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에세이
[정수자칼럼 2023] 봄을 다시 새롭게 마중하며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작성일 2023-02-14조회수 78
마중은 나가서 맞이하는 일. 오는 존재에 대한 마음이 담긴 말이다. 존재가 무엇이든, 내 쪽으로 오는 걸음에 대한 예의를 담고 있어서 더 아름다운 표현이다. 내게 오는 존재라면 반갑게 맞이하고 성심껏 대접해야 하는 것. ‘손’에 ‘님’을 늘 붙여 썼듯, 다가오는 존재를 귀하게 맞았던 환대의 자세다.
마중의 마음은 버선발로 나가 맞는다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기다림과 반가움으로 뛰어나가 맞이하는 모습의 극대화다. 어느 누구보다 반가운 손님 같은 봄의 방문도 있다. 봄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환대 속에 온다. 겨울 추위가 길고 혹독할수록 봄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지고 간절한 까닭이다. 어서 오라고 도처에서 봄 부르는 마음의 소리에서 공기마저 환하게 물이 든다. 온 세상이 새로운 싹과 새로운 꽃을 피우듯, 저마다의 봄을 맞이할 봄의 일들을 채비하는 것이다.
그러니 봄마중에는 헛치레 같은 게 있을 수 없다. 준비가 번다할수록 봄은 더 큰 웃음으로 찾아온다. 예전에는 장 담그기, 문풍지 뜯어내기 등을 하면서 새봄의 기운을 들였지만, 요즘은 두꺼운 겨울옷 처리부터 시작이다. 3년만의 마스크 없는 봄(부분해제지만)이라 너나없이 얼굴에 더 신경 쓰이는 봄맞이 준비도 설왕설래 분주하다. 나 자신의 새뜻한 기분 돋우기도 필요하지만 주변에 대한 예의로라도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싶어지는 게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일색에서 환한 다색으로 바뀌는 거리 풍경이야말로 일상에서 덩달아 기운생동 즐거운 봄마중이다.
봄에는 그처럼 마중의 일이 크게 느껴진다. 여느 계절보다 마중이며 시작할 일이 많은 까닭이겠다. 농사 시작부터 새 학교 입학에 한 학년씩 올라가기 등 모두 만만찮은 준비가 필요한 큰일이다. 그런 봄의 특성이 그에 따른 준비를 채근하고 마중 또한 크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입학 같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은 삶의 중요한 의식이기도 하다. 성년 의식을 치러 왔듯, 조금씩 성장한 과정의 압축이 봄이면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릇 생명 탄생도 지상의 크나큰 일이지만, 개개인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봄을 열게 하는 동력이니 말이다.
봄 앞에서 다시 보는 마중은 환대의 마음과 자세도 일깨운다. ‘타자를 기꺼이 맞아들임’의 의미로 다시 쓰이는 환대(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너스)는 우리 문학에도 깊이 들어온 개념이다. 단순히 말하면, 타자의 말에 응답하고 타자를 높여 환대하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봄마중에 환대를 연계하는 것도 생명을 받아들이고 기르는 응답의 행위가 서로 깊이 닿는 까닭이다. 그런 자세라면 주변의 약자에 귀 기울이며 더불어 살 만한 세상 만드는 데도 큰 힘을 보탤 것이다. 삶의 봄은 물론 해마다 찾아오는 생명들의 꽃핌에 대한 봄마중으로도 더없이 훈훈한 일이겠다.
마중, 돌아볼수록 마음의 실천도 다양한 갖춤이다. 그 속에서 말을 마중하는 마음도 지긋이 당겨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에서 마중의 말씨가 다시 뵈는 것이다. 내가 먼저 좋은 말을 해야 상대도 좋은 말로 마중을 나오는 것. 그렇게 보면 말마중도 일상의 지루한 반복에 새로운 색과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봄을 밝히는 말마중은 아무리 많아도 좋은 까닭이다. 시 또한 마중을 못하면 스쳐 지나고 마는데, 마음의 준비가 돼있어야 무엇이든 내 시로 거듭난다. 시적 마중의 상태를 유지해야 뭔가 와서 시로 고이고 태어나는 것이다.
봄을 다시 귀하게 맞는 마음과 자세를 갖춰본다. 주변을 정갈히 하고 새로운 차림의 봄손님을 기다린다. 이 땅의 많은 생명들과 함께 꽃이 잘 피는 봄의 큰판을 바란다. 아직 멀리서 머뭇머뭇 오는 봄, 우리가 크게 부르면 더 환하게 달려올 것이다. 마중물이 펌프 저 아래 잠든 물을 깨워 끌어올리듯.
글쓴이
주요약력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시인.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시집
『파도의 일과』, 『그을린 입술』, 『비의 후문』,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 등.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 외에 공저 『한국 현대 시인론』, 『올해의 좋은 시조』 등.
수상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