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선생의 《遠遊日錄(원유일록)》 중 장흥 위씨 관련 부분을 7회에 걸쳐 연재합니다.-1
《遠遊日錄(원유일록)》은 경회 김영근선생이 홍의재 위봉,후포(後圃) 조동겸(趙東謙), 자(字)가 인부(仁夫)인 홍병원(洪秉元), 경회당의 아들 효주(孝柱) 등 다섯분이
1906년 5월 19일 장흥 강진을 떠나 간도로 망명을 가는 여정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그중에서 자공(自恭)할아버지가 터를 잡고 사셨던 함경도 신흥군 원평면 우상동의 장흥 위씨 집성촌을 방문한 생생한 117년전의 기록을 경회 김영근선생 후손 김환균씨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1906년 7월)십사일 청(晴)하다. 홍의와 후포가 효주로 더불어 일찍 일어나 마을 안으로 나뉘어 향하고 나는 지씨(池氏)가 만류하여 떨어져 있었는데 속히 절구 두 수를 써서 주기를 〈삭방 만 리에 신발이 떨어져 간 곳마다 만난 사람 차가운 눈초리가 많다. 송리(松里) 선생은 참으로 장자(長者)이니 먼 데 객이 밤에 찾는데도 싫어하지 않는다(朔方萬里獘芒靴 到處逢人白眼多 松里先生眞長者 不嫌遠客夜相過)〉, 〈큰 덕이 전부터 삭방을 지켜 왔는데 민풍은 어찌하여 아직도 홍황(洪荒) 때인가. 학암(鶴菴)의 호매(豪邁)함을 누가 같이 할까. 만 리에 종사(從師)하기를 호장(戶牆)처럼 여겼다(碩德從來鎭朔方 民風何事尙天荒 鶴菴崔愼會寧人受學于尤庵豪邁誰能似 萬里從師視戶墻初作赴華陽)〉 했다. 지씨가 절구 시 일 수를 지어 답해 주길래 나는 그 운(韻)을 따라 답하기를 〈세상 먼지 일 점에도 물들지 않고 초의 목식(草衣木食)으로 산동(山東)에서 늙는다. 멀리 행함을 점쳐 알았다. 시인(時人)들과 이동(異同)을 비교하지 말라(不染世塵一點紅 草衣木食老山東 遠遊行止占知否時池以飛伏占吾行止故及之 莫把市人轎異同)〉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작별하고 나오면서 우연히 절구 일 수를 지었으니 〈북으로 만 리를 행해도 지음(知音)이 적은데 부질없이 산수곡의 삼척 거문고를 안았다. 그래서 짐작하노니 와룡(臥龍) 선생의 마음이 홀로 간절하여 초려에서 걸게 이도시(二桃詩)를 읊고 있다.(北遊萬里少知音 謾抱峨洋三尺琴 故認臥龍心獨切 草廬長嘯二桃吟)〉 걸어서 오 리쯤 가다가 비로소 동반들과 만났다. 이때에 박의원 성학(朴議員 聖學)이란 사람이 있어 나이가 지금 삼십삼인데 홍의의 모습을 보고 사모하여 일행을 만류하고 집 밖의 길가에 머물러 서서 내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높은 의리에 깊이 감복하여 후포, 인부, 효주를 권하여 돌아와 들게 하여 그 미(美)를 이루어줬다.
나는 홍의를 따라 우상동(右相洞) 위씨촌(魏氏村)으로 향했는데 작별에 임하여 입으로 절구 일 수를 읊기를 〈오인의 이합(離合)이 날로 무상하니 다만 행인 전대에 당장의 양곡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가에서 물이 마름을 수심하지 말라. 월중(越中)에 장보관(章甫冠)이 어찌 서로 맞으랴(五人離合日無常 只爲行囊乏見糧 莫向天涯愁涸轍 越中章甫豈相當)〉 했다. 십여 리를 걷다가 두 큰 물을 건넜는데 십 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소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홍의와 희롱삼아 절구 일 수를 지었으니 〈호아(胡兒)가 십 세에 능히 말을 타는데, 북녀(北女)는 십 세에 능히 소를 탄다. 소를 타고 물을 건너기를 평지처럼 하니 바로 뒷날에 모수류(母嫂流)가 되리라(胡兒十歲能騎馬 北女十歲能騎牛 騎牛渡水如平地 正是他年母嫂流北俗謂他姓家婦女年高者爲母 稍長者謂嫂)〉.
