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어나 비추어라] 근현대 순교자들
교안 · 전쟁의 파도에 스러진 20세기 순교자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100년의 박해가 끝났다. 1888년에 윤봉문(요셉)이 처형된 적이 있지만, 1886년 이후 정부의 공식적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신앙 때문에 희생된 신자들이 있다. 교안(敎案)과 6ㆍ25전쟁 때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신자들이 그들이다.
전쟁과 공산군의 탄압
교안은 한불조약 이후 선교 과정에서 발생한 선교사와 지방관리, 일반 주민과 신자들 사이의 충돌을 말한다. 교안은 1886년부터 1906년 사이에 300건 이상 발생했는데, 1901년 제주교안 때에는 신재순(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해 300명 이상의 신자가 피살됐다.
이어 1950년 6ㆍ25전쟁 전후로 많은 천주교인이 희생됐다. 가장 먼저 탄압을 받은 곳이 덕원면속구와 함흥교구다. 1949년 5월 9일 사우어 주교와 3명의 신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6ㆍ25전쟁 직전까지 모든 성직자가 체포됐다. 평양교구에서도 1949년 5월 14일 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체포돼 구금되거나 행방불명됐다.
6ㆍ25전쟁 직전까지 자행된 탄압은 공산군의 남침과 함께 남한 지역으로 확대됐다. 먼저 강원도에서는 7월 2일부터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를 비롯해 캐나반(춘천본당)ㆍ크로스비(홍천본당) 신부가 체포됐고, 레일리(묵호본당)ㆍ매긴(삼척본당) 신부가 7월에 체포돼 피살됐다. 서울에서는 교황 사절 번 주교와 비서 부드 신부를 비롯해 공베르 형제 신부, 비에모ㆍ유영근 신부 등이 체포됐다.
7월 말부터는 충청도에서 폴리 신부(천안본당)를 비롯해 외국인 신부 9명과 강만수 신부가 체포됐고, 그중 7명이 9월 23일과 26일 사이에 대전에서 피살됐다. 목포에서도 광주교구장 브렌난 몬시뇰을 비롯해 3명의 외국인 신부가 체포됐는데, 이들도 대전에서 충청도 지역 성직자들과 함께 살해됐다.
이보다 앞서 9월 중순에는 서울 소신학교에서 이재현ㆍ백남창ㆍ정진구 신부가 체포됐고, 김한수(경향잡지사 총무)ㆍ정남규(명동본당 총회장)ㆍ조종국(명동본당 청년회 회장)ㆍ김정희(혜화동본당 회장)ㆍ송경섭(명동본당 청년회 부회장) 등 평신도들도 집에서 체포된 후 행방불명됐다.
한편 공산군은 7월 이후 남한 각 처에 수감돼 있던 신자들을 강제로 북송시켰다. 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서울에 잡혀 있다가 7월에 평양으로 이송된 후 9월부터 1951년 3월까지 만포, 고산, 초산,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수용소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들은 엄동설한의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180㎞를 걸어야 했고, 그 여파로 비에모 신부와 공베르 형제 신부가 중강진에서 병사했다.
옥사덕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와 수도자들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만포수용소, 관문리수용소를 거쳐 다시 옥사덕수용소로 오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등 여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목숨을 잃었다.
강제 북송과 함께 공산군은 1950년 10월에 퇴각하면서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살해했는데, 이때 김봉식(이천본당)ㆍ유재옥(겸이포본당)ㆍ이광재(양양본당)ㆍ서기창(송화본당)ㆍ양덕환(재령본당)ㆍ전덕표(사리원본당) 신부, 매화동본당의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 원산의 박빈숙 수녀 등이 피살됐다. 이에 앞서 7월에는 황해도의 이순성(정봉본당)ㆍ이여구(매화동본당) 신부가 체포된 후 행방불명됐다.
20세기 순교자들 시복 작업 진행
이처럼 근현대에 와서도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신자가 많다. 교회가 이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부터다. 당시 세계 각국 교회는 교황청 지침에 따라 20세기 들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조사 작업을 시행했다. 한국교회 역시 1998년 12월 총 215명의 순교자 명단을 확정해 교황청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9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하기로 하고, 각 교구에 조사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제출된 자료를 근거로 선정 작업을 거친 결과, 2013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됐다. 81위는 대체로 해방 이후 공산 치하와 6ㆍ25전쟁 와중에 희생된 분들이다. 그중에는 중국 애국회를 거부하고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5년 동안 중국에서 징역살이한 김선영 신부와 1901년 제주교안 당시 희생된 신재순도 포함돼 있다.
