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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중식)→ 김범우묘→ 명례성지→ 뮤모텔
58Km 21.1Km 47.2Km
42. 김범우묘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의 묘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레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근거하여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가족에게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호구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송기인 신부와 김범우의 후손들,
그리고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씨 등은
몇 년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지역을 답사하고 수소문한 끝에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손임덕, 당시 78세, 집안 대대로 묘지를 관리)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에 본격적인 묘 발굴을 시작하여 파묘한 결과
관 자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돌 3개와 치아가 발견되었다.
이 돌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와 같은 경우로
성물이 귀했던 박해시대에는 성물 대신
십자가, 나무묵주, 돌 등을 관 속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토된 유물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이곳을 김범우의 묘로 단정했고,
김범우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김범우의 묘가 있는 밀양시는 중부 경남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넓고 기름진 평야와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사명대사, 휴정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특히 재약산(858m)의 표충사와 만어산(670m)의 만어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찰(古刹)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 어려워지자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성당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을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명례방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개최하다가 추조(형조) 관리들에게 발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명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조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와 함께 끌려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모두 소위 양반계층에 속한 인물들인지라 즉시 풀려 나왔지만
김범우는 교회 집회 장소의 집주인일 뿐 아니라
중인(中人) 신분이었기 때문에 멀리 밀양으로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처연한 신세가 되어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형조에서 받은 혹독한 형벌의 여독으로
2년 정도 고생하다가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세상을 떠났다.
김범우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읍 굴암리(掘岩里, 현 용전리), 단장면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그 형벌의 여독이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 김범우는
‘장하치명’(杖下致命)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의 명동 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기점이 된
명례방 집회가 이루어졌던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여 건립된 성당이기도 하다.
1989년 김범우의 묘를 발굴한 이후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였다.
묘역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와 1천여 평의 잔디밭을 조성하고,
도로변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그리고 묘역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 천주교회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묘역을 말끔히 단장한 후
2005년 9월 14일 정명조 주교의 주례로 묘역 준공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2010년 11월 순례객들을 위한 김범우 순교자 기념
성모동굴성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여 2011년 9월 20일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묘역 주차장 부지 한편에 세워진 성모동굴성당과 사제관의 완공으로
순례객들은 날씨와 상관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부산교구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장독으로 사망한
김범우의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등 시복시성 운동을 벌이고 있다.
43. 명례성지
낙동강 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명례 성지는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일찍이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곳이다.
이곳은 네 가지 문화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가 출생한 곳이다.
둘째, 영남 지방의 넷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셋째, 명례 본당의 초대 본당 신부이자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이자 한국에서 서품된(1896년) 첫 사제인
강성삼 신부의 사목지이며 돌아가신 곳이다.
1885년 10월에 세워진 원주의 부엉골 신학교는
1887년 3월 서울의 용산으로 이전되면서
교명도 예수성심신학교로 바뀌었다.
당시의 신학생들 중에는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학생들이 많았으며,
사진 맨 뒷줄의 외국인 신부들은 신학교 교수였던 빌렘 신부(왼쪽)와
베르모렐(J.Vermorel, 張若瑟) 신부이며
강성삼 신부님은 맨 뒷줄 왼쪽에서 3번째이다.
왼쪽부터 홍병철, 이종국, 이내수, 강성삼 신부, 김문옥, 김승연,
한기근, 강도영 신부, 김원영, 김성학, 정규하 신부.
이들은 모두 페낭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884년부터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사제수업을 계속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6년 4월 26일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세 명의 신학생들은
한국에서 첫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같은 날 한기근, 김성학, 이내수(시종품 포함)는 차부제품,
김원영(강경품 포함), 홍병철, 김승연, 김문옥은 수문품,
이종국은 삭발례를 받았다.
위의 사진은 사제품을 받기 전에 찍은 것으로
아래 글씨는 그 이후에 인물 확인을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넷째, 2011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된
성전 건물의 역사적 의미이다.
1938년 첫 성전을 축소 복원한 내부는 남녀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으며
벽을 향한 제대 및 그 위에 모셔진 십자가와 장미의 성모님은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신심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
(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살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면서 살았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려면 명례 나루터에서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고,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도 정착해서 살았는데,
신석복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당시 신자가 아니었지만 훗날 모두 입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은
그가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다.
그리고 그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돌아오는 길목에서 며칠을 기다려
김해 한림면 가산리 길에서 체포하여 즉시 밀양으로 압송했다.
이때가 신석복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그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대구로 압송되는
신석복을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에게 “일 푼전(分錢)이라도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까지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결국 대구로 압송된 신석복은 경상감영에서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고,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관장으로부터 혹형을 받았다.
9일 동안 감옥에 있으며 세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지만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때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한 가지 불행한 일은 순교자의 행적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그의 이름 또한 단순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된데 기인한다.
