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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시 격월간 수필평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
- 문학도시<1,2,3,4월호>를 읽고 -
권대근
1. 열며
선 하나/ 길게 긋고/ 푸르게 푸르게/ 참 희고 푸르다 내 천형의 쓰라린 길/ 칼금에/ 베어져 나오는/ 내 피가/ 푸르다
-박옥위의 시조 <수평선>에서
문학의 존재 이유가 인간과 삶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 목적에 가장 근접한 것이 수필이다. 수필가가 적극적으로 인간 사회를 치유하는 주체가 될 때 인간 사회는 타락의 속도를 늦추게 되고 자정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고, 인권이 실용성에 밀려나도록 작가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무차별적인 위협이 위험 수위에 와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바로 작가정신이다. 이러한 작가의 현실인식에 더하여, 문학적 형상화가 빛나야 한다. 문학은 한 민족이 최고로 도달할 수 있는 사상과 정서를 언어로 표출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우리가 수필을 읽을 때 감동을 받는 것은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동은 모두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연상과 상상을 조장하여 미적 쾌감을 주는 그것이 진정한 감동이기 때문이다.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주는 것이 예술의 기본적 기능이라 할 때, 박옥위의 시조, <수평선>처럼 수필도 예술적 창조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 격월평은 무엇보다도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의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하려 한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일은 우리의 주변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일에 바쁘다 보니 챙겨야 할 일들을 내버려둔 채 살아왔다. 따라서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를 통해 잊혀져 가는 우리의 가치 설정을 새롭게 모색하며 문학의 향기를 내고 있는 ‘인식’이 빛나는 작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이런 통념의 벽을 허무는 작업일 때, 수필가는 분주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현실의 모든 모습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그 반대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애정어린 모습을 통해 진실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문학도시 1,2월호에서는 김정자의 <터닝포인트>와 안명수의 <범인>, 문학도시 3,4월호에서는 김광영의 <나래 다는 법>, 김승혜의 <나비의 딸>, 심선경의 <꺽어진 전봇대>를 수작으로 골랐다. 이들 작품들은 인간성의 모습과 인간애의 정신을 주제 지향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작품으로써 작가의 인식이 빛나고, 그 인식이 형상화로 문예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체험이 작품 속에 용해되어 비평의 대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김정자의 <터닝포인트>
모든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러하듯 문학은 끊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 가고,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는 일이며, 그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바람이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물을 접할 때, 물결이 일 듯 감정이 인다. 여기에 자기를 묻는다는 것, 어떤 사물에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필적 자아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순간순간 여러 현실과 부딪히면서 바람직한 삶을 향한 '느낌'을 엮어내지 못하면, 미래도 발전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계기를 통해서 자신을 반성대 위에 올려 놓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수필은 이런 숨겨진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글이라서 감동을 준다. 수필 감상의 진정한 맛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어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김정자는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한 수필가다. 이 수필을 읽으면, 가슴 속에 반성적 성찰이 물결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응시를 통한 깨달음이 그 자체로서 흥건한 정을 자아내게 한다. 이는 자기 감정이 최대한 억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여과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본래 작가의 자리는 순방향인데 잘못하여, 기차의 역방향 자리에 앉게 되면서 열리는 사유의 세계가 독자에게 깨달음의 교훈으로 전해져오는 수필이다. 그런 실수로 ‘맞이하는 일이 긴장을 준다면, 보내는 일은 편하고 좀 수월하다’는 인식으로 편견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고, 그것을 ‘전환점’으로 삼아 삶을 희망으로 수놓는 작가의 마음이 곱다.
