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학에게 길을 묻다] 기도와 눈물의 어머니
지난 겨울은 집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어찌나 추운지 그저 웅크리고 지낼 뿐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눈이 내리면 가끔씩 낭만에 젖어들기도 했건만, 이번에는 부대로 쏟아 부어대듯 그것도 자주 내리니 어서 염화칼슘을 뿌려서 통행이나 편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쉽사리 얼거나 끓지 않게 하려면
그런데 염화칼슘을 뿌리면 왜 얼음이 빨리 녹을까요? 또 왜 하필이면 소금이 아니라 염화칼슘일까요? 값이 더 싸서일까요? 가격을 알아보니 소금보다 염화칼슘이 더 비쌉니다. 그러니 가격은 이유가 아닙니다.
그건 염화칼슘이 섞였을 때 물의 어는점을 낮추는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대기압에서 순수한 물의 어는점은 섭씨 0도인데 물에 고체 같은 비휘발성 물질이 녹게 되면 어는점이 0도보다 아래로 내려가서 영하에서도 잘 얼지 않게 됩니다. 이를 용액의 ‘어는점 내림 효과’라 합니다.
용액 속에 녹아있는 물질의 농도가 크면 어는점은 더 많이 내려갑니다. 소금(NaCl) 의 경우에는 물에 녹으면 한 분자에서 2개의 이온, 곧 나트륨이온(Na+)과 염소이온(Cl-)이 생성됩니다.
그에 반해, 염화칼슘(CaCl2)은 소금보다 물에 더 잘 녹기도 하려니와 칼슘이온(Ca 2+) 1개와 염소이온(Cl-) 2개를 가지고 있으므로 한 분자가 녹아도 3배의 농도가 되는 셈이어서 최대한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도 얼지 않게 됩니다. 참고로 소금은 어는점을 영하 15-20도까지 낮추므로 지난 겨울 같은 추위의 눈을 녹이기는 어렵겠지요?
여기에 염화칼슘을 제설 작업에 사용하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물질의 조해성(潮解性) 때문입니다. 조해성이란 고체가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을 흡수하여 액체가 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이렇게 염화칼슘은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염화칼슘 수용액이 되고 이 수용액은 얼음을 만나서 녹입니다. 이 녹은 물이 염화칼슘 용액과 합쳐지게 되면 어는점이 내려가 다시는 얼지 않게 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용액은 어는점 내림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끓는점 오름 효과도 있습니다. 끓는다는 것은 대기가 누르는 압력과 액체에서 올라가는 증기압이 같아질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순수한 용매에 고체 물질이 섞이게 되면 그 액체의 증기압이 줄어들게 되니 끓게 하려면 더 높은 온도로 가열해서 증기의 압력을 높여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물에 어떤 물질을 넣어 녹이면 쉽사리 얼지도 않고 또 끓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의 냉각수로 사용하는 부동액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부동액의 주성분은 에틸렌글리콜이라는 화합물인데, 여기에 부식방지제 등 다른 화합물을 첨가함으로써 여름에는 폐쇄된 용기 내의 액체의 압력을 낮춰주고 겨울에는 얼지 않게 해줍니다.
마음이 얼어붙거나 끓지 않게 하려면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라는 물 속에 기도라는 물질을 충분히 넣어 녹이면 용액이 된 우리의 마음도 쉽사리 냉혹해지거나 분노로 끓어오르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과 아주 많이 닮아있지요? 기도는 사랑의 표현이며 이웃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이렇게, 어떤 모욕을 당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결국은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므로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달랠 수 있고, 아무리 부정적이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할 수 있기에 마음이 얼어붙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인내한 어머니!’ 하면 누구보다도 모니카 성녀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아들아, 내 치마폭에는 눈물과 기도가 담겨있다”라는 책에 실린, 자식의 회심을 위해 30여 년을 기도한 성녀의 생애를 전하려 합니다.
