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정읍의 문화 보물 칠보 (七寶)
나는 중매결혼 했다. 집사람은 옹동면 사는데, 칠보사람이라고 해서 선을 보러갔다.
그래서 칠보의 일곱 가지 보물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1. 무성서원 :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국어학자들이 역사상 최고(古)의 시인이라는 신라 말 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님의 위패가 모셔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년 후에 내 후손 중에 종교지도자가 나온다고 예언하셨다. 천년후 후손인 최제우가 천도교를 경주에서 만들었지만, 동학농민혁명으로 꽃을 피운 곳은 이곳 정읍이고, 면암 최익현(최치원 후손)과 임병찬이 전국 최초로 의병운동을 일으킨 곳도 이곳 무성서원이다.
2. 화경폭포(火鏡瀑布) : 남한 최초의 유역변경식(섬진강) 수력발전소를 지어 옥정호 물을 낙차가 큰 칠보 쪽으로 6.2KM 굴(터널)을 뚫어 연간 1억8천만kWh를 발전한다. 또한 옥정호 물로 정읍 고부평야 논들을 천수답에서 벗어나 해마다 풍년들게 하는 경제적 일등공신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름이 재미있는 것은 선조들이 발전소가 생길 줄 예견하시고 그 산 이름을 화경산이라 하였다. 그래서 화경 폭포로 작명하였는데 화경(火鏡)은, 볼록렌즈란 옛 표현으로, 초점을 맞추면 종이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조상님들이 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만들 것에 대한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지관들은 주변 산세에 군신봉조혈(君臣奉詔穴)이 있다고도 한다.
군신봉조혈은 국태민안(國泰民安) 한다하니 발전소로 국가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될 형국이라고 해석 할 수 있겠다.
칠보 발전소는 민간인들이 언제든지 견학할 수 있게 개방되어있다.
3. 상춘 가곡: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화된 가사작품으로 문학적 해설은 접어두고, 정극인 선생님이 칠보로 오게 된 연유가 특이하다.
성균관 유생 시절 세종대왕이 성균관에 들렀는데, 학생이 정극인 혼자뿐이므로 세종 : 왜 그대 혼자만 있는고?
정극인 : 태조대왕 마마께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표방하셨는데 전하께서 사찰에 자주 왕림하시니, 우리 유생들도 전부 전하를 본받아 사찰에 가서 공부하라 하였습니다.
세종은 아버지의 죄를 씻고 싶어서 절에 다녔는데, 새파란 유생이 자기 정곡을 거침없이 찌르자 기가 막혀서.
세종 : 이놈 당장 목을 치거라 ( 라고 호통을 치자 곁에 있던 황희 정승이)
황희 : 아니 되옵니다. 전하! 순간의 분함을 참지 못하시고 저렇게 젊은 패기 있는 유생의 목을 치심은, 그동안 성군으로 추앙하던 백성들 앞에서 성덕을 잃는 것이니 참으시옵소서.
(세종에게 나이가 아버지뻘 되는 황희정승이 말리고 그 말이 맞는 말이라 화를 누르고 명을 번복하기를)
세종: 이자를 북쪽 국경으로 귀양 보내라.
하여 변방으로 돌다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을 뺏는 궁중의 피바람을 보고 질색하며 칠보로 내려와서 지은 노래다.
4. 정순왕후 유비 : 여산(礪山)송씨 송연순 송세림 등의 학자들이 왕자의 사부로 지내며 궁중을 드나들다. 단종의 왕비를 여산송씨로 추천하여 이조 500년 동안 전북에서는 한 분의 왕비가 나왔다. 일찍이 청상과부가 되었지만 팔십까지 장수하였다.
후실이지만 태인 대각교에서 만난 최숙빈까지 합하면 두 명의 왕비가 나왔으니 왕비 명당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서울대 교수가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주변 산의 기(氣)가 스물여섯 바퀴를 돈다고 하였고, 옹동 칠보와 산내 산외면에 명당이 많아서 자기 가문 주변 친지 선산만 벌초를 해줘도 7-8월 두어 달에 초임 한 해 봉급 이천만 원 벌었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5. 분충거의(奮忠擧義): 태조에서 명조에 이르기까지 200년조선왕조 실록을 임진왜란 때 한양 춘추관 실록은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분노한 민중이 태웠다. 성주, 청주, 사고는 왜군이 태웠다는 설과, 왜군에게 정보를 뺏길까봐 백성이 태웠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세 곳 완전히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만 남았다.