한편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시복을 추진하는 81위와는 별도로 베네딕도회에서도 2007년부터 수도회 소속으로 6ㆍ25전쟁 전후에 희생된 사우어 주교, 김치호 신부 등 ‘신 보니파시오와 김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 38위의 시복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어나 비추어라] 교황 방한과 124위 시복의 의미
순교자들의 승리와 영광의 날
한국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식이 1925년과 1968년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각각 있었다.
1925년 7월 5일 오전 10시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열렸다. 이때 시복식에 참석한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승리와 영광의 날이다. 하느님께 찬미!”라고 기록하면서, “한 고위 성직자에 의해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의 시복 소칙서의 낭독이 있었고, 이어 (순교자들의) 영광이 드러났다. 그것은 감탄이었다.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오전 10시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열렸다. 이날 오후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24위의 한국 순교자는 영웅 정신과 굳은 신앙의 모범”이라고 극찬하고, “유럽 신자들은 한국 순교사를 연구하여 한국 천주교의 훌륭한 표양을 본받으라”고 촉구하시면서 “오! 꼬레아… 피로써 신앙을 기록한 순교자들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진리를 선포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한 이 신앙이야말로 이제로부터 영원무궁할 초자연적 새 생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103위 성인 중의 한 분인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신유박해 순교자 황일광(시몬)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면서 “교황께서 그를 제대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이다”고 하였다. 천상에 계시는 주교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세 번째 시복식은 오는 8월 16일 오전 10시 직접 방한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집전하신다.
2005년 이후 시복식은 교황이 아닌 시성성 장관 등이 거행해왔다. “시복식은 언제나 교황 행위이지만, 통상적으로 교황을 대리해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거행하게 될 것”이라는 교황청 시성성의 2005년 9월 23일 자 ‘시복식의 새로운 절차에 관한 공지’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2008년 11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린 일본 순교자 188위 시복식은 전 시성성 장관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추기경이 거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교황께서 직접 한국을 찾아 시복식을 집전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배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순교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과 기쁨이 배 있는 박해 장소이자 역사의 공간인 광화문에서 교황께서 직접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하는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따라서 그 의미가 더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순교자들이 시복되는 이날은 주교님들의 말씀처럼 승리와 영광의 날이요, 행복한 날이다. 이날 두 번의 시복식 때 걸렸던 순교자들의 초상화처럼 124위 복자들을 한 폭에 담은 걸개그림을 시복미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얼굴과 다르지 않은 복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의 삶을 기억해야 하고, 그들이 만났던 하느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새로운 평화와 화해
이웃과 기쁨 · 희망 · 슬픔 함께하며 평화 나눠야
- 그리스도의 평화는 편안함 속에서가 아니라 고통과 갈등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나눌 때 맛볼 수 있다. 사진은 2012년 여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의 바람 순례에서 청소년들이 참회와 속죄의 성당 앞에서 평화의 기수가 될 것을 다짐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귀한 당신!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추구를 통해 날마다 조금씩 이룩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평화 증진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 때에만 꽃필 수 있다. 분쟁과 폭력을 막으려면, 평화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가치로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그럴 때에 평화는 가정과 또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로 확산하고 결국 정치 공동체 전체의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495항).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외치며 교회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평화를 간직하고 유지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교회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시어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가르치신 예수님 가르침의 결정체다. 그 평화는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평화이며, 동료 인간과의 친교를 이루는 원천이다.
그렇게 간직해야 했던 그리스도의 평화는 때로는 세상에서의 실질적인 손해를 감수하게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평화를 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평화는 그렇게 십자가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평화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세상의 평화가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이야기한다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고통 중에서도 평화였다. 고통의 십자가를 외면하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평화인 것이다. 그 평화를 간직하고 살면서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자들 역시 똑같은 고난을 받아 안았다.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맹수의 입에서 찢겨 씹히는 먹이가 됐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그랬다. 1802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황일광 시몬은 그 신분이 백정이었다. 순교자는 입교하고 난 후, 다른 교인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해주는 것을 겪고는 이 자리가 바로 천당이요, 죽어서 내세에 천당에 또 가게 되니 천당은 두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조선 교회가 초기에 박해를 심하게 받은 것이다.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평화를 사는 것이기에 천하다고 여겼던 신분의 사람에게는 천당을 맛보게 했고 세상은 이런 교회가 당시의 풍습을 흐린다는 이유로 박해한 것이다.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평화의 자리가 초대교회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한반도는 지금 갈등의 극대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커다란 두 개의 집단이 갈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역사 노동 가정 등 갈등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단순히 몇 가지 문제를 손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이와 같은 갈등 상황이라면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 어떤 당이 국정의 주도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난감한 지경인데 오히려 정치세력 등은 갈등을 부추기고 그로부터 나오는 반사이익에 기대어 위기를 모면하는 형편이다. 언론 또한 중재와 화해로 이끌기는커녕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 데 전전긍긍하고 있다. 종교계 역시 이 때문에 휘말려 들어가거나 어떤 피해를 보지나 않을까 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해법 없이 갈등의 국면이 날카로워지기만 한다면 피해 당사자는 당연히 약자가 되고 만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쪽이 결국은 이기고 힘없는 이들은 밀려나고 또 밀려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숨은, 고통은 더해만 간다. 지금은 그 어떤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서로를 인간으로 봐주는 따뜻한 눈빛도 나누지 못하는데 그 어떤 제도가 효과를 낼 수 있겠는가?