<터닝포인트>는 '전환점'을 의미하는 외래어로,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란 걸 보여주는 수필이다. 이런 작가의 사상은 매우 동양적인 사고다. '일체유심조' 사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천국도 지옥도 따로 있지 않았다.’는 진술에 그대로 나타난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보다 더 아픈 다른 누구를 더 걱정할 때다. 김정자는 일상의 모든 사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출가외인으로서 방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무관심하고, 외면함으로써 홀가분하기를 소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는 그녀가 남달리 정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 큰 절망을 짐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유독 크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작가는 생각을 바꾸는 인식의 전환으로 애써 지난 과거를 합리화한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현실의 처지나 입장을 자기의 것과 함께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기운도 움트지 않는다. 오직 을씨년스럽고 황량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본래의 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 실수 덕분으로 앞면과 뒷면이 종이 한 장 차이란 사실을 깨닫고, 현실에 대한 긍정, ‘여기와 현재’를 사랑하였기에, 무거운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수필의 교훈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2. 안명수의 <범인>
안명수는 부산의 대표적인 수필가 중의 한 명이다. 에세이의 진수가 담긴 영문학을 공부해서인지 그의 글은 재치와 유머가 빛난다. 한 편의 수필을 쓸 때마다 산문가적 감수성의 섬세한 공명에도 주의를 기울인 탓일 것이다. 견고한 문학적 수사 장치와 비유를 동반하면서 비판의 ‘거침’을 ‘풍자’와 ‘해학’으로 버무려 ‘순화’시키는 솜씨야말로 안명수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하게 한다. 이 수필 <범인> 역시 재미가 있다. 머리도 즐겁게 하고, 가슴도 즐겁게 해준다. 이 수필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몽테뉴의 말이었다. 그는 ‘나는 단지 재미를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바가 있다. 우리가 수필을 읽는 목적은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독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읽는 수필이 재미있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해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재미가 있어야 금상 첨화다. 수필 <범인>은 고백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엉덩이’와 ‘궁둥이’ 그리고 ‘방둥이’ 이야기를 서두에 안치시키고, 그것을 전개부로 끌고 가면서 ‘방구’, ‘방고’, ‘방귀’로 연결시키고, 다시 영어 수업 시간에 방귀를 듬뿍 흘려놓은 것이 학생들끼리 싸움으로 이어졌던 사건을 40년이 넘은 뒤에 슬쩍 자신이 그때 방귀를 뀐 ‘범인’이라고 고백하는 이야기다. 기발한 재치로 방귀에 얽힌 ‘과거사’를 재밋게 풀어내고 있다. 안명수 수필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풀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기에 독자를 끌어당긴다.
러. 콕 스테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의 날카로운 인식이 빛나는 해학은 인생에 돋아나 있는 천태 만상의 부조리를 웃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수필은 단순한 생활의 반성이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인생의 본질, 시대정신 등을 관통하고 있기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세상의 모순을 깊은 통찰을 통해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어느 다른 수필들과도 차별화된다. 쉽게 말해 인생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풍경을 지성인의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라서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정서적 감화까지 맛보게 한다. 그래서 이 수필의 가치는 빛난다 하겠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학생들끼리 방귀 문제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40년이 넘은 해프닝을 수필로 쓰면서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를 들먹이고, 자신의 죄목을 ‘공기오염죄’, ‘사건은폐죄’로 규정하며, 자신이 범인임을 자수하는 용기에 박수와 웃음을 보낸다. 완전범죄는 없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죄 짓고는 못산다는 무거운 주제로 끌고 가진 않았다. 결말부 문장에서, 생리적 현상에 의한 공기오염죄는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작가의 모습에서 우리는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는 법’이란 격언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3. 김광영의 <나래 다는 법>
‘나래’는 ‘날개’의 방언이다. ‘날개’라는 말은 상징성이 큰 말이라서 시 또는 수필의 제재로 자주 쓰이면서도 의미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송명화 수필가는 <여인의 날개>에서 ‘여인의 꿈’을, 홍영순 수필가는 <날개>에서 '삶의 무게‘를, 그리고 김광영은 이 수필에서 ’날개‘에 ’명예와 신분상승‘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를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이런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이 한 달째 오르내리고 있는 강을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으로 의미화한다. 그 근거로 ’강은 물을 가두어두지 않음‘을 든다. 집오리와 백로를 비교하면서 날개의 의미를 ’비움‘으로 승화시켜 주제의 구체화를 이루는 작가의 솜씨가 빛난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그리고 수필은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되지 못하면 신변잡사에서 맴돌게 된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김광영은 이런 삶의 문제를 국회 청문회장과 오버랩시킨다. 추궁하는 사람이나 추궁당하는 사람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으로 공감을 이끌어가는 논리에 맛이 느껴진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사색의 편린이어서 종국에는 자기 성찰과 관조에 머물게 된다. 특히 반성의 문학으로 불리어지기도 하는 수필은 자아를 찾는 작업인 것이다. 자기 성찰은 바로 자기 내면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수필은 체험의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사색의 기쁨을 주는 여유와 멋이 담긴 문학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그래서 강을 보며 비우기 좋아하는 강가에서 ‘나래’ 다는 법을 배우고 간다. 이쯤 되면 왜 작가가 ‘날개’란 표준어를 작품 속에서 구사하면서도 제목에 ‘날개’를 ‘나래’라고 썼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래’는 ‘비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ㄹ‘자가 없어 ’나래‘는 날개’보다 더 가볍지 않는가. 이 작품의 가치는 속주제의 내면화에 있다. 결국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이면서 표리부동한 사람들이 즐비한 세상에 이런 인간성을 희구하는 수필가의 마음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쓸모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우리들 정신의 심부에 쾌감을 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작품 <나래 다는 법>에서 보이는 인생관은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정신이다. 강을 보며 비움을 위한 길을 떠나고자 다짐하는 작가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일 것이다. 적당히 차면 비우려는 마음 자세는 자신이 욕심이 없는 사람임을 뜻한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고자 하는 작가의 자세가 아름답다. 이 글을 읽어 가면 인생이란 스스로 선택하기에 따라 행복하고 멋지고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는 그녀의 인생관이 읽힌다.
