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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송다니엘
그러나, 현재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21)의 삶.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24).
과거의 삶은 한마디로 허망하고 무지하고 더러운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이것과 완전히 다른 정결한 삶입니다. 사도는 „이제부터는…너희는 …를 하지 말고(17),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대조는 전형적인 성경적 사고입니다. 성경은 옛것과 새것, 더러움과 정결함, 거짓과 진실, 악과 선, 어둠과 빛을 매우 분명하게 가릅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옛것을 벗어버리고 악을 피하고 어둠의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날카로운 칼이 골수를 자르듯, 말씀은 우리 생각과 마음이 분명하게 되도록 이것을 쪼개어 비진리를 잘라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한국적 사고는 분석적이라기보다는 통합적이기 때문에 빛과 어둠을 분명히 가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진리도 통합적으로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고 진리를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마음이 맞으면 통합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분리합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또 통합합니다. 그러나 보니 정당의 이름도 수없이 바뀝니다. 그러면서 적당한 대의명분을 찾습니다. 독일의 경우 정당이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이름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국에는 교단도 수없이 분리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옛사람과 새사람, 세상과 하나님 나라, 어둠과 빛, 악과 선을 분명히 가르는 곳이 아니라, 어둠과 악도 포용해서 하나의 합(synthesis)을 만들어내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회에서 진리를 외치고 비진리를 정죄하고 쫓아내려고 하면 목사라도 쫓겨나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현대의 유럽의 정신계를 지배합니다. 유럽에서도 정(thesis)과 반(antithesis)의 구별은 서서히 엷어지고 모든 것이 합(synthesis)으로 바뀌어 갑니다. 진리의 개념은 상대적, 다중적이 되어, 하나의 진리는 없으며, 그리스도도 이미 중보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도 어느 정도 대우를 받게 되어 아무 신이라도 믿고 선하게만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점점 힘을 얻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외치면 근본주의자로 매도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2:1-3에서 에베소 교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아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허무와 죄로 죽었던 자였으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 즉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죄인이 아니라, 평범한 로마제국인, 헬라인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한국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이 살았는데, 성경은 우리가 정욕대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고소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과거와 명확하게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4:17에서 사도는 첫째로 우리가 마음의 허망한 것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그 마음을 말씀의 닻에 걸고 살지 않으면 아무리 즐겁고 보람되게 일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마음의 허망한 대로 산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돈, 권력, 명예를 목표로 두고 삽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목표대로 모든 것을 달성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죽으면 끝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준수하는 데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날이 갈수록 판단력이 증진되어 매사에 분별을 잘하게 되어 허망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마음의 닻이 없어서 허망해지므로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아무리 깊은 사상가요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이들은 무지와 어둠에서 헤멥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으로부터 떠나있습니다. 떠나있다는 말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을 더 좋아하게 되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무지함과 함께 마음조차 굳어져 감각 없는 자가 되어 방탕하게 되고 욕심으로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20대 후반에 독일에 유학 와서 독일사람들을 사귀어가면서 매우 놀란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이 저보다 인격이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과 대화를 하면 그들의 성숙한 인격 앞에서 저의 부족함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거의 믿지 않은 이들이, 신학생인 나보다 훨씬 훌륭하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자기부인을 많이 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열심히 배워서 이들을 따라가느라고 몇 년을 큰 고생 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 인격이 그 정도라면 저는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려는 저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불신자보다 인격이 못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사람이 사단에 속아서 사는 사람보다 못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성숙한 모습 앞에서 저의 부족함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적지 않은 독일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쳤는데, 가르치고 나면 제가 그들의 인격에 감화를 받게 되어, 선생이 제자에게 배우는 격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조금씩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극적으로만 배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사회, 역사, 정치, 철학 등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렇게 20년을 연구하며 변화 받기를 힘쓰니 독일사람들이 서서히 이해되고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대부분 독일 사람들의 내면을 읽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훌륭함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둠, 고민과 고통 등, 많은 문제가 이해되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전부 나의 선생과 같은 독일 사람들이 이제는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철학자들도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죄와 무지까지도 어느 정도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문학도로서 과거에 신화적 존재로 여겨졌던 많은 고전 작가들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롬 1:21 이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과거의 삶을 철저하게 회개하여 주님을 마음과 삶으로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마음의 허망한 것대로 살고 무지하고 교만하여 더러운 욕심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20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생활이란 그리스도를 이론적 만으로 배워서 종교생활과 실제의 삶을 분리해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믿기 전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도 않고, 실제로 삶이 변하지도 않았으면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서는 22-24에서 다룹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과거의 나, 즉 옛사람을 벗었습니다. 벗었다는 말의 시제는 그리스어의 아오리스트로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옛사람을 벗은 일은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옛사람의 삶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이었습니다. 옛사람은 구체적으로 앞에서 본, 롬 1:21이하의 말씀에 해당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원래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 3:9-10에서 „너희가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옛사람을 벗었습니다.