그녀는 이교도인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하면서 고난과 인내의 세월이 시작됩니다. 난폭하고 방탕한 남편에게 모니카는 관대함, 올곧음, 충실함, 품위 있는 언행으로 18년간의 결혼생활을 일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죽기 전에 회심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모니카는 남편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맏아들인 아우구스티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교도 명문교에 입학하였고 독서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때 아들은 이미 어린아이의 껍질을 뚫고 나왔음에도 그 내적 혼란을 철저히 숨겼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순진무구하여 죄에 물들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육체의 쾌락이 아우구스티노를 이미 삼켜버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충고는 모자 사이의 틈을 벌어지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알면서도 도리어 아들이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더 높은 학문에 정진시키려고 카르타고의 수사학(修辭學) 학교로 보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곳에서 연애를 시작하여 18세에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잘못을 하고도 홀로 남은 어머니의 너그러움을 믿고 가족 부양 문제까지 떠맡겼으니, 속수무책의 아들로 말미암은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모니카 축일을 ‘어머니 눈물의 축일’이라 부를까요.
인생길에서 폭설을 만났을 때
당시에 아들은 선과 악의 이원론, 곧 사탄도 하느님 못지않은 영원불멸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육체적 감각과 물질적인 것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오류에 빠졌던 것이지요. 또한 성경이 수사학적으로 미려한 문장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의 이론을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론과 비교했을 때 자연현상의 계산에서 많은 착오를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기대했던 마니교 주교인 파우스투스의 연설을 듣고는, 그의 연설은 아름답지만 빈 꽃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떠나기로 했던 어머니를 속이고 아들은 몰래 로마로 떠났고, 그런 배신에도 어머니는 아들 사랑하기와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후에 어머니는 기어이 로마로 가서 아들과 만났습니다. 로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마니교도들과 어울렸고, 회의론(懷疑論)을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들과도 어울렸습니다.
이때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를 만나 강론을 듣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배우려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참석하면서 편견이 무너지고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플라톤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와 ‘정신’이란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평이한 문체로 기술되어 있지만 심오한 가르침을 내포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비참한 인간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음을 고백한 바오로의 서간(로마 7,18-25 참조)이 그를 가장 감동시켰습니다.
육체의 죄로 고통 받던 그는 그 말씀에서 경건한 얼굴과 참회의 눈물, 그리고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 인간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욕망을 위해 육신을 돌보지 말라는(로마 13,14 참조) 말씀으로 법열이 넘쳤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아들을 가톨릭으로 귀의시키려고 모진 고통을 인내했던 모니카에게서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셨습니다.”(시편 30,12)라는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뒤에 아우구스티노가 ‘은총의 박사’로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은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모니카 성녀야말로 인생길에서 뜻밖에 폭설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분 덕분에 막막한 인생길에서 염화칼슘보다 더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식 문제로 가슴 아파하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모니카 성녀가 띄우는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기도와 믿음의 힘이 아닐는지요.
[화학에게 길을 묻다] 선을 가장한 악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어떤 원소들이 필요하며 또 이로울까요? 수소, 산소, 탄소, 질소, 인 등의 비금속원소 외에 철, 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같은 금속원소까지 최소한 30개 정도의 원소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 있는 원소들이 대부분이니 왠지 마음이 놓이지요?
이 가운데 몇 가지 원소의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칼슘은 뼈나 치아, 갑각류의 껍질을 형성하면서 몸의 구조를 이루고, 헤모글로빈의 중심에 있는 철은 온몸에 산소를 운반해 줍니다. 칼륨은 세포 내액의 산 · 알칼리 평형에 가장 중요한 미네랄입니다. 혈장 속의 칼륨은 근육과 신경의 기능 조절에 필요하고 이것이 만이 저하되면 근육 마비를 일으킵니다.
소량이지만 사악한 중금속
앞에서 말한 필수 원소들 이외의 원소들 대부분은 일정한 농도 이상이 되면 독성을 나타냅니다. 그 원소들의 수가 훨씬 많다고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행히 창조주께서는 독성을 띠는 원소의 양은 필수 원소들의 양에 비해 지구상에 극히 소량만 존재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독성을 가지게 되는 메커니즘은 여러 가지이나 그 가운데 중금속이 하는 짓을 보면 참 사악해 보입니다. 주기율표에서 자신과 같은 족(族)에 있는 필수 원소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슬쩍 바꿔 들어가서 암과 같은 병변을 일으키니까요. 원래 생물체는 필요한 원소가 아니면 흡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족에 있는 원소들은 그 화학적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중금속을 필수 원소로 오인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왜 위험한지 궁금하시지요? 바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 곧 필수 원소의 자리에 이들이 대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늘 깨어있어라
동위원소란 양자수는 같지만 중성자수가 다른 원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화학적 성질은 같습니다. 마치 한 원자의 형제와 같은 원소들이지요. 그리고 방사성 동위원소는 동위원소 가운데 불안정한 원소인데 방사선, 곧 알파선, 베타선 또는 감마선을 방출하며 계속 분해하여 안정한 원소로 변해갑니다.
