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70호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쓰셨을까 (행13:21~23)
“그(아브라함)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3).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벗, 곧 친구라 칭하시며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친구끼리는 숨기는 것이 없거든요(요15:15). 이는 무한 신뢰를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마22:3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이것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마음이 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딱 맞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끼리도 마음이 딱 맞는 것이 어려울진대,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딱 맞는다니 부럽고 놀랄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딱 맞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바로 다윗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가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오죽하면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유독 사랑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셨을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순종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전제된 것입니다. 어떤 은혜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사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특출난 사람이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그에게 복의 근원을 허락하신 것이니, 이보다 큰 은혜가 없지요.
그것을 알기에 아브라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전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의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나이인 100세에 아들을 주셨는데, 그리고 그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약속을 믿는데, 무엇을 못하겠느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순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사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역시 엄청난 은혜입니다.
다윗 역시 그렇습니다. 다윗이 왕이 될 상입니까? 아닙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사울을 이을 왕을 택하러 갔을 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말째 다윗을 아예 제쳐두었습니다. 후보에도 오르지 않을 만큼 여리고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맘에 두시고 그를 택하셨으니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사했습니다.
그 예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성에 들어올 때 너무 좋은 나머지 춤을 추다 바지가 내려가서 그만 하체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내 미갈이 체통 좀 지키라고 지적하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알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습니다. 은혜를 물에 새겨서 그렇습니다. 은혜는 다윗처럼 심비(心碑)에 새겨야 합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살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12~14).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했던 것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갚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이나 다윗처럼 뭘 잘해서, 잘 나서 하나님이 택하사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전적인 순종이 필요하고, 다윗처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도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저를 택하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한낱 농사꾼의 자녀요, 세상을 좋아해서 죄 중에 있던 저를 택하사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시고, 더욱이 주의 종으로 부르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절대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저에게 맡겨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여러분, 사랑을 받아본 자가 사랑을 나눌 줄 알고, 은혜를 받아본 자가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할 때였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지다 보니 아브라함의 가축을 기르는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창13:9).
다윗도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입니다. 다윗에게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 이전에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위험에 처했을 때 요나단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도와주었거든요.
다윗은 요나단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내서 사울 왕의 모든 토지를 다 주었을뿐 아니라 왕자의 신분으로 신분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상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게 했을 정도로 융숭히 대접했습니다(삼하9:7).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에게 절대 손대지 않았고, 사울을 죽인 자를 칭찬하는 대신 죽여버릴 정도로 깊이 은혜를 새기는 자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압살롬을 피해다닌 것도 아비 이전에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또 다른 남자와 혼인한 미갈을 다시 데리고 온 것도 예전에 미갈이 아버지 사울을 속이고 다윗을 도망치게 한 사건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삼하3:14~16).
저도 저와 함께 예수중심교단을 일군 자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를 도와 일하는 주의 종들과 해외선교팀, 직원들, 저를 사랑하는 장로들과 성도들의 은혜를 늘 간직하고 지금까지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은혜를 생각할 것이냐, 현재의 이익만 생각할 것이냐’,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다 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제자리걸음 하며 산 40년의 세월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은, 애굽 땅의 종 되었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 광야에서 지키시고 입히신 하나님, 그리고 풍족하게 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고, 과거의 너희 신분과 모습을 기억함으로 늘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삽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103:2). 할렐루야!
울타리를 헐 때는 울타리 칠 때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심비(心碑)에 새겨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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