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그르떼교회 곡간, 좌측 2칸은 십일조 곡간. 가운데 3칸은 여신도회 곡간, 우측 끝 칸은 어린이 곡간.
우측 1칸이 어린이 곡간이다.
폭동 속에서도 꿈이 살아 있다니!
금번 추르찬드푸르 방문 길에도 누그르떼를 빠트릴 수가 없었다.
작년 5월 3일에 일어난 동북인도 마니푸르 폭동에서 메이테이들의 폭동에 맞서는 소수부족민들의 자위군 편성 시 누그르떼에서 많은 지원병이 나왔다. 일단 시민 방위군이 된 사람들은 당번이 되면 만사를 제쳐놓고 버퍼존 바로 앞에 있는 초소에 가서 근무를 해야 하므로 농사를 짓거나 농업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작년 <복돼지 프로젝트>를 실시할 때 파트너인 독립교회여신도회가 그런 현지 형편을 알아서 시민 방위군이 있는 가정에 우선적으로 돼지를 기증하였다. 그리고 금번에 함께 방문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시민방위군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수년 전에 목사와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던 마을의 어린이들의 소식을 듣기로 하였다.
누그르떼는 동북인도 마니푸르의 두 번째 도시인 추르찬드푸르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앞에는 들이 있고 뒤에는 야산이 있는 꽤 큰 마을이다. 추르찬드푸르에서 논길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개천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진흙이나 벽돌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담장에서 화사하게 피어 있는 부겐빌레아와 포인세티아와 함께 웃으며 맞아준다. 그리고 바나나나무와 파파야트리가 쉬어 가라고 손짓한다. 마을 중앙에는 교회가 있고 그 교회 마당 한 끝에는 목사관과 허름한 한 채의 곡간이 어깨를 맞대고 서있다.
금번 방문 길에는 비가 계속 내려서 진흙길을 달리는 차가 가끔 휘청거렸다.
교회의 사택 모임 장소에 많은 여신도회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목사님은 출장을 가시고 안 계셔서 장로님이 나오셔서 영접해주었다. 여신도 회원들과 서로 포옹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신도회 회원들의 관심사는 시민방위군으로 나가는 가정들이 직면하게 되는 생계위기와 폭동의 종식과 평화 회복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10시에 모여서 평화기도회를 가진다고 하였다. 여신도회 회장이 환영인사에서 우리의 <복돼지 프로젝트>가 ‘어려운 가정에 희망이 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오늘 나의 방문이 자기들에게 큰 위로 메시지’라고 하였다.
누그르떼 마을 역시 공산품의 가격은 폭등하고 농산물은 폭락하고 농사를 지어야 할 때는 일손들이 부족하고 농사철이 아닐 때는 일거리가 없어서 가난한 농촌이 겪는 고통이 평상시보다 몇 배나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으며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찡해졌다. 폭동 속에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챙기는 그들의 마음, 따스한 마음의 울림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들의 사랑의 실천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그들이 과거에 세 명의 선교사를 후원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그들이“지금도 해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나는 옛날에 교회마당에 있었던 나락 창고가 없어졌으므로 그들의 후원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요? 그 때 마당에 있던 창고가 없어졌는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입을 열어서 함께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창고를 헐고 다시 지었어요.”
“그래요. 그런데 안 보이더라고요. 어디에 지었어요?”
나의 질문에 모두들 큰 소리로 웃었고 남자 장로님이 한 분이 일어서서 설명하였다.
“입구에서는 잘 안보여요. 마당을 넓게 쓰려고 교회 마당 뒤쪽 울타리에 바짝 붙여서 지었어요.”
곡간을 ‘다시 지었다’는 말에 가슴이 찔렸다. 믿음에 얼마나 뜨겁고 깊기에 폭동의 상황에서 다시 곡간을 지었단 말인가? 믿음이 얼마나 굳세기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먼 곳에서 일하는 선교사를 위해 계속 이삭을 줍고 쌀을 모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 이 폭동 상황에서도 계속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계신가요?”
“그럼요. 선교사님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복음을 전하며 수고하는데 우리가 어렵다고 중단할 수 없지요.”
“이렇게 어려운 데도요?”
“예,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요.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았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함께 하니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니 어려워도 감당이 되요.”
“예. 그렇지요. 여러분들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에서 큰 자’이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잠시 멈추어도 되요.”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안돼요.”라고 대답하였다. 앞에서 모임을 주도해 가시는 회장님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게 우리 꿈이어요. 꿈은 아무리 힘들어도 중단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선생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알아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꿈을 자신들의 꿈으로 받아들였고 그 꿈을 위한 헌신과 노고를 진실로 기뻐하고 있었다. 감동으로 가슴이 떨렸다.
“참으로 여러분들은 위대하십니다. 마리아와 브리스가처럼 주님을 사랑하십니다. 참으로 복되십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어떤가요? 어린들도 이삭줍기로 선교사 두 분을 후원하였는데 지금도 하는가요?”
“그럼요. 지금도 우리 곡간 옆에 어린이 곡간이 있어요. 아이들도 이삭줍기와 좀도리 쌀로 계속 후원하고 있어요.”
“세상에 이런 비상시국에 어린이들도요? 보통 아이들이 아닙니다. 장차에 하나님께서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써주실 것입니다.”
“예. 그것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꿈입니다!”
순간, 마치 초대교회 마가다락방의 성령의 불에 휩싸인 그런 느낌이 들었다. 폭동 이전이나 폭동인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들의 믿음이 조금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나와는 너무 달랐다. 전율!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시며 친히 그들을 양육하고 계심이 느껴졌다.
십여 년 전에 어린이들이 이삭을 주워서 채운 곡간을 직접 목격하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 다음 해에 그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남인도 첸나이에서 동북인도 마니푸르에 가는 먼 여행을 하였다.
유치부에서부터 중등부에 이르는 학생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설교자를 응시하는 아이들의 눈빛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린이 곡간을 만든 용도와 목적을 물었다. 당시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고 싶어서 이삭줍기를 한다.’고 대답하였다. 아이들의 대답은 교사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그들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간 나에게 큰 울림과 위로가 되었다. 당시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요셉의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나 목회자를 꿈꾸는 어린이이가 있으며 앞으로 나오라고 초대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십여 명의 어린이들이 서슴지 않고 나왔다. 나는 그 어린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였고 그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나가서 복음을 전할 일꾼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나는 그 때 그 아이들의 소식이 궁금하였다.
“그 때 아이들 십여 명이 선교사와 목회자가 되겠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장로님이 대답하였다.
“아! 선생님,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현재 우리 교회 출신 아이들 중 세 명이 신학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 중의 한 명은 실맛신학교에서 하고 있지요. 그리고 졸업생 중에 한 명이 실맛신학교의 강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아마 선생님의 기도대로 앞으로 더 많은 일꾼이 나올 겁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있거든요.”
마니푸르폭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사랑이 짓밟혔다.
그러나 누그르떼 사람들은 계속되는 폭동의 위기 속에서도 꿈을 꾸고 있었다.
세 명의 신학생과 한 명의 신학교 강사는 개인의 꿈을 넘어선 그들 모두의 꿈이었다.
선교사 후원은 사람의 꿈을 넘어선 하나님의 꿈이었다.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지금도 그들은 폭동 속에서 꿈을 꾸고 있다.
모임을 마친 후 새로 지은 나락 곡간 앞에서 하나님의 꿈을 자신들의 꿈으로 꾸고 있는
여신도회원들과 어린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였다. 그리고 울었다.
2024년 11월 5일 묘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