4. 김승혜의 <나비의 딸>
이 수필은 저승에 가면 새가 되고 싶다고 했던 어머니를 사모하여 애도하는 글이다. 김승혜 수필의 특성은 한마디로 내출혈의 독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작가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움'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비'와 '나비'다. 이런 문학적 장치로부터 수필은 맛을 낸다. 작가는 ‘비’로부터 ‘슬픔’을, ‘나비’로부터 ‘그리움’을 건져낸다. 비와 나비는 그녀에게 ‘어머니’를 상상하게 한다. <나비의 딸>은 사색적인 수필로서 자기 성찰이 그리움이란 그림자 형상과 만나 수필의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정을 근간으로 한다. 작가는 마음이 우울하고 의지가 약해질 때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토로한다. 어머니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나비’는 가슴이 녹도록 물컹거리는 그리움을 전해준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연세가 들면서 몸집이 작아지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가 훨훨 날아다닐 준비를 하늘 걸로 의미화하고, 잊으려 하면 나타나는 ‘나비’를 어머니의 가련한 넋으로 묘사하는 대목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출현한 ‘나비'의 기이한 현상을 불교의 윤회 사상으로 연결하여 마무리한 수필의 기법에 박수를 보낸다. 작가의 어머니는 저승의 국화 꽃밭에서 원없이 날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탄탄한 필력으로 ’나비‘의 강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창공을 날고 있을 ’어머니‘를 선녀의 이미지로 그려보게 만든다.
인생이란 가변적 공간이다. 삶이란 중심에 서면, 그 일상은 때로 우리를 흔들리게 하고, 때로 절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고 있다. 차를 사서 처음으로 운전을 하는 날에도 흰 나비 두 마리가 나타나 그녀의 동행이 되어주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나온다. '비'는 곧 어머니의 체취다. 발단부에서 작가는 '비'를 어머니의 한 맺힌 한 보따리의 눈물로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가 병풍 뒤에 누웠을 때, 차작차작 내리던 비는 장대비가 되어 밤을 새웠던 것이다. 이 수필의 성공 여부는 충분한 진술로 ‘비’가 어머니의 눈물이고, ‘나비’가 어머니의 화신임을 증명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런 성실한 노력이 독자와의 공감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제목이 ‘나비의 딸’이 되었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어머니를 잃은 자외선과 같은 섬세한 여인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방향 감각을 잃고 서 있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진솔하고, 자유분방하게 그려내고픈 욕구가 이 글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불교의 윤회에 긍정의 고개를 끄덕여 본다‘는 마지막 진술은 공감 확인을 위한 보증수표다.