예비신자를 모집하는 어느 본당 현수막이 기억이 난다. “천주교회는 ‘귀한 당신’을 기다립니다!” 여기에 교회 역할이 있다. 사람을 귀하게 보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중재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전문가 양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미 교회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고 있다. 이렇게 위로의 자리를 교회의 이름으로 만들고 열과 성을 다해 다가간다면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아니 몰라주면 어떤가?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커다란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그 평화는 안전하고 편안함 속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사랑 가득 찬 불가마 속에서, 이웃들의 고통과 슬픔의 현장에서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 깊숙한 곳에 함께하면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슴 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갈등도 해소될 것이며, 우리의 평화를 조금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20일, 제공=교황방한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
[일어나 비추어라] 교황 환영사 준비하는 권길중 한국평협 회장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권길중(바오로) 한국평협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출장을 떠나면 돌아오실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떤 착한 일을 하면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기뻐하실까’를 고민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하고, 집안일을 돕기도 했다. 그동안 했던 착한 일을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칭찬을 해주며 선물꾸러미를 풀어놓았다.
8월 16일 충북 음성 꽃동네 사랑의 영성원에서 열리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평신도 대표와의 만남’에서 한국 평신도를 대표해 교황에게 환영 인사를 하는 권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교황님을 기다리고 있다”며 “교황님께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으시면 교황님을 기쁘게 해드릴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신도 나아갈 방향 모색
권 회장은 “교황님께 나침반 바늘을 맞추고, 교황님을 맞을 준비를 하자”면서 신자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 번째는 「복음의 기쁨」을 읽고 교황의 생각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교황이 하느님 뜰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교황이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와 시복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만큼 청소년ㆍ청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자들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자는 것이다.
지난 6월 「복음의 기쁨」 특강을 마련해 많은 신자들의 참여를 이끌었던 평협은 방한이 끝난 후에도 교황 관련 교육을 마련해 ‘교황 방한 효과’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9월부터 서울대교구 지구별로 「복음의 기쁨」 특강을 다시 시작할 예정입니다. 또 교황님께서 방한 기간 동안 한국교회에 전하실 메시지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신자들에게 자세히 알려 한국교회 평신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것입니다. 캠페인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최근 몇 년 동안 위기 징후를 보이고 있다. 복음화율은 정체돼 있고, 어르신 신자는 급증하고 있다. 반면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 신자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청년 신자들의 교회 외면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성인 영세자 수가 18년 만에 처음으로 10만 명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한국교회 위기 극복의 계기로
권 회장은 “위기인 것을 알아차릴 때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데 한국교회는 아직 제대로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염려된다”면서 “이번 교황 방한이 여러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권 회장은 이어 “지금 유럽에서는 교회를 멀리하던 젊은이들이 교황의 말과 행동을 보고 다시 교회를 찾는 ‘프란치스코 효과’가 일어나고 있다”면서 “교황 방한을 계기로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다시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어나 비추어라] 시대적 요청으로서의 새로운 복음화
교회 모든 구조를 선교 지향으로 쇄신해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3월 9일 제19차 라틴아메리카 주교 총회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사명은 재복음화가 아니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사명입니다. 곧 그 열정과 방식, 그 표현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그는 또 1988년에 반포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2천년대의 ‘새로운 복음화’의 때가 왔다”고 했고, 이어 1990년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에서는 “현시점이 바로 ‘새로운 복음화’에 투신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새로운 복음화’는 복음을 일방적으로 전하기보다는 다른 종교나 문화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찾아내고 구원을 위한 인류의 공동선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나아가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와 연대, 정의와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 기초하는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인간생활 전반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복음화는 시대적 요청이다. 새로운 복음화를 정의하자면, 시대 변화를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이고, 담대한 행동 양식이며,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새로운 상황들을 읽고 해석하는 법을 아는 능력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걸쳐 있는 사회 문화적 상황들은 인간성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때로는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의제 개요」에서는 복음화를 위협하는 현대 사회의 시대적 도전들을 크게 여섯 분야로 나눠 숙고하길 제안했다.
