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이스라엘 충돌마저 본격화하자,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를 외치며 이스라엘 등 해외로 떠난 러시아 각 분야 유명인사(셀럽)들의 동정이 현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곧잘 '배신자' 소리를 듣고, 귀국하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야 한다는 비판도 정치권에서 거론된다.
이스라엘로 피란 간 우크라이나인들의 귀국 문제는 좀 차원이 다른 것 같다. 한 사람이라도 더 데려오면 전장과 생산 현장의 인력 부족 현상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여력이 없다고 한다.
러-우크라 양국에는 모두 이스라엘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유대인)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동원령에 따라 뒤늦게 이스라엘로 향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인도 없지 않다. 전쟁을 피해 이스라엘로 가는 게 아니라, 총을 들기 위해 떠난 경우다. 최근에는 주러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송환 업무'(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국 지원 업무)를 담당해온 영사가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러시아에서 송환 업무는 일시 중단됐다.
코르니추크 주이스라엘 우크라 대사/사진출처:스트라나.ua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전화에 휩쓸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체류중인 우크라이나인 337명이 현지 탈출을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에 SOS를 치고 있지만, 방법이 없다고 예브게니 코르니추크 주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대사가 23일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에는 약 5,000명의 우크라이나 시민(이중 국적자 포함)이 거주하고 있는데, 가자지구 체류 337명이 대피를 원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대사관은 현재 아무 것도 지원할 수 없으며, 이집트 국경의 '라파 검문소'가 외국인 탈출을 위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현장에서는 수십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부상자들도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인들을 태운 임시 항공편이 이미 두차례 이스라엘에서 루마니아로 떠났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텔아비브 공항을 떠나는 우크라이나인/사진출처:페이스북@UkraineInIsrael
이스라엘 거주 러시아인들의 상황이 좀 나은 것으로 보인다. 귀국을 원하는 사람들은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다. 문제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항공비다. 이스라엘 내 러시아 커뮤니티에서 러시아 정부가 나서 귀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이유다.
하지만, 러시아 분위기가 우크라이나와는 다르다. 보수세력 일각에서는 "떠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도와달라고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 지탄받는 도피 러시아 셀럽들
현지 보수 성향의 매체 '차르그라드' 지난 22일 한 러시아-이스라엘 이중국적자가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러시아 정부가 이스라엘에 있는 자국민 대피에 서두르지 않는다'는 글을 소개한 뒤 "러시아를 떠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스라엘로 도망친 사람은 반역자"라며 "진정한 의미의 이주자와 반역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의 지탄을 가장 많이 받는 인사들은 역시 유명인사(셀럽)들이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단골 인사는 푸틴 대통령이 각별히 챙긴 것으로 알려진 아나톨리 추바이스 전 루스나노 회장과 '백만송이 장미'로 널리 알려진 가수 알라 푸가초바다.
옐친 대통령 시절, '민영화의 황제'라고 불리며 시장경제 도입을 주도했던 추바이스 전 회장은 푸틴 대통령 시절에도 존재감을 잃지 않고 실세 중의 한명으로 통했다. 그가 해외로 떠난 뒤, 푸틴 대통령은 애증(愛憎)이 뒤섞인 감정을 드러냈다.
올해 74세의 푸가초바는 '러시아판 이미자'다. 생존하는 최고의 국민가수다. 연하의 남편인 코미디언 막심 갈킨도 잘 나가는 엔터테이너인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를 앞장서 외친 덕분에 푸가초바 가족은 늘 언론의 추적을 받는다.
이스라엘 전쟁 직후 텔아비브 공항에서 줄을 서 있는 추바이스 전회장(위)와 구호 물품을 배포하는 모습
추바이스 전 회장은 지난 15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공격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인도적 물품을 구입하고 배포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하마스-이스라엘 충돌 직후인 지난 9일 텔아비브 공항 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추바이스 부부는 두바이로 떠났다가 바로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그는 사업 목적으로 두바이를 잠깐 갔다왔다고 했다. 두바이 체류 사진도 인터넷에 올라왔다.
추바이스 전 회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20년까지 러시아 첨단기술센터인 '나노기술공사'(이후 루스나노)를 이끈 뒤, 2020년 12월 대(對)국제기구 러시아 대통령 특별대표직을 맡았다. 그러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한달 쯤 뒤(지난해 3월 23일) 대통령 특별대표직을 내던지고 도망가듯(?) 러시아를 떠났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추바이스(전 회장)가 왜 도망쳤는지 모르겠다"며 당혹함'을 표시했다. "추바이스 전 회장이 '루스나노'를 그만둔 뒤, '루스나노'에 '재정적 구멍'(자금 횡령 의혹/편집자)이 확인됐고, 형사 문제를 우려해 전임 이사회 의장에게 같이 출국하자고 권했다"고도 했다. '루스나노'는 현재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
그는 또 "인터넷에서 '아나톨리 보리소비치 추바이스'(Анатолий Борисович Чубайс)가 아니라, '마샤 이즈라일로비치'(Маша Израилевич)라는 이름으로 된 사진들을 보았다"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 이스라엘, 키프로스에서 호화생활하는 국민가수 푸가초바
알라 푸가초바는 러시아에서 번 돈으로 이스라엘과 키프로스에 부동산을 구입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이스라엘에서, 또 이스라엘 전쟁을 피해 키프로스에서 '호화 생활'을 하는 것으로 러시아 언론에 보도됐다. 러시아에 있는 주택은 임대를 준 것으로 전해졌다.
