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세종보다 다재다능했던 문종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이나 표준 영정에서 보이는 세종의 풍채는 약간 넉넉한 느낌일 뿐이지만, 사실 세종은 젊어서부터 고도 비만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는데다, 식성까지 육식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태종이 죽기 직전 “비록 삼년상 기간이라 하더라도 주상의 수라에 고기를 끊이지 않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더욱이 2달 만의 세자생활 후 21살에 즉위한 세종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무려 28가지나 되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바람에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력도 거의 잃게 되었다. 전형적인 당뇨병 증세였다.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치세 말기 세종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1445년부터 약 5년간 세자(문종) 이향(李珦)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기 때문에 문종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약 7년 정도가 된다.
이 대리청정은 세종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이루어졌고 1447년부터는 아예 세종이 특별히 관료들이 세자에게 신(臣)이라 칭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사실상 세종의 업적 상당 부분이 문종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를 겸한 천재 군주 문종
어느 모로 보아도 르네상스적인 만능 천재였던 아버지 세종이었지만, 어떤 면에서 문종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세종은 무(武)는 취약했지만, 문종은 활을 잘 쏘았을 뿐 아니라 승마와 병법에도 능했다. 이른바 ‘밀덕’으로서 뒤에 임진란 때 대활약을 한 로켓 추진식 화살 병기인 신기전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향은 학문에도 능해 세자 책봉 3년 만인 10살이 되는 1424년(세종 6)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다음해에는 바로 맹자를 배우는 등 경서들을 빠르게 익혀나가 세종과 사대부들의 기대를 한껏 높여나갔다.
또한 세자는 풍채로 보나 용모로 보나 A급 ‘존잘남’이었다. 명나라 사신이 세자를 보고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하므로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고 찬미하기도 했다. 문종은 체격이 크고 수염이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였다고 한다. 궁궐의 무수리나 궁녀들도 세자가 밖으로 나오면 나무 뒤에서 숨어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애를 썼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런데 이 무슨 기구한 팔자인지, 모든 것을 다 갖추게 있던 세자에게 마누라 복 하나만은 지지리도 없었다.
첫째 세자빈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세종이 낙점했을 것이 분명한데, 아들의 이성 취향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나이가 세자보다 2살 위인 16살인데다 박색이었다고 한다. 세자는 도저히 마음을 줄 수 없어 겉돌기만 했다. 그러자 세자빈이 한 계책을 꾸몄는데 그것이 바로 죽을 꾀였다. 이른바 압승술(壓勝術)을 쓴 것인데, 이는 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워 삿된 기를 눌러 없애는 방술(方術)을 일컫는다. 일종의 무속 내지 도교의 방책이다.
휘빈 김씨가 채택한 방술은 당시 세자가 좋아하던 덕금과 효동이라고 하는 두 시녀의 신발을 불에 태운 뒤 술에 타서 세자에게 먹이는 것이고, 둘째는 암수 두 뱀이 교미할 때 흘린 체액을 수건에 묻혀 차고 다니는 것인데, 이런 비법을 압승술이라고 했다.
휘빈 김씨는 두 가지 압승술을 열심히 행했지만 효과는 보지 못하고 소문만 퍼져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조선 초기에 유교 예법의 확립에 힘을 쏟는 세종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휘빈 김씨는 사가로 쫓겨났고, 집안에서는 가문의 수치라 해서 자결로 삶을 마감했다.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죽음에 이른 셈인데, 슬픈 일이었다.
두 번째 세자빈을 고르는 데는 아들의 취향을 십분 고려하여 미모의 신붓감을 고르려 했다. 미모보다 덕이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근본이라고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이에 맞선 세종의 논리는 이랬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덕이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없으므로 용모를 먼저 보는 것이다,”
이번에는 치열한 미인 콘테스트가 벌어졌다. 숫제 토너먼트식으로 벌어진 경염대회 끝에 두 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로 결정되었는데, 아뿔사! 두주불사의 술꾼인데다가 나인 소쌍과 동침하는 동성애 사건이 발각되는 바람에 이 역시 사가로 퇴출되어 자결로 생을 끝냈다.
마지막 궁여지책으로 세자가 총애하던 후궁 승휘 권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했는데, 권씨는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다.
꽃미남 세자에게 온 세 여자가 다 이처럼 요절하자 감히 왕실과 사돈을 맺겠다고 나서는 집안이 없었다. 세자 역시 더 이상 재혼에는 뜻이 없어, 문종은 조선왕 중 유일하게 중전이 없는 홀아비 왕이 되었다.
이것이 어쩌면 단종의 비극을 불러온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 문종마저 죽자 외가도 없이 천지간에 혈혈단신인 고아가 되었고, 이것이 숙부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필요조건이 되었다고 하겠다.
2. 문종의 측우기 발명은 유럽 최초인 카스텔리의 우량계(1639)보다도 무려 198년이나 앞선다.
요절하지 않았으면 성군이 되었을 문종
문종의 재위 기간은 1450년 2월 22일에서 1452년 5월 14일로, 2년 남짓밖에 안되지만, 세종의 대리청정 기간까지 합치면 거의 7년 이상 실질적으로 조선을 통치했다. 따라서 남긴 업적도 적지 않았는데, 먼저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언론의 활성화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역사책을 편찬했다. 하고, 국방 분야에서는 병법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다.
경연 때 병서를 강연하자고 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 유례가 없는 밀리터리 덕후였던 문종은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제시했다. 재위 2년 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들이었다.
1445년에 10사(司)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했으며,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의 편찬한 데 이어,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특히 화약 무기의 개발에 힘써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때 만든 화통만도 1만 여 대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의 화약무기 부문은 중국 다음으로 가장 발달된 무기 체계를 자랑했는데, 이는 나중에 임진란 때 크게 활약하게 된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세계에서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이 바로 문종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장영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측우기의 제작 아이디어는 사실 세자 시절의 문종에게서 나왔다. 가뭄이 들자 땅을 파 젖은 깊이를 쟀는데, 측정이 부정확하자 구리통을 만들어 비 온 양을 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규격과 재질을 명확히 지시했을 뿐 아니라, 지방에서 사용할 측우기는 값비싼 구리가 아닌 도자기 등으로 제작해도 된다는 지침까지 내려주었다.
이리하여 1442년(세종 24) 규격화된 측우기가 전국 300여 군-현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전국 강우량 측정 시스템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는 유럽 최초인 카스텔리의 우량계(1639)보다도 무려 198년이나 앞선다. 1957년부터 시작된 5월 19일 ‘발명의 날’은 이를 기념해 제정된 것이다.
문종은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및 산술(算術)에도 정통했고, 예(隷) · 초(草) · 해서(楷書) 등 서도에도 능하여 다음과 같은 평이 전한다.
“상감의 글씨는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진기한 기운이 있어, 왕희지의 오묘한 경지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돌에 새긴 두서너 가지만 세상에 전할 뿐,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한 글씨는 필적을 보기 드문 것이 애석하다.” (김안로 <용천담적기>에서)
이처럼 다재다능한 문종이었지만,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의 삼년상을 연속적으로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결국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7세를 일기로 경복궁 천추전에서 병사했다.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성군이 되었을 문종의 안타까운 죽음-. 이것이 조선 역사의 한 터닝 포인트였다. 만약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선은 세종-문종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를 맞아 문화가 꽃피고 국운이 상승하는 일대 호기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탈, 사육신 사건 등 정치적인 대격변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조선 500년 역사토픽 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