자에 이렇게 아들에게 썼다.
~~ 중략 ~~
“근(勤,부지런함)과 검(儉,검소함)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흉년이 들어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굶어 죽는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다. 하늘은 게으른 사람에 벌을 내려 죽인다.”고 하였다. 놀고 먹지 말라는 아버지의 준음한 아들에게 내리는 훈계다.
중국의 총림 백장 청규에도 이렇게 전해 온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루에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말라 것이다.
현일 스님은 구산스님을 은사로 송광사에서 출가했다.
1980년 미국에 입국했으며 1986년 법왕사를 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