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격렬비열도
서력 西曆 18년.
졸본부여 출신의 고구려에서 이주해 온 소서노와 온조 모자 母子가 세운 ‘십제 十濟’가
이제 국호도 ‘백제 百濟’로 개칭하여 신장개업하였다.
한반도 중부의 서쪽, 아리수와 백강을 기반으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시기로,
해상활동도 활성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강에서 바다로 진출하며 활동 범위를 계속 넓히고 있었다.
우문청아 일행이 탄 범선이 남해의 다도해를 거쳐 서해 격렬비열도 남쪽 부근에 다다라 안면도와 태안 방향을
바라보니 수 척의 어선들이 아침 해무 海霧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마도 백제국의 어선들인 모양이다.
감히 가까이 다가가질 못한다.
난하에서 출항할 때 금성부에서 배웅차 파견 나온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산동대군의 장남,
김휘려 군사 軍師의 신신당부가 생각난 것이다.
해상을 항해할 때 주변국의 어선 漁船이나 수군을 피해 항해하라는 부탁이었다.
가능하면 멀리 돌아서 조용히 항해하라는 의미다.
도피자의 처지에서 괜히 서로 부딪쳐 사건을 야기 惹起시켜 분쟁이 일어나는 걸 최대화 억제하자는 것이다.
분명히 이 부근에서 사건이 발생했고 실종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힘이 약해 수사권 搜査權이 없으니 별 방법이 없다.
더구나 김휘려 군사의 당부 當付도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조용히 지나가기로 한다.
서쪽의 격렬비열도와 동쪽의 석도 石島사이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격렬비열도 동쪽에 있는 석도 石島 쪽에서 아침 햇살 사이로 차츰 옅어져 가는 해무 사이로
가느다란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시력 視力이 뛰어난 우문 청아가 얼핏 보았다.
석도는 본섬인 큰 섬과 그 남쪽에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격렬비열도 格列飛列島는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양새가
‘기러기가 열을 맞추어 날아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격렬비열도란 명칭이 붙었다.
육지 태안에서 서쪽으로 약 110리 거리에 있는 섬이다.
육지와 멀리 동떨어진 섬이긴 하나 제법 크고, 해발 약 100미터의 높이다
‘격렬비도’, ‘격비도’, ‘격비’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북 결렬비열도가 좌우로 서 격렬비열도와 동 격렬비열도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격식을 갖추어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오첨욱도 두 차례 이 부근 해상을 오갔으나, 석도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멀리서 관찰해 보아도 섬 주위에는 배가 보이 질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며 어부는 아닐 것이며, 난파 難破 당해 섬으로 올라간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석도 石島는 이름 그대로 돌로 이루어진 섬이긴 하나, 상당히 넓고 숲도 우거져 있다.
범선에서 작은 쪽배를 내려 오첨욱과 연락단 향도 嚮導 강기진이 섬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섬 주변이 매끄러운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니, 배를 섬에 대기가 어려워 섬 주위를
한 바퀴 배회 徘徊하고 있는 도중, 그때 두어 명이 겨우 탈 수 있는 허술하게 엮은 뗏목이
작은 섬에서 오첨욱의 쪽배를 향하여 오고 있었다.
쪽배 가까이 다가온 뗏목을 살펴보니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봉두난발 蓬頭亂髮에 낡고 해진 옷은 각설이보다 더 초췌한 모습이다.
그들 중 한 명을 유심히 바라보던 원화단 향도 강기진의 눈동자가 커진다.
“아니, 박수구 선배님 아닙니까?”
“어, 강군이군 반갑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사연이 길어 설명하자면 시간이 걸리니, 우선 본선 本船에 올라가 이야기하세”
그랬다.
봉두난발의 두 사내중 한 명은 여섯 달 전에 실종된 연락단원 중에
향도 嚮導의 임무를 띤 강기진의 선배 박수구였다.
아직 20대 초반인데 몰골은 비쩍 말라 피골이 상접 相接하여 노인처럼 보여진다.
추운 겨울철 고립된 섬에서 반 년 半年 동안 겪은 고초가 어떠하였는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박수구의 그간 지난 이야기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지난가을 노란 은행잎이 떨어질 무렵, 근오지에서 연락단원 30명을 태우고 출항한 범선은
다도해 多島海를 거쳐 안면도 앞 바다까지는 순조롭게 순항하였다.
그런데, 해무 海霧가 자욱한 새벽녘에 가시거리 可視距離가 짧은 관계로 동 격렬비열도와
석도 부근에서 고기잡이하던 어선과 충돌하였다.
범선 帆船에 부딪친 작은 어선이 전복 顚覆되자, 주위의 5~6척의 어선들이
갈고리를 범선에 던져 배가 운항하지 못하게 저지 沮止하였다.
그렇게 범선과 어선들이 실랑이를 벌이던 중 백제군의 깃발을 단 큰 군선 軍船이 두 척 나타나
큰 밧줄로 범선을 나포 拿捕하여 동쪽의 뭍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다급해진 단원중 물 자막질에 자신이 있는 몇몇 단원들은 범선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동서 東西로 나뉘어 인근의 섬으로 헤엄쳐 갔다는 것이다.
“항해 도중에 인근 국가의 수군과 마주치게 될 경우에는 무조건 피하라”는 상부의 명을 제대로 실천한 것이다.
다행히 해무가 짙은 탓에 가시거리 可視距離가 짧아, 도피자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박수구도 범선에서 탈출한 단원중의 한 명으로, 세 사람이 석도로 올라갔고,
나머지 몇몇은 반대쪽인 동 격열비열도 방향으로 헤엄쳐 갔다는 것이다.
석도에 올라간 세 명 중, 한 명은 지난달 영양실조 상태에서
고뿔에 걸려 치료도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도피자의 처지에서 불도 피우기 어려워 가끔,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로 불을 피워 물고기나
조개를 구워 먹으며 추위를 달랬으나, 몇 개월 동안 그렇게 생활하니 싸리나무도 귀해져서,
오늘처럼 해무가 짙은 날에는 마른 잡목으로 가끔 불을 피워, 해변에서 주운 깨어진 솥에
조개를 구워 먹거나 추위를 물리쳤다고 하였다.
키조개를 숟가락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충남 해안가에서는 '갱갈할매 숟가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키조개가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긴 삼각형 모양이 곡식을 탈곡 脫穀하고 바람을 일으켜 알찬 곡류를
고르는 키를 닮아 붙은 이름이라면, '갱갈 할매 숟가락'은 갯벌(갱)에서 할머니들이 작업하다 새참 먹을 때
'숟가락' 대신 키조개 껍데기를 사용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키조개가 그 모양을 본떠 붙인 이름이라면
'갱갈할매 숟가락'에는 바닷가 사람들의 애한 哀恨이 녹아있다.
오늘도 싸리나무가 아닌, 다른 마른나무로 불을 피운 것이 연기를 내어 다행히 범선에 포착 捕捉된 것이었다.
범선이 석도 가까이 다가오자 박수구는 배 모양을 보고, 바로 사로국의 범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뗏목으로 쪽배에 접근한 것이었다.
-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