그 가운데 이번 사고로 우리나라에서 검출된 것은 핵분열 생성물인 세슘(Cs-137, Cs-134), 요오드(I-131), 스트론튬(Sr-90) 등입니다. 방사성 물질은 반감기가 있어 저절로 사라지는데 요오드의 경우는 8일이 지나면 반으로 줄고 두 달 정도 지나면 거의 없어집니다.
자연 상태의 세슘은 Cs-133인데 방사성을 가진 것은 Cs-137로 체외에서의 반감기는 30년이지만 체내에서의 반감기는 약 110일입니다. 하지만 생물체는 Cs-133과 Cs-137을 구별 못할 뿐 아니라, 같은 족에 있는 필수 원소인 칼륨으로 착각하여 체내로 그냥 흡수하므로 앞에서 말한 칼륨 결핍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Cs-137에 피폭된 사람에게 푸른색 염료인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 : Fe4[Fe(CN)6]3 · xH2O)를 투여하면, 체내에서 세슘과 착물(錯物)을 만들어 몸 밖으로 배출시기 때문에 반감기가 30일 정도로 짧아져 그 위험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오드나 세슘은 상대적으로 반감기가 짧고 배설이 가능하기 때문에 피폭량이 적으면 위험도가 낮을 수 있습니다.
스트론튬의 경우는 훨씬 심각합니다. Sr-90의 반감기는 보통 28.9년으로 독성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이 물질은 세척해도 없어지지 않을뿐더러 배설해도 따라 나오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섭지요. 또한 같은 족에 있는 필수 원소인 칼슘 대신에 동물의 뼈에 스며들어 골수암이나 백혈병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위험한 방사성 물질이나 중금속이 생물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필수 원소를 가장하여 체내에 스며들어 병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니,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며,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늘 깨어있으라(마태 24,42-44 참조)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겸손과 사랑을 가장한 교만과 탐욕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에 띄게 악한 사람이나 불행의 전조가 확실한 일에는 경계나 준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이들이 끼치는 악과 불행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는 일상에서는, 처음에는 선한 일인 줄로 믿어 방심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으로 시작한 봉사활동이 어느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활동이 되어버립니다.
기도를 과도하게 많이 하면서 인정할 수 없는 사적인 이적 행위로 사람들의 간심을 받으며 지배하려 하고, 자신을 반대하면 그들이 성직자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비난하는, 허영심에서 비롯된 중독성 기도, 또 자기성찰을 하다가 자기비하를 너무 많이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유발해 관심과 동정을 받으려는 중독성 자기 비난식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겸손과 사랑을 가장한 교만과 탐욕이랄까요?
묵상이나 관상기도 등을 통하여 영을 식별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끄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은, 악한 영이 선을 가장할 때 처음에는 거룩하고 좋은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모습을 드러내어 은밀한 계교와 흉악한 음모에 빠지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분별하라고 합니다.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 다 좋아서 온전히 좋은 것으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선한 신의 표적이라 믿어도 된다. 그러나 결과가 원래 결심한 것보다 덜 좋은 것으로 기울어지거나 전에 영혼이 갖고 있던 평화와 안식을 빼앗아 그 영혼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다면 이는 악한 영에서 왔다는 표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선으로 위장하여 들어오는 악한 영을 분별하려면 결과를 보기까지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참을성이 있어야겠습니다.
인내와 믿음으로 겸손하자
그리고 필수 원소를 가장한 방사성 동위원소들을 흡수하는 것이 생물체에게 치명적이듯 선의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악을 분별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받게 되는 위험도 그 정도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으로 불행하게 인생을 끝막음한 이 시대의 많은 사건들이야말로 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선택이 가장 옳다고 느끼게 했으니 악은 얼마나 교묘한지요?