유림이 누구에게 시키고 어디로 옮길까? 논의결과 정읍출신 손홍록과 안의선생의 노고로 내장사 용굴로 옮겨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592.6.22. 옮긴 그날을 기념하여 매년 6.22일은 ‘문화제 지킴이의 날’로 지정되었다.
특히 안의 선생님은 자신의 가솔과 재산을 들여 옮겨, 후에 왕이 벼슬을 하사하였어도 사양하였다.
다른 나라도 실록이 많이 있지만 우리 실록은 왕이 절대 볼 수 없게 하였다. 왕의 눈치를 안 보고 역사의 평가를 받게 함으로써 왕들이 함부로 국정을 이끌지 못하도록 하는 자정(自淨)작용을 하게 함으로써, 500년의 긴 정권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6. 김희련 공신록권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공신이 수록된 것으로 두루마리 길이가 925cm나 되며 700명이 수록되어있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역적으로 삼족의 멸문지화를 당할 각오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런 공신록권 등 문화제를 관련 기관이나 박물관에 기증하기 싫으면 기탁(寄託: 보관만 전문기관에서 하고, 본인이 언제라도 되찾아 올 수 있는 물건 )하면 좋을 것 같다.
문화제 담당자가 아무리 기탁 하라고 해도 안 하다가 나중에 보면 쥐가 파먹어 훼손한 상태에서 가져온다고 했다.
7. 고현향약(古縣鄕約): 정극인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으로 권선징악(勸善懲惡) 상부상조(相扶相助)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을 시행한 곳이다.
최치원 선생 때부터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현(古縣) 8경과 칠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 고현8경도 살펴보면
1. 은석낙조 (銀石落照): 천변 돌에 낙조 곱게 질 때 은색으 로 아름답게 보인다.
2. 석탄모종(石灘暮鍾) : 석탄사(寺) 저녁 종소리 은은하니
3. 행단춘풍(杏壇春風) : 공자가 은행나무 단위에서 강학한데
서, 학문을 닦는 곳 의미하고 공부하기 좋은 봄바람이 분다.
4. 세류앵가(細柳鶯歌) : 세류마을 버드나무 앵무새 노래 (연인들 노래)
아름답고
5. 강정어화(江亭漁火) : 강가 강정정자에서는 물고기 매운탕을
끓여 손님을 초대하고
6. 유상곡수(流觴曲水) : 냇물 줄기를 돌려 그 위에 잔을
놓고 시를 짓고 물고기 안주로 술 한잔하고
7. 무성현가(武城絃歌) : 서원 현가루에서는 거문고에 맞춰
노래하자 (시경은 전부 지금의 랩송에 가까운 노래다.)
8. 시산명월(詩山明月) : 선비들이 지은 시가 산처럼 쌓이고,
그 위에 밝은 달이 떠 있다.
너무나 시적이로 주변 산세를 노래한, 문화 수준이 높은 선비들이 많이 살며 학문을 닦던 곳임이 틀림없다.
이외에도 정읍과 고부 등 향교와 남고서원 등에도 선비가 많아 방각본(坊刻本) 등을 제작하여 백성들의 지식을 보급했다.
의식있는 선비들이 주민들 의식을 깨워 동학혁명, 독립운동, 3.1운동의 뿌리를 다졌다. 과거시험 과목 외에 농사직설(농사짓는 법) 구황촬요(흉년에 먹어도 되는 식물 등을 기록한) 등 서민을 위한 책을 한글로 제작하여 보급한 애민사상의 고장이기도 하다.
내 아내는 옹동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마을에서 와서 그런지 나하고 궁합이 잘 맞는다. 어머님이 나의 태몽이 말(馬)이라 하셨다.
아내는 칠보에서 와서 그런지 일곱 가지 보물을 가져왔다.
1. 칠남매 막내인데 시부모님을 13년간 잘 모셨다.
2. 아버님이 장손이라 많은 제사를 잘 모셔주었다.
3. 아들 둘 딸 하나 아이를 셋이나 낳아 주었다.
4. 우리가족 친지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준다.
5. 직장과 사회생활도 잘 한다.
6. 아이들을 대학까지 잘 보내고 공무원 합격하게 잘키웠다.
7. 내가 모르는 결점을 지적해서 나의 발전이 있게 하였다.
나에게 옹동여자를 칠보여자라고 소개한 중매인들의 재치에 감사하며 칠보라는 지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석, 금, 은, 보다도 칠보 공예 보다도 더 아름다운 문화적 가치가 있는 우리 고장의 정신문화유산을 널리 홍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