그다음에 23절에서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합니다. 새롭게 되라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그리스어에서 현재형은 계속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본문을 의역하면, „심령으로 늘 새롭게 되라“는 의미입니다. 옛사람을 벗은 사람은 이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4절에서는 우리가 „새사람을 입었다“라고 합니다. 이것도 시제는 아오리스트로서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일을 표현합니다. 즉, 신자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는 옛사람을 벗었고 새사람을 입었으므로 심령으로 늘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유지해야 한다입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1) 신자는 옛사람을 벗어버렸다. 이 사실은 롬 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6).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된 삶 때문에 나 대신 돌아가셨으므로, 그 죽으심의 효과는 나에게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옛사람은 세례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3-4)
2) 신자에게 늘 새롭게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이상한 말입니까? 신자가 완전히 죽어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되었으면 그만인데, 왜 계속해서 새롭게 되라고 합니까? 신자가 진정한 회심을 하고 거듭났다면, 더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데, 왜 새롭게 되어야 합니까? 이 파라독스가 구원론과 기독교 윤리의 하나의 근간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되고, 교회에 오랫동안 다닐지라도 윤리적으로 변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새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새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이들은 새롭게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새롭게 되려고 노력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에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단지 불교와 회교등, 무수한 다른 종교와 같이 종교적 비췸을 크게 받았을 뿐, 새사람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크게 각성하고 삶도 180도 바꾸어 종교와 단체를 위해서라면 일생 헌신하고 분신자살과 폭탄 테러도 감행할 만큼 확신에 넘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얼굴이 아무리 빛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구 끝까지 가서 일생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더럽고 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며 옛사람에 화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나이가 들면 그때야 힘이 빠져서, 지금까지의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서서히 위선을 하게 되어 무서운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단의 교주치고서 나이가 들면 악한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도는 자신을 늘 새롭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4:25이하에 많은 권고(명령)가 나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이미 새로워진 사람에게 그들이 계속 새로와지도록 주는 권고이며, 일반윤리와는 크게 구분이 됩니다. 23절에서 한 마디로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합니다. 심령이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인격의 중심부와 핵심입니다. 즉, 우리의 인격인 핵심인 심령,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하라고 합니다. 옛사람을 계속해서 벗어버리라고 하는 명령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옛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벗으라고 합니다.
3) 우리가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근거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우리가 이미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은 신자의 죄성이 없어지지 않아 죄를 짓기도 하겠지만, 그는 이미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도다!“(고후 5:17).
죄인이 거듭나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 왔고 영생을 받았다면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의 죄는 이미 완전히 사해졌으며, 앞으로의 죄도 사함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이상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죄를 미워하게 되었고, 거룩함을 갈망하게 되고, 마음에 과거에는 전혀 가지지 못했던 진리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싹틉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나는 이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또 동시에 다시 새로와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계명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윤리에서 이러한 현상을 인디카티브(직설법)와 임페라티브(명령법)로 설명합니다. 나는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직설법). 그러므로 이제 나는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명령법). 즉,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계명의 본질은 새로운 피조물에 어울리는 삶의 강령입니다. 무슨 강제가 아닙니다.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졌으므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듭난 본질에 일치하는 삶입니다. 계명에는 또한 하나님의 품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잘 연구하고 그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과 불순종, 정죄 이전에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복음을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올바로 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본질이 바뀌었으니 바뀐 본질로 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본질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본질대로 살게 되지 않는다는 파라독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본질대로 살기 위해서는 매우 애를 써야 합니다.
이러한 역설은, 복음의 실현이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와 아직 사이의 갈등은 신자의 새로운 실존을 규정합니다.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옛사람이 살아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육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육으로만 된 사람에게 영이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옛사람인 육과 새사람인 영이 함께 공존하는 실존입니다. 없었던 영이 새롭게 탄생했으므로 새로운 피조물, 혹은 새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옛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 둘은 서로 싸우게 되어, 때때로 나의 내면은 전쟁터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그러므로 영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서운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된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싸움을 싸우지 않아 쉽게 죄를 짓는다거나, 말씀에 순복하지도, 회개도 하지도 않는다면, 이들은 거짓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참 신자는 말씀 앞에서 분명히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엡 4:23-24는 성화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는데, 성화란 불경한 사람이 부단한 노력으로 점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화란 이미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가 이제 새사람이 되었으면, 그는 이제 훈계(계명, 명령)에 따라 계속 새사람으로 살도록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시오!“. 혹은, „계속해서 새사람을 입으시오!“ 이것이 성화의 명령입니다. 고름이 나는 얼굴에 화장하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 생명이 탄생하여야 비로소 성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새사람을 입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24절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새사람이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란 이곳에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품성과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본질이 서로 다르다면, 즉 내가 의롭게 되고,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거룩해지지 않다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아담을 창조하셨듯이, 우리를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거듭났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어느 정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믿고, 이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의롭고, 거룩하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매일 노력해야 함을 배웁니다. 만약 아직도 새 피조물이 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진실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윤리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저처럼 수십 년간 고생하여 겨우 진리를 깨달은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듣고 즉시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음 과부터는 많은 실제적인 훈계가 나오는데, 그 훈계대로 살기 위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잘 생각하면서 고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주신 기회일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서서 자신을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삶의 기초가 놓이게 되면,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이제부터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옛사람을 벗는 일을 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사람을 입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옛사람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