이냐시오 성인은 이를 극복하고자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순간에도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서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은총을 남겨두셨음을 잊지 말아야겠고, 자기가 받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 인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렇게 계속하면 머지않아 위안이 올 것을 믿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하지 말고, 봉사와 찬미를 드리는 데도 우리의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임을 깨달아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이냐시오 성인의 식별을 위한 지혜를 따름으로써 선을 지향하는 한편, 설령 악의 유혹에 빠졌다 하더라도 이를 이겨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영신수련이 목적으로 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적 인생관을 파악하고, 양심을 성찰하고 통회함으로써 더욱 성화되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협력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학에게 길을 묻다] 우리 가족은 어떤 결합을 하고 있습니까?
결혼을 앞둔 연인들은 불행한 결혼이란 남의 일이지 자신에게만큼은 절대로 닥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배우자는 지금처럼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줄 것이고, 아기를 낳으면 둘이 함께 사랑을 듬뿍 주고 키울 거라며 행복한 가정만을 꿈꾸지요. 비록 본인들이 자랄 때는 티격태격하는 부모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며 아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도 자기는 결코 그런 삶을 꾸려가지 않을 거라며 내심 자신감도 가집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의 삶이 과연 그런지요? 당황스러우리만치 여러 방면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고, 양쪽 부모님이나 친척들과의 마찰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스트레스를 죄없고 힘없는 아이에게 풀기 시작합니다.
‘어, 이게 아닌데!’ 하고 돌아보면 예전에 보아온 부모님의 생활 양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결혼하기 전까지 좋은 학벌이나 직업, ‘스펙’을 얻으려고 어려서부터 전력 질주해 왔습니다. 그 노력을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하는 부모가 되는 데 조금이나마 나누어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왜냐하면 부부가 불화하여 이혼 직전이 되거나, 그동안 잘 지내온 것 같았던 자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때까지 부모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들먹이면서 부모를 원망하며 울부짖는 때에 이르러서야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되는 때에.
자식 또한 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선언해 왔건만 결혼하면 다시 그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 생활 양상의 대물림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대물림은 과연 끊어질 수 있을까요?
공유결합과 이온 결합
물질세계에서 화합물이 만들어지려면 원자 간의 결합이 필요합니다. 그 결합은 마치 인간이 사회나 가정에서 이루는 관계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중에서 공유결합은 부부간, 이온 결합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닮기도 했고 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두 개 이상의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면 분자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한 분자 내에서 종류가 다른 두 개의 원자가 결합할 때 원자들 사이에는 전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힘을 전기음성도라 하는데 같은 종류의 원자들은 전자쌍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무극성 공유결합화합물(H2)을, 힘의 차이가 좀 커지면 극성 공유결합화합물(HCl)을, 차이가 아주 크면 이온 결합화합물(NaCl)을 만듭니다.
공유결합은 가장 간단한 수소 분자로부터 유기화합물, DNA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결합입니다. 공유결합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서로 평등하게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공유결합은 물이나 다른 용매에 들어가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그들이 처음에 했던 결심이나 결정이 비록 나쁜 결과를 낳게 되었더라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며 함께 겪어내는 모습입니다.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섭섭함보다는 고마움을 발견하며 서로 다독이며 노년까지 함께 하는 그런 모습도 보입니다.
한편, 이온 결합에서는 한 원자는 전자를 내어주어 양전기를 띠고 다른 쪽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여 음전기를 띠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정전기적 인력이 작용하므로 공유결합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 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온 결합화합물에는 염화칼슘(CaCl2)이나 소금(NaCl)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강한 결합을 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물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결합이 끊어져서 양이온과 음이온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소금의 화학식은 NaCl이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Na+ 이온과 Cl- 이온으로 분리됩니다.
이는 마치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된 세상에서는 양이온이 되어 아무런 미련 없이 음이온의 자녀들을 떠나보내야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부모에게 기대지도 말고 자식에게 집착하지도 말라는 뜻이지요.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신뢰하라
공유결합이나 이온 결합 모두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신뢰하라는 것 같지요. 그렇지만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 간에 상처를 깊이 주고받은 뒤라면 어찌해야 할까요?