만연한 세속주의가 그 첫 번째다. 세속주의는 반(反)그리스도교적이고 반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지만 한층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점령하여 하느님이 배제된 사고방식을 부추긴다.
두 번째로 언급된 분야는 도시, 국가, 대륙별 민족의 짜임새를 바꿔 놓고 있는 대규모 이주 현상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 전통을 포함한 삶의 위대한 전통, 역사 인식과 개인의 정체성 인식에 객관적으로 도움을 주는 그 역할이 크게 줄어들고 이른바 퇴폐현상이 고조되고 있다.
세 번째로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컴퓨터 혁명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도전이다. 미디어와 디지털 문화는 그 자체로 많은 혜택도 가져다주지만, 자기중심주의와 개인의 필요에만 집중하고, 관계와 사회적 유대가 지닌 감정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경험과 성찰, 사고의 객관적 가치들을 상실케 하는 내재적 위험도 지니고 있다.
또 네 번째 당면 과제는 경제적 위기, 다섯 번째는 과학기술의 도전, 여섯 번째는 시민 생활과 정치 분야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청되는 새로운 복음화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선교 명령(마르 16,15 참조)은 분명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현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복음의 기쁨」 11항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포의 핵심과 본질은 언제나 같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복음(묵시 14,6)이시며,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으로서, 새로움의 끝없는 원천이 되신다.”
신앙 전수와 복음화의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에페 2,18)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복음화를 논하며 일관되게 지적되는 사항은 바로 ‘교회 쇄신’이다. 교회 쇄신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본연의 소명에 대한 충실성이 없다면, 그 어떠한 새로운 구조도 이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역설하면서(「복음의 기쁨」 26항)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존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복음의 기쁨」 7항)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 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며, 사목 일꾼들에게 ‘출발’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라”(「복음의 기쁨」 27항)는 지적과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복음의 기쁨」 176항∼258항 참조)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은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일어나 비추어라]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 사랑과 생명의 선교사, 가정
가정 복음화 최우선, 부모가 자녀 신앙 성숙 이끌어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신적 생명에로 초대받았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은총이며 축복이다. 이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가정이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가정이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참여함으로써 그 초대에 응답할 수 있도록 본래 자리를 찾아가자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 그리고 혼인 성소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남편과 아내는 “혼인생활을 거룩하게 하도록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불린 것”(「가정 공동체」 34항)이며, 이 부르심에 대하여 「사목헌장」 48항은 “모든 진실을 담아 자신을 주는 행위가 가능한 ‘장소’는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선택된 부부애의 계약인 혼인뿐”이라고 천명함으로써 혼인을 통한 부르심이 다른 성소보다 결코 낮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젊은이가 혼인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혼인성사의 고유한 은총은 부부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고, 해소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일치를 강화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641항). 혼인성사를 통해 이 은총을 받으려면 합당한 준비가 필요한데, 특별히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받도록 권유한다(「교회법」 제1065조 1, 2항).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 부부의 일치에 장애가 되는 죄와 악습을 뉘우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혼인한 부부는 “부모가 되면서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책임의 은혜를 받는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보이는 징표가 되어야 한다”(「가정 공동체」 14항).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러한 사명에 대해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신심으로 가득 찬 가정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양친의 의무이다. 따라서 가정은 모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의 모든 덕행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그리스도교적 교육 선언」 3항)라고 강조한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신앙을 함께 실천하여 자녀들의 신앙 성숙을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신앙의 빛」 53항). 따라서 자녀들의 신앙과 교리교육을 주일학교에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정이야말로 “전체 교회의 맥락 안에서 복음화되고, 복음화하는 공동체로서의 자리를 차지”(「가정 공동체」 53항)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가정의 복음화는 최우선적이다. 따라서 부모는 스스로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 노력하면서 자녀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자주 들려주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헌장」 48항)이다. 혼인한 부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가정은 교회 일부분인 동시에 혼인을 통하여 교회의 성사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작은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가정을 ‘가정 교회’로 말하고 있다(「교회헌장」 11항; 「평신도 교령」 11항). 교회는 가정을 “보금자리와 발판이라고 생각”(「가정공동체」15항)하기에, 인간은 교회와 가정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또한 교회가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교회헌장」 8항)인 것처럼 가정 교회도 인간적 요소뿐 아니라 신적 요소를 지녀야 한다. 즉 가정 교회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보호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가정은 혼인성사로써 부부와 부모를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며 동시에 사랑과 생명의 선교사”(「가정 공동체」 54항)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가정과 힘을 합하여 “특히 도움과 후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가정들, 가난한 이들, 병약자, 노인, 장애인, 고아, 과부, 버림받은 배우자, 미혼모, 곤란한 처지에서 인공유산의 유혹을 받고 있는 임신부 등을 위한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애덕을 실천”(「가정 공동체」 71항)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또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성소의 요람이다. 곧 ‘최초의 신학교’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마치 예비 신학교와 같이 됨으로써 성소 계발과 육성에 이바지해야 한다. (「온 교회의 열망」 2항 참조). 그러므로 부모와 가족들은 성소의 싹이 트고 자랄 수 있는 못자리를 마련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일어나 비추어라]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 청년들은 신앙의 의미를 찾고 있다
살아있는 신앙체험 원하는 청년에게 희망의 표징 제시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 청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국 청년들은 한국교회에 무엇을 바랍니까?”