후손들이 이를 바로잡아 주길 청해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밝혀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고,
후손으로는 아들 이냐시오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그 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1935년 수품, 1948년 선종)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
지금도 순교자의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신석복 마르코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절차를 밟고 있다.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을 성역화하기 위해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명례는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살던 교우촌으로
1897년 경상도에서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
(1866-1903년)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를 이어 1896년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로,
줄곧 이곳에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다.
강성삼 신부는 1898년 현재 부지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고,
1926년 주임으로 부임한 권영조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짓고
1928년에 축복식을 가졌다.
하지만 1935년 태풍으로 성당이 전파되었고,
1938년 옛 성당이 무너진 자리에 현 성당을 축소하여 복원했다.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성당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끼게 해 준다.
명례 성당은 그 후 본당 소재지가 이전함에 따라 공소가 되었다가
한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성당으로 남아 있었다.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는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방문한 신자들에게
명례의 배경과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그에 앞서 2007년 4월 매입한 입구의 한옥을 보수해 그해 8월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했다.
또 2010년 개인소유의 축사로 변해버린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와
주변 일대를 매입하고 8월에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명례 성당과 그 일대를 경상남도 문화재로 신청하여
2011년 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1월 7일부터는 명례 성지 담당신부가 부임하여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신석복 순교자 생가 터에 있던 축사를 이전 철거한 뒤
6월 10일 사제관과 생가 터 축복식을 가졌다.
명례 성지는 생가 터에 순교자 2018년 신석복 기념성당을 봉헌하고
순교자 탑에 순교자를 모셨다.
진례성당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 묘지를 찾기가 어려워 문의하러 진례성당에 들렀다.
일몰이 가까운 시각에 주차장옆에서 산책을 하고 계셔서 신부님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시는데 반기는 표정이 아니셨다.
묻지도 않았는데 빅토리노 순교자 묘소 순례도장은 묘소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약도를 주시면서 찾아가기 힘들다며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러면서 성지순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
참다운 신앙생활은 성지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일상생활에서
임마누엘 예수님과 함께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순례책자를 만든 것 자체가 잘 못된 것이며
그런 결과 천주교의 현실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부님의 의견에 공감하는 부분도 일부 있지만 너무 한 면만 보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신부님에게 조금 맞장구를 쳐드렸다.
성지개발에 있어 너무 편의시설 위주로 생각하다보니 옛 그 모습을 느끼기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 빅토리노 순교자묘는 옛날 그대로라고 강조하셨다.
성당 내부는 잠겨있어 보지 못하고 묘소는 내일 방문키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이전에는 순례도장을 성당에 비치해 놓았는데
순례도장을 찍은 후 묘소를 방문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순례도장을 묘소에 두게 되었는데 지금도 도장을 찍으러
성당에 드나드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것은 아닌지~
다음 날 묘를 찾아가 참배하고 보니 우체통처럼 만든 박스안에
도장이 2개 있었다. 성지도장과 진례성당 도장이 함께.
어렵게 찾아왔으니 성당도장도 찍으라는 것인가?
하며 아내와 서로 마주보며 잠시 웃었다.
뮤모텔(숙소)
순례길에 아내의 1년 후배가 운영하는 모텔을 방문했다.
순례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기회라 선택했다.
해가 지고난 후 도착해보니 주위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잠시 라스베가스나 영업사원 시절 부산 남포동에 온 것 같았다.
너무 의외의 모습에 요즈음도 이런 곳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후배를 만나 방을 안내받고 짐을 푼 후
후배가 소개해 준 음식점(어시장)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부산에서 살던 때가 생각나서 꼼장어 구이, 멍게, 조개탕을 시키자
사장님이 굴은 서비스로 주었다.
양이 너무 많아 옆 테이블에서 먹고있던 40대 자매님 4분에게
손도 대지않은 조개탕을 아내가 떠서 건네자 너무 고마워했다.
직장맘 들로서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있는 중이라 했다.
아내는 후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먼저 나갔고
나는 식사를 마저하고 계산한 후 거리구경을 했다.
조금 후 아내가 계산하려고 하니 지갑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후 둘이서 차량이랑 숙소에 벗어놓은 옷가지들에서
지갑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스승과 점심식사 후 계산한 이후에는 지갑을 꺼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점심식사한 음식점에 전화했으나 습득한 것이 없다고 한다.
바로 카드사에 정지 신청을 해놓고 배를 탈 때 필요한
신분확인을 위한 서류를 내일 준비하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오는 방과 복도의 조명이 화려해서
내가 젊은 사람으로 착각을 했다.
오늘이 다사다난하고 제일 힘든 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승도 만나고 후배도 만나고 기대하지 않은
여러가지 경험을 한 은총의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육신이 너무나 피곤해서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내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카운터로 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