공유결합을 제대로 못하는 배우자로부터의 상처도 고통스럽지만 이온 결합이 제대로 안 된 부모나 자녀로부터의 상처는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려서 정체성까지 잃을 정도이니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을 때 부부 사이가 원만하기 쉬우니 이 두 관계들은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과 마리아 로벤 공저 “어린 시절 상처 치유하기”에서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에 대한 치유(마르 5,21-45 참조) 내용을 참조한 글입니다.
옷자락을 잡을 권리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운 한 여성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의 소망을 모두 들어주어야만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무기력해져만 갔습니다. 성경의 하혈하는 여인처럼 자기가 가진 피를 모두 쏟아버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주어야만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기에 남을 위해 과도한 희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한 만큼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허망함만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치유의 첫 단계는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그만두는 데서 시작됩니다. 남들로부터 무엇이든 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한 행동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의 하혈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고 있는 사랑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이나 배우자의 옷자락을 잡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일 때 공허하게 느껴지는 삶의 종지부를 찍으며 부부간의 아름다운 공유결합이 이루어집니다.
믿기만 하여라
한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과대한 걱정과 관심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첫 번째 단계로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은 채 그가 갖고 있는 걱정을 직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 걱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게 되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믿기만 하여라!” 하시면서 그의 딸이 모든 위기를 뚫고 나와 자신의 길을 찾게 될 것을 굳게 믿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걱정 때문에 딸을 구속할수록 딸은 살아나지 못하기에 그 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꽃피울 수 있도록 신뢰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일어나라!” 하시어 그녀의 내면에서 자기 스스로를 돕게 하는 용기를 일깨워내셨습니다. 이로써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빛나는 이온 결합이 완성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부모나 남을 탓하기보다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 상처를 직시하고 이해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 의탁할 때라야 그 상처를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내부에서 치유의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치유할 수 있으면 남의 치유도 가능해지므로 그때 우리의 삶은 나와 타인을 위한 축복의 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가족들 간에 평등의 공유결합과 신뢰의 이온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어 상처로 얼룩진 삶의 대물림은 끊어질 수 있겠지요.
[화학에게 길을 묻다] 놓아버리기
“들이마신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서산대사의 시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뱉고 있지만 사실 들이마신 숨, 곧 가졌던 것을 버리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사지 않은 공기인데도 못 버리면 죽음인데, 우리가 아끼는 것은 물론 마음속 깊이 감추어온 것을 버리지 못하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따라온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그런 것을 놓아버리면 새 삶을 얻는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숨을 쉬는 동안에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보면, 산소야말로 자신이 가져야 할 때와 버려야 할 때를 얼마나 절묘하게 아는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산소는 어떻게 운반될까요?
사람이 숨을 쉬게 되면 폐로 들어간 공기는 몸속의 조직에 있는 모세혈관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체내에는 산소가 몸속의 물질과 반응하여 만들어낸 이산화탄소 같은 기체도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숨을 쉴 때는 폐 속의 산소 압력이 혈액의 산소 압력보다 크기 때문에 산소가 폐에서 혈관으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숨을 내쉴 때는 혈액 가운데 이산화탄소의 압력이 높아져 있어 이산화탄소가 폐를 통해 나가게 됩니다. 한편 산소를 받은 혈액은 몸속의 다른 조직으로 산소를 운반해 줍니다.
포유동물이나 사람 몸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주체는 혈액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헤모글로빈에 포함된 철(鐵)입니다. 곧 숨을 들이쉬어 헤모글로빈의 철과 결합했던 산소가 혈관을 통해 모든 조직에 들어가서 철로부터 떨어져나가기에 운반이 가능하게 됩니다.
참고로 조직에서 압력이 높아진 이산화탄소는 그 속의 물과 반응하여 산성을 띠는 탄산이 되고, 산소는 산성도가 높은 곳에서 철과의 결합이 더 잘 끊어집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는 다시 혈장 속에 녹아 폐로 운반되어 호흡으로 방출되면 산성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는 산소와 철 사이의 결합이 끊어짐으로써 자신을 전달해 주고, 많은 곳에서는 결합한 채로 존재합니다.
