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다니엘 12,1-3 히브리 10,11-14.18 마르코 13,24-32
2024. 11. 17. < 2017년부터 기념변경>
주제 : 우리가 생각할 가난의 의미는?
오늘은 2016년에 프란체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가난’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좋아할 수도 없고 날이지만,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그 낱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가난이라는 표현을 어떤 의미로 아십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아는 ‘가난’의 의미는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필요한 돈이 없다거나 삶의 변화를 위하여 생각하는 만큼보다 돈이 적다는 것을 가리킬 때, 우리는 가난하다는 표현을 쓸 것입니다. 그럴 때, 돈을 모으거나 갖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건이나 사고를 설명하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봅니다. 돈의 문제에서, 내가 부자로 살지 못하여 가난하다는 사람이 남의 것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이 분명한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그 위치를 옮겨오는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교황님께서 가난한 이의 날을 정하셨을 때, 이런 상황의 변화를 생각하셨을까요? 제가 교황님의 생각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현실에 맞추어서 올바른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하는 생각에, 가난은 오로지 돈과 관련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신앙에서는 처음부터 돈에 관련된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면 좋겠습니다. 돈이 없거나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바꾸는 것은 나랏님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서글픈 표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폭을 줄이고, 내가 만족하는 범위를 줄여서 나누고 가난을 탈출하도록 돕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세상의 가난한 이의 날에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가진 재산을 무조건 나누어 주고, 함께 쓰는 일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 일은 우리의 삶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사는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나라님인 ‘왕(王)’도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우리나라 현실의 대통령은 좋고 나쁨에 관한 판단은 다르겠지만, 부자들이 내는 세금을 깎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월급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회사의 법인세를 깎았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쓸 돈을 모아둔, 곳간이 비어간다는 서글픈 얘기를 합니다. 작년과 재작년에 국가에서 깎고 걷는 것을 포기한 세금이 91조원이 넘는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나라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쓸 돈이 없고, 창고가 비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가 힘들까요, 아니면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의 삶이 힘들까요? 우리나라의 나랏님은 부자를 편들면서, 부자에게 깎아준 세금을 더 힘겨운 사람들의 유리지갑에서 더 걷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랏님인 그가 왕으로서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제가 알 수는 없지만, 실제로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은 현실에서 가난하지 않다는 사람들이 적게 낸 세금과 그들이 내놓는 돈으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무언가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하는 일에 그들을 위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정부가 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진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권력을 쥔 사람과 정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을 말하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아니지만, 마태오복음서의 5장에 나오는 진복팔단의 첫 구절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말하는 가난도 돈과 관련된 것일까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부자로 살거나 돈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욕을 먹어야 하거나 잘못 사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들어야 할까요? 신앙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만, 그렇게 하는 행동이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할 때, 의미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가난은 무엇이겠습니까?
전통적으로 신앙에서 생각하는 가난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에 기대지 않고 내가 실천할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을 우리가 충실하게 갖고 드러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에 관하여 강조하는 표현에, 오늘 독서와 복음이 말하는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준비에 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올바른 준비는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