푸가초바는 지난해 봄 러시아에서 '외국 에이전트'(외국 대리인)로 지정된 남편 갈킨의 뒤를 따라 일찌감치 아이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자, 몇 개월 후(지난해 9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난 여기 있다"며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해 9월 모스크바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푸가초바/사진출처:인스타그램
현지 매체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에 따르면 푸카초바는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나, 하마스-이스라엘 충돌로 쫒기듯이 최근 키프로스로 떠났다. 그녀는 지난 2017년 키프로스 해변에 있는 빌라를 구입했고, 동시에 투자에 의한 시민권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떠나기 전까지 가족들과 방공호를 전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키프로스행은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남편 갈킨은 팔레스타인 무력정파 하마스의 공격 이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영상을 올렸으나, 이미 키프로스로 떠난 상태다. 콤스몰스카야 프라브다는 24일 "갈킨이 충돌 초기에는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가족들과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며칠 후 전쟁을 피해 키프로스로 도망쳤다"며 "키프로스 리마솔에 있는 호화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리마솔에서 콘서트를 하기 위해 키프로스로 간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가족들과 키프로스에 머물 것이라고 이 매체는 전망했다. 또 그의 가족(푸가초바)은 지중해 연안의 호화 펜트하우스를 1천만 유로에 구입했다며 내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푸가초바 부부가 구입했다는 키프로스의 고급 아파트 건물/사진출처:SNS
◇ 자신있게 해외로 나간 셀럽들은 지금?
객관적으로 추바이스 전회장이나 푸가초파 부부의 해외 생활은 나쁜 편이 아니다. 러시아를 떠나는 바람에 고달파진 셀럽들이 적지 않다.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자신의 인기를 믿고 해외로 떠났으나,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인기 연예인 3명을 소개했다.
올해 66세의 인기 배우인 드리트리 나자예프(Дмитрий Назаров)는 역시 연예인인 아내와 함께 프랑스 칸으로 갔다. 지난해 3월 특수 군사작전을 비판하는 노래와 시로,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해고됐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바다(지중해) 옆에 사둔 아파트에 들어가면서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갈 것으로 기대했다.
러시아에서 하루 공연으로 15만~20만 루블을 벌었던 그가 해외로 나간 뒤 공연 무대를 찾아 이스라엘의 작은 콘서트홀을 전전해야 했다. 그나마도 티켓 판매가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거의 연금(6만 루블)에만 의존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니, 현실은 가혹하다.
지난해 봄 미국으로 떠난 코미디언 알렉산드르 네즐로빈(Александр Незлобин)은 '웃음으로 미국 정복'을 꿈꿨다. 하지만, 일년에 두 번씩 미국과 다른 나라의 작은 클럽에서 러시아어권 관객을 웃기는 데 만족해야 한다. 모스크바 등 러시아에서는 2천명을 수용하는 큰 무대도 좁다고 했지만, 이제는 200명 수용 무대로도 충분하다. 공연이 없는 나머지 시간에는 실리콘 밸리 산호세에서 우버(Uber) 택시를 몬다. 그의 딸로부터 “모스크바에서는 모든 게 풍족했는데, 왜 여기 와서 없이 사느냐"는 지청구를 듣곤 한다.
미국으로 간 코미디언 네즐로빈/사진출처:SNS
라트비아로 이주한 인기 여배우 하마토바/사진출처:KP.ru
특수 군사작전 직후 발트해 라트비아로 이주한 48세의 인기 여배우 출판 하마토바(48, Чулпан Хаматова)는 세 딸과 함께 거주 비자와 함께 주택을 받았다. 하지만, 라트비아에서는 대작 영화나 TV 시리즈를 제작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돈 되는' 일거리가 별로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뉴리가 극장 무대에 서고, 가을과 겨울에는 유럽 무대에서 시 낭송을 할 예정이다. 공연 한번에 약 40만 루블 정도 받지만, 임대료와 피아노 반주자, 커미션 등을 제외하면 손에 쥐는 게 그리 많지 않다.
러시아에서는 매우 바쁜 여배우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면 '고르바초프' 연극(спектакль «Горбачев») 출연시, 한번 공연에 26만 루블을 받았다. 그같은 작품이나 무대가 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이제는 흘러간 과거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