이는 산소가 철과의 결합력이 약해서,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주위의 요구에 따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확실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서는 훌훌 털고 떠나감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가려면 이렇게 붙들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우리의 몸 밖에서는 철과 산소가 결합하면 저절로 끊어지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체내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께 머리를 숙여 감사드려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기도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음을 맞는 경우를 많이 보셨지요? 그 성분인 일산화탄소는 철과의 결합력이 산소에 비해 200배 정도 크기 때문에 한 번 결합하면 여간해선 끊어지지 않아 산소와 결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생명을 앗아가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떠날 줄 아는 성질을 가진 산소가 우리를 살리는 반면, 집착하는 일산화탄소가 우리를 죽이는 현상은 우리의 삶에도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지요?
죽음 - 모든 것을 내어놓는 과정
살아가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우리의 가장 최후의 순간인 죽음을 앞둔 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내어놓는 과정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느끼게 됩니다.
죽음이 가까워온 환자가 원기를 되찾고 마치 회복된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대략 하루 정도인데 이를 반조(返照) 현상이라 합니다. 이때는 죽음 직전에 반짝이는 의식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을 총정리하면서 자연과의 일치, 자기 자신과의 화해 그리고 다른 이와의 화해라는 인생 최후의 작업을 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스즈키 히데코 수녀는 많은 환자들과 반조의 빛 속에 함께했던 체험담을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겉보기에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서른네 살에 암으로 죽어가던 한 젊은 수녀가 마음의 어두움에 대하여 털어놓은 이야기가 유독 제게 와닿습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만난 나이 많은 원장수녀는 표면적으로는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 수녀를 학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에 어두움이 들어왔습니다. 이 어두움은 신앙을 가진 이가 그 신앙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빛을 찾아낼 수 없는 고통을 비유한 것입니다.
아이티로 떠난 뒤 원장수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그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생명 그 자체로 보였던 젊은 수녀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뉘우치며 감사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녀를 괴롭힘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었고, 속에 있던 악을 밖으로 뱉어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젊은 수녀라는 존재가 마냥 받아주는 사람의 역할을 다해주었고, 그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해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그리고 젊은 수녀는 자신이 암에 걸려 절망의 심연에 이르렀을 때에야 자기를 학대한 원장수녀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제 독기를 받아주었기에 정화되어 편안히 죽을 수 있다.”고 한 원장수녀의 말씀대로 자신도 임종 때에 정화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며 떠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평화와 깊은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추하고 비뚤어진 근성을 깨닫고, 그것을 내어놓는 용기는 부활 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난과 같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과월(過越)의 과정이라면서. 그러고 보면, 원장수녀가 임종 직전에 젊은 수녀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지난날 저지른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은 젊은 수녀를 영적으로 살리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그 고백을 통해 젊은 수녀는, 자기 인생에서 원장수녀에게 학대를 받았던 시절이야말로 예수님의 삶을 살았던 빛의 시절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때문에 ‘신앙에 대한 회의’라는 어두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러한 모습은 바로 산소의 놓아버림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과정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저도 겉으로는 충실한 신앙인인 것 같지만 아직도 자주 남을 판단하고 용서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짙은 어두움이 깔려있습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이 위령성월에, 저도 성령의 은총으로 이다지도 끈질긴 집착의 어두움을 놓아버리고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화학에게 길을 묻다] 오각형이 공간을 채우는 방법
해마다 가을이면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합니다. 올해의 화학상은 화학에서 ‘결정(結晶)’의 의미를 통째로 바꾼 과학자에게 그 영예가 돌아갔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준결정(準結晶, quasicrystal)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결정학의 100년 오류’를 밝혀낸 이스라엘의 화학자 셰흐트만(Shechtman) 박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고체 상태의 물질은 결정(crystal)과 비정질(amorphous)로 존재하는데 그는 결정과 비정질의 중간 물질인 준결정을 발견하고 실험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결정학에 획기적인 장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오류를 밝혀낸 것도 놀랍지만,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그토록 눈부시게 발전해 온 이 과학계에, 그것도 아주 최근까지, 그 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데도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있었다는 것이 더 놀랍지 않습니까?
결정과 비정질이란?
우선 결정과 비정질이 무엇인지부터 알아 보겠습니다.