홍의의 시는 〈북녀가 십 년에 소 먹일 줄을 알고 소를 타고 물을 건너며 배에 앉았듯 한다 먼데 객이 이곳에 와 처음 보고 놀라서 빈 물가 저녁 날에 한참 고개를 돌려 보았다(北女十年解牧牛 騎牛渡水坐如舟 遠客此來驚始睹 空洲斜日久回頭)〉 했다. 원평시(元平市)에 이르러 조금 쉬고 다시 큰 강을 건너 십 리쯤 가서 우상동(右相洞)에 이르러 위환국의 집을 찾았더니 관필이 홍의로 더불어 그 종손인 도환(道煥)의 집에 가므로 나도 따라갔는데, 도환이 바야흐로 부친상을 입고 있었다. 조문을 하고 그대로 유숙을 했다. 밤이 되어 위씨 몇 사람이 왔는데 홍의는 함께 종족의 정의를 나누고, 나는 길 걷기에 피곤해서 곧 잤다.
계속...
사족 : 홍의재와 경회당이 우상동을 방문한 날은 1906년 7월 14일이며 우상동의 종손 위도환(長興魏氏 37세 관북봉규파 99년 대동보 6권373페이지)의 돌아가신 아버지(36세 휘 정엽)는 1905년 9월 5일에 돌아가셨으니 3년상을 지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위봉(魏棒 철종14년 1863 ~1943) 향년 81
長興魏氏 30世 안항공파, 字는 대언(大彦), 號는 弘毅齋, 진사 위문덕의 5대손.
父는 魏世祚, 母는 金海金氏 金俊譯의 女. 冠山 古下面 桂春里生. 강진 오남 김한섭 선생의 제자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보낸 간찰 6통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술합방 후 翌年 3월 가족을 이끌고 間島 和龍縣 西城村 南陽情舍에 정착했다.墓는 미상. 配는 해남윤씨다.기묘(1999년)대동보 3권 124페이지. 일반적으로 '봉식'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족보에는 '봉'(1863∼?)으로 되어 있다.
*경회 김영근(1865~1934)선생은 구한말 강진 태생의 유학자이다. 조선 후기의 격동기와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조선의 선비이다.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평생을 '위정척사'와 '항일호국'의 정신 속에서 살았다. 김영근은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자 1906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쳐 간도 망명을 결행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후에는 후학들을 길러내는 한편, 인도공의소 등 유림 조직의 일에 적극 참여하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김영근 문집 등 서적 29권 및 유묵13점은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에 있다. 2013년 9월 25일 강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문화방송(MBC) 'PD수첩' PD와 제20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회장, 제8대 제9대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출신으로 현재는 대전MBC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는 김환균이 그의 증손이다.
*위환국(魏桓國)(1852~1914) 36世,관북봉규파 6권 639쪽
자(字)는 관필(觀必)이요 호(號)는 청암(靑菴)이니 철종(哲宗) 임자(壬子) 10월3일생이며 박학굉사(博學宏詞)하니 위세소종(爲世所宗)하다. 갑인(甲寅) 2월1일에 종(終)하니 묘(墓)는 우상리임가동간원(右上里林哥洞艮原)이며 문인(門人)이 입갈(立碣)하다. ○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요 부(父)는 영승(榮昇)이며 12월7일에 졸(卒)하니 묘(墓)는 원평면가선동임원(元平面嘉善洞壬原)이다.
*위도환(魏道煥)(1876~?) 37世,관북봉규파 6권 373쪽
자(字)는 내덕(乃德)이요 호(號)는 홍제(弘齊)니 병자(丙子) 11월8일생이며 목천선생문인(牧泉先生門人)이다. ○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니 기묘(己卯) 3월24일생이요 부(父)는 중모(仲謀)며 부원군경후(府院君卿后)다.
장흥위씨 족보 자문 : 호산 위신복 장흥위씨족보편찬연구위원
탁마재 재치...
첫댓글 소를 타고 깅을 건너는 모습이 흔치 않은데 이를 처음 본 분들이 어리둥절했고 몹시 신기했군요. 소가 의외로 수영에 능합니다. 민족수난기를 맞아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관북세거지를 조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벽천
귀한 자료를 찾아 올려주는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표하며,
항상 씨족을 생각하는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소계
잘보고 조상님들의 옛발자취를
공부하고 갑니다./ 선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