5. 심선경의 <꺽어진 전봇대>
수필의 여러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관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생활의 편익을 위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 추구하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글이 아니며, 사실을 설명하거나 논리를 추구하는 학문적인 글이 아니라, 관조적 자세로 자아와 사물을 통찰하여 문학적 기능을 다하는 글이다. 이 수필에서 가장 강하게 어필하는 부분은 ‘관조’를 통한 대상의 새로운 의미화다.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생활 소재이지만 이것이 한 편의 감동적 수필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삶에 대한 사랑과 예리한 관찰력의 결과로 보인다. 삶의 진전성과 건강성을 가지고 사람과의 접촉에서 각성을 이루는 그의 진지한 생활관은 본격수필을 순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건강한 정신으로부터 나온 수필의 주제의식은 상쾌감을 준다. 우리가 문학을 가까이 접하는 이유를 찾으라면, 먼저 구원성을 들 수 있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게 되고, 작가를 구원한 작품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의 품으로 달려간다. 피로에 지친 독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 장르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수필은 딱 안성맞춤이다. 서울 가는 버스에 동승했던 한 사내를 떠올리며, 그의 얄궂은 사연을 중계하면서 수필은 시작된다. 이 수필의 가장 큰 수확은 비에 마냥 젖은 전봇대를 보며, 작가가 피곤에 절어 곤두박질 쳐진 그 사내의 지친 몸뚱이를 떠올리는 부분이다. 수필이 가진 그 가공할 만한 힘 때문에 독자들은 두서너 페이지에 이르는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감동한다.
심선경 수필의 가치인 미학성은 깨달음을 의미화하는 그의 수법에서 나온다. 드킨시의 말대로 훌륭한 문학 작품은 작가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우선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수필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송두리 채 던지고자 하는 마음 비우기요, 삶의 겸허요, 진실한 삶의 접근법이다. 필자는 우선 그런 자세와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 ‘전봇대'에 함축된 주제의식을 제재를 통해 겨냥하기 위해, 심선경은 동화와 투사의 기법을 구사했다. 동화란 자아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합일을 이루는 것이고, 투사는 세계 속으로 자아를 투입하여 동일 존재로서 화합을 모색하는 것이다. 평소 예의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는 일이 수필 창작에 있어 기본인데, 심선경은 인간적인 자세로 소외된 사람에 인정을 주고 있다. 제재와 쉽게 동화되어 물아일체를 이루고 거기서 한 편의 수필을 형상화시켜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이끌어 내는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근원은 다음의 진술, “한 집안의 가장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가난해지는 삶, 희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낡은 집, 좁은 방에 다닥다닥 오그린 채 잠들었을 그의 내자와 아이들의 선한 눈망울이 그 위에 겹쳐진다”에서 알 수 있다. 삶의 멍에를 진 그 젊은 사내의 아픔마저 껴안으려는 휴머니즘적 삶의 진정성에서 우리는 이 수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6. 닫으며
수필은 체험의 체계적인 변형과 보수에 의해 완성된다. 수필가에게 객관적으로 제시된 사물에 작가가 주관적으로 반응한 정신이 부가되어야 한다. 사실의 기록이어서는 안 된다. 평자는 이번에 두 권의 <문학도시>에서 문학성이 짙은 다섯 편의 작품을 골라 긍정적인 측면에서 문학으로서의 작품적 가치를 조명해 보았다. 김정자를 비롯한 안명수, 김광영, 김승혜, 심선경 등 다섯 분의 작품평을 쓰면서 행복했다. 부산여성 수필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미가 거미줄 치듯 수필을 쉽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필을 쓰다 보면 간혹 태작도 나온다. 이럴 땐 아픔도 느껴보아야 한다. 그런 고통 끝에 수작을 완성한 보람도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쓴 작품에 메스를 댈 때면, 평자의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이럴 때 수필을 비평한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이다. 그것은 아득한 공중에서 외줄 타기다. 시퍼런 칼날 위에서 작두를 타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행히 이번에는 좋은 작품들만 고르다 보니, 고통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산다는 것은 표현하는 일이다. 돈도 되지 않는 수필,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수필을 우리는 써야만 한다. 그것은 돈도 되지 않는 아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아이를 낳은 임산부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수필은 자기가 낳은 아이와 같은 자신의 분신이다. 분신이므로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분신을 목욕도 시키지 않은 채 남의 집 대문 앞에 놓고 도망치듯이 함부로 휘갈겨서 저절로 크기를 바라서야 되겠는가. 잘나도 내 자식, 못나도 내 자식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같다. 좋은 아이를 낳으려면 태교도 하고, 갓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모유를 먹일 것인가 우유를 먹일 것인가를 고민하듯이 이제 작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아무렇게나 써서 발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수필 쓰기는 창작이면서 동시에 수필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어야 한다. 수필을 쓰는 일은 체험을 질서화해서 언어로 체계화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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