구성 원자가 광범위하게 규칙적인 주기성을 가지고 배열된 물질을 결정이라 하며 원자의 배열이 불규칙한 물질을 비정질이라 합니다. 간단한 예로 똑같이 반짝이는 물질들이지만, 다이아몬드는 구성 원자가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결정이며, 유리는 그렇지 않아 비정질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준결정의 발견이 결정학의 큰 오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셰흐트만 박사는 1982년 알루미늄과 망간을 녹여 100만 도를 1초 동안에 냉각시키는 속도로 급랭시켜 합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합금이 대칭 구조를 가지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그 구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자 현미경을 이용하여 발견하였습니다. 이 물질이 바로 준결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준결정은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도 아니고, 불규칙적인 비정질도 아닌 물질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합금이 오각형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공간을 채우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 오각형의 규칙적인 배열 안에 삼각형 등을 채워 넣는 불규칙적인 배열을 포함함으로써 공간이 채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만들어진 패턴은 전체적으로 보면 규칙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불규칙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기존 결정학의 변화
기존 결정학의 원칙은, 결정이란 삼각형이나 사각형, 육각형 등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평면이나 공간을 채울 수 있어야 하는데 오각형으로는 채울 수 없기에 오각형의 결정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결정을 이루는 원자들은 격자처럼 일정하고도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배열된 3차원적인 형태를 가져야 했으니, 이 새로운 발견은 기존의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의 논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게재 불가의 판정을 받기도 하였고, 심지어 그가 다니던 연구소 소장은 그에게결정학 교과서를 다시 읽으라고 했답니다.
또 그 분야의 대가이며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으로부터는 “준결정 따위는 없다. 단지 준과학자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라는 수모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후 다른 종류의 준결정들을 실험실에서 발견했고, 2009년에는 러시아의 광석 샘플을 통해 자연계에도 준결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1992년에 결정의 화학적 정의 가운데 ‘규칙적으로 배열되고 반복되는 3차원적 형태’라는 부분이 ‘명확한 회절(回折) 패턴이 나타나는 물질’로 바뀌기에 이르렀습니다.
준결정은 일반 원자배열을 지닌 결정보다 마찰력이 작아서 잘 마모되지 않고 표면에 다른 물질이 잘 달라붙지 않아 프라이팬 코팅재로, 또 전기나 열에 강해서 엔진을 보호하는 단열재 등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유럽에서는 강도가 큰 이 소재를 이용해 면도칼이나 바늘, 칼 등을 생산해 내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기계 · 항공 등 향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소재로서 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편견
이 상황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편견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 시대의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며(예레 23,5 참조),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무뢰배를 내리치고 악인을 죽여 평화의 왕국을 세우고(이사 11,4),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그들을 구해내어 예루살렘 한가운데에서 살게 해주시는(즈카 8,7-8) 강력한 임금님이었습니다. 한 치의 흠도 없이 규격과 틀에 꼭 들어맞고 배열이 일정한 결정과도 같은 분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힘 있는 임금님이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구유에서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로 그들에게 왔습니다. 마치 오각형의 도형과 같다고나 할까요? 홀로 공간을 채울 수 없는, 겉보기에 너무도 부족한 모습이지요. 그랬기에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주위 사람들이나 가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마르 6,3)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유다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때도 예수님에게 유다로 가서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7,1-5).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받게 될지도 모를 두려움도 있었기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도 성경을 내세우며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요한 7,52)는 이유로 예수님을 결코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모두 선입견의 결과였지요. 마치 셰흐트만 박사에게 결정학 교과서를 다시 읽으라고 한 사람들처럼.
삶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
예수님은 왜 빈틈없는 결정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각형처럼 오셨을까요? 오각형은 그 자체만으로는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공간을 채우려면 우선 평면을 채울 수 있어야 하는데, 오각형의 한 모서리의 각이 108도이므로 3개를 붙여도 324도가 되니 평면이 되는 360도를 만들 수 없습니다.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지요. 그 빈틈에 삼각형이나 다른 도형들이 들어와 오각형과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준결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획일적인 모양의 결정과 달리, 변화와 다양성을 갖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구세주 예수님도 바로 그러한 빈틈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죄인, 창녀, 세리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겸손이었지요. 그 빈틈을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도형으로 가득 채워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세상이야말로 사람들 사이에 마찰도 작아서 더 강하게 화합하는 행복한 세상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겸손하게 마음을 열 때 내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행복해질 수 있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