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Paris)의 미술관 하면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피카소, 로댕 등 저마다 다양한 장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위의 미술관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퐁피두센터’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요. 이곳은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과 함께 '파리의 3대 미술관'이라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합니다. 파리에서 오래 거주했던 지인들이 하나같이 퐁피두센터를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하더군요.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정식명칭: 조르주 퐁피두 국립 예술문화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Pompidou)]’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 19대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복합예술문화센터의 필요성을 느꼈고, 국제 건축 공모를 통해 선정된 설계안(공동설계/건축가 : 렌초 피아노, 지안프랑코 프란치니, 리처드 로저스)으로 1972년에 착공하여 197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미술관 완공을 기다렸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미술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74년에 서거하셨습니다. 대통령의 예술에 대한 열정에 경의를 표하고자 그의 이름을 딴 ‘퐁피두센터’라는 이름이 붙여졌지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공공도서관, 음향·음악 연구소, 영화상영관, 서점, 카페/레스토랑 등을 갖춘 퐁피두센터는 현대 예술의 메카가 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혜안이 빛을 발한 경우지요. (※ 퐁피두센터는 2023년 말부터 개관 50주년을 맞는 2027년 초까지 리노베이션으로 임시폐장 예정)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예술문화센터(복합아트센터)는 어디일까요? 그리고 그 시작은 어땠을까요?
▼ 예술의전당 홍보관 : 예술의전당 '비타민스테이션'에는 예술의전당의 역사를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예술의전당 홍보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술의전당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아트센터의 설립, 그 시작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직후, 짧은 기간에 고도성장을 이룩한 나라입니다. 1970년대 산업화로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1980년대 삶의 질이 점차 개선되면서 시민들은 문화·여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인이 주목할만한 국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바로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86아시안게임)'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88서울올림픽)'이지요. 이 대회는 한국전쟁 이후 ‘폐허’와 ‘가난한 나라’로만 인식되었던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우리나라의 발전상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좋은 기회였습니다. 경기장 및 공공시설물과 같은 건축과 환경 디자인, 시각디자인,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화예술계의 협업이 이루어졌으며 한국 디자인의 수준과 규모가 향상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때 제작된 공식 포스터나 마스코트(호돌이), 기념품 등은 지금 봐도 손색없을 정도로 무척 아름답지요.
또한, 올림픽 개최와 기념을 위한 장소들도 서울 곳곳에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으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공원(1984년 착공, 1986년 완공)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삶의 수준에 부응하면서 발전한 문화예술을 담고 세계적으로 내놓아도 손색없는 복합아트센터 예술의전당 건립이 논의(1982년)되었어요. 영국의 사우스뱅크센터나 미국의 링컨센터, 서두에 소개해 드린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처럼요. 예술의전당 건립에 논의된 장소는 옛 돈의문 터가 있던 새문안로 일대(지금의 경희궁 근처)와 장충공원 근처의 남산 기슭이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토지 매입비와 가용면적 부족 등으로 강북지역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강남으로 눈을 돌렸고, 우면산에 둘러싸인 넓은 대지의 서초동 700번지가 낙점되었습니다. 이후 지명 설계 공모와 건설, 개관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아트센터를 향한 계획이 차근차근 이루어졌습니다.
지명설계 공모와 심사
예술의전당 건축을 담당할 건축가를 뽑는 과정은 먼저 국내외 실력있는 건축가 20여 명을 선정하고, 유사시설에 대한 설계 경험이 풍부한 한국인 3명과 외국인 2명을 지명건축가로 선정하고 이들의 기본 구상설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국내 건축가로는 김중업, 김수근, 김석철, 해외 건축가로는 바비칸센터를 설계한 영국의 크리스토프 본과 미국의 리처드 브루커가 지명건축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들의 구상설계안 5개는 예비심사와 본 심사 2단계의 공개심사를 거쳤는데 김석철 건축가의 안이 최종 당선되었습니다.
▼ 5인의 지명건축가들의 예술의전당 구상설계안 : 김석철, 크리스토프 본, 리처드 브루커, 김수근, 김중업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확대시키고 계기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예술의전당이 담당할 때 비로소 문화예술공간의 전국적 확대와 민중의 참여,
그리고 문화시설의 복지화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 건축가 김석철
▼ 건축가 김석철 ( 1943 - 2016 )
▼ 오페라하우스 단면 모형 : 김석철 건축가는 일용직 노동자도 무슨 건물을 짓는데 참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모형을 자비로 만들어 공사장 앞에 두었다고 합니다.
예술의전당 건설에서 전관 개관까지 1982 - 1993
1982년 건립 논의가 시작된 예술의전당은 1984년 설계 공모와 심사 발표, 기공식(1984년 11월 13일)이 열렸습니다. 기공식 당시 공사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대비한 공정(1986년 1단계 개관, 1987년 9월 2단계 개관을 목표)이었는데, 230,000㎡(7만 평) 대지에 건물면적 100,000㎡(3만 평) 규모로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예술센터, 그것도 완벽한 무대기술 조건을 갖춘 전용 극장을 짓기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있는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1988년 2월 15일 음악당·서예관의 개관, 1990년 10월 17일 한가람미술관, 예술자료관(현 한가람디자인미술관) 개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2년 12월 오페라하우스 준공을 마쳤습니다.
▼ 예술의 전당 건축모형 : 왼쪽부터 차례대로 한가람미술관(왼쪽 아래), 오페라하우스(가운데),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서울서예박물관(오른쪽 위), 음악당 건물(오른쪽 아래)입니다.
▼ 예술의 전당 건축모형 : 국립국악원
▼ 예술의전당 건물 중 가장 마지막으로 준공된 오페라하우스 (1992년 12월 준공)
▼ 오페라하우스 개관 10주년 기념주화, 예술의전당, 2003 / 예술의전당 기념 넥타이, 예술의전당, 1994 / 전관 개관기념 발행 우표, 대한민국 체신청, 1993
▼ 예술의전당 회원제도·회원안내문
▼ 당시 사진과 기사들
1993년 2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아트센터 예술의전당이 전관 개관했는데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날이지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았지만, 이곳의 역사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예술의전당이 1993년 전관 개관했으니 지금으로부터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걸요. 80, 90년대생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 아름다운 문화공간이 오래도록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예술의전당 홍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