이 물음은 지난 3월 로마 바티칸 방송국의 라디오 기자가 교황청 로마 한국신학원을 방문하여 몇몇 신부들을 인터뷰하면서 유학 중인 한 한국 사제에게 건넨 질문이다. 그 기자가 건넨 두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말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청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청년들은 과연 교회에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아니, 질문의 순서를 바꾸어 이렇게 자문해 보면 어떨까?
‘지금 한국 청년들이 교회에 바라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그들에게 얼마만큼 채워 주고 있습니까?’
25년 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양적으로 많은 영세자가 생겼고 사제 수가 늘어났다. 특별히 청년들을 사랑하시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청년들이 민주화 운동에서 보였던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높이 사며,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와 쇄신, 정의와 평화에 목말라하던 청년들에게 빛과도 같은 메시지를 던져 주셨다.
이 때문이었을까? 청년 신자들은 본당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발한 청년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다양한 봉사에 뛰어들었다. 또 주일학교 교사회 역시 청년들이 주를 이루며 운영되었다. 이렇게 청년들은 이른바 본당의 일꾼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오늘, 본당에는 이렇게 여러 행사에 노력봉사로 동원될(?) 청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에 많은 이들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급박하게 변화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기 때문일까? 청년들이 보기에 교회가 답답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보여서일까? 아니면 청년 영세자가 줄어서일까?
참 아이러니하게도 본당에서는 청년 신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청년 영세자는 오히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5년을 주기로 실시하는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20~30대 수는 2005년과 2010년에 각각 4%, 7%의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청년 영세자의 숫자는 같은 시기에 1.82%, 1.77% 등 상대적으로 증가세를 나타낸다. 자, 그러면 이렇게 늘어나는 청년 신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다들 냉담 중인가?
본당에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다. 본당만이 교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톨릭 신자의 신앙생활 근거지는 본당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한국 청년들은 정해진 날, 정해진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보장받고 살기엔 삶이 너무 고단하다. 청소년기 입시 지옥의 관문을 거치자마자 각종 연수와 자격증 따기, 좁은 취업의 관문이 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청년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 피정과 성경공부, 그리고 사회봉사의 문을 찾아다니며 두드리고 있다.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꺼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해 볼까 한다.
청년들은 신앙의 의미를 찾고 있다.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체험한 신앙의 의미를 찾고 있다. 즉 살아 있는 신앙체험의 기회를 바라고 있다. 비록 교적이 있는 본당에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 삶의 자리에서 신앙적 위안을 찾는다.
교회는 이번 교황 방한을 계기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희망의 표징을 청년들에게 더 구체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독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몇 가지 실천 방향을 제시해 본다.
1. 청년들이 교회 어른들 혹은 유명 인사로서 신앙의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 삶과 신앙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든다.
2. 다양한 기도의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도학교’ 혹은 ‘피정’의 장을 마련하여 청년들의 영적인 성장을 돕는다.
3. 걷기 열풍이 불고 있는 세태에 교회가 다양한 도보 성지순례를 통해 청년들이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 정기적으로 고정된 지역에서 청년 미사가 열린다면 청년들이 자신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5.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성을 닮아가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차원에서 교황님의 어록을 중심으로 그분의 영성을 배울 수 있는 모임을 마련한다. 여기에서 하느님 말씀, 사회교리, 사회봉사 등 다양한 면의 신앙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