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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일 목요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제1독서 : 말라 3,1-4
복 음 :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을 읽다가 여검사의 초임 검사 때의 경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초임 검사 때이니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할까요?
그런데 조사받는 사람이 이 여검사를 향해 계속해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불쾌해서 “아가씨라뇨!”라고 짜증 섞인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조사받는 사람이 “아! 그러면 아줌마입니까?”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검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검사로 보이지 않으니, ‘검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인데
짜증을 냈던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듣고 싶은 소리가 있고, 또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갖춰야 했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런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짜증 내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칭찬, 사랑, 기쁨, 행복의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고,
그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에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실 때,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0-32)라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아기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정답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나 예언자 역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기에,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고,
보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그에 걸맞게 생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적합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지극히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처럼 ‘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기관지가 약해서인지 목이 따끔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있으면 말없이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감기는 저와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증상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목이 잠기면서 말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미사준비를 했는데 도저히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습니다.
부득이 신부님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기꺼이 미사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몇몇 만남도 취소하고 조용히 집에 머물렀더니 감기는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감기로 말을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어의 문제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과 있으면 아무래도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지만 저의 영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경우에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던 즈카리야는 속으로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요한을 출산할 때까지 말을 못하였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과 깊은 산중의 스님들은 자발적으로 묵언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감기와 함께 지내면서 꼭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 칭찬과 격려의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봉헌은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이었습니다.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와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기도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정점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 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라삐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매온이 찬미합니다.
(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릅니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 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임을 밝혀줍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된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의 뜻을 깨달아 알아듣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가 모세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한 것과 예수님의 성전 봉헌을 기념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날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한 것을 따라 참회 행렬을 했었는데,
이 행렬에 사용된 초를 장엄하게 축복하던 전통이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하는 것으로 전례 안에 정착되었다.
맏 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이것은
또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그 대가로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때에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잘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위의 칭송이나 칭찬을 바라게 되고,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나 큰 기쁨이나,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을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닌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 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동안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 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봉헌의 여정
-참 아름답고 복된 봉헌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봉헌 축일은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주님 봉헌 축일이면 으레 생각나는 25년 전 주님 성탄 대축일날에 쓴 고백 시입니다.
여러 번 인용했지만 인용할 때마다 새롭습니다. 여기서 물론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수도자는 물론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주님 향한 봉헌의 열정과 갈망이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참 좋아하는 봉헌성가 210장입니다.
오늘 시간되면 찾아 5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2절까지만 인용합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찬미하게 하소서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소서”
2. 며칠 전 존경하는 선배 수도사제의 영명축일에 주고받은 일부 내용입니다.
제가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에 이에 대한 제 답변입니다.
다음 같은 요지의 말씀을 드렸고 내심 만족했습니다.
“수도자에게 은퇴가 어디 있습니까?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영적전쟁에 말씀 공부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고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3. 하루하루 날마다 수도원 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무리 하늘 높은 나무라도 하늘에서 내려보면 참, 작을 것입니다.
“하늘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도 생각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보시기엔 사람들이 아무리 잘났느니 못났느니 해도
결국은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소 참된 겸손입니다.
그래도 하늘 높이 하늘 향해 쭉쭉 자란 가로수들을 보면
내 봉헌 삶의 내적 성장을 묵상하게 됩니다.
정확히 2009년에 심은, 14년 된 작은 애기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이렇게 거목이 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봉헌 삶의 충실성을 상징하는 나무들의 성장입니다.
과연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하늘의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삶인지 묻게 됩니다.
4. 또 하나는 제 집무실 커다란 초록판 게시판입니다.
흡사 초록빛 하늘을 연상케 합니다. 요즘의 각별한 이용에 행복합니다.
집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참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메모지에 이름을 써서 초록빛 하늘 같은 게시판에 붙여 놓고
자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대로 하나하나가 봉헌된 귀한 하늘의 별들 같은 존재로 생각됩니다.
오래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마도 우리를 그리워하는 주님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의 봉헌과 더불어 우리의 봉헌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축복,
찬미의 봉헌, 감사의 봉헌등 끝이 없습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사람이라 하여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됐기에 봉헌이란 말을 이해하지만,
하느님을 모르는, 믿지 못하는 이들은
도저히 봉헌이란 깊고 아름답고 신비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정의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엄의 근거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을 뜻합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대 신비주의자 랍비 여호슈아 헷쉘의 고백이 진리입니다.
시간 되면 김춘수 시인의 ‘꽃’도 읽어보시며
우리의 복된 봉헌자이자 성소자로서의 신원에 대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막연한 봉헌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2018.10.16
이렇게 주님을 고백할 수 있음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봉헌의 모범을 오늘 말씀에서 만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교회 하늘에는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봉헌 삶에 충실했었던 성인들이 별들처럼 교회를, 어둔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모가, 시메온 노인이, 한나 할머니가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세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모두가 하루 이틀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리 정주의 수도자들처럼 항구히, 한결같이 평생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도 이런 봉헌 삶에 항구한 이들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만이 아시는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봉헌의 축복입니다. 봉헌해서 축복도 받지만, 봉헌 자체가 보상이요 축복입니다.
봉헌의 삶이 주는 깊은 내적 평화와 안정입니다.
봉헌으로 텅 비워진 내면에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니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도대체 이보다 더 큰 행복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봉헌의 축복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말라기의,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예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매일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기 전 바치는 시메온의 찬가입니다.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찬가만 잘 바쳐도 선종의 은총일 것입니다.
한나 역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에 그 아들입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나자렛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봉헌 삶에 충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니 그대로 봉헌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니, 봉헌의 삶이 바로 참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봉헌 축일이자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하루하루 모두를 주님께 사랑으로 봉헌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봉헌과 더불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부활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도 있습니다.
봉헌의 빛이자 봉헌의 어둠입니다.
봉헌의 기쁨과 평화만 있는 게 아니라 봉헌의 슬픔도 있고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할 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성모님 역시 시메온의 예언대로 반대 받는 표징의 아드님으로 인해
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병고나 상실의 아픔도 괴로움도 슬픔도 불안도 두려움도
통째로 모두 주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좋은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것들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께 봉헌할 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이래야 삶은 짐이 안 되고 선물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봉헌 삶에 충실할 때 마지막 봉헌의 축복된 죽음입니다.
봉헌의 은총, 봉헌의 선택, 봉헌의 훈련, 봉헌의 습관입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평생 매일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봉헌 삶의 요약과 같은 제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2012.9.15.-아멘.
성 베드로 대성전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에 ‘축성 생활의 날’을 지낸다.
이날 전례에서 루카 복음서의 구절은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으로 데려온 아기 예수님 앞에서 의롭고 나이 든 시메온이 보여준 반응과
女예언자 한나의 반응을 전해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대 성전에서 남녀 수도자 대표들이 함께한 가운데 미사를 주례했다.
교황은 시메온의 인내심을 강조하면서 시메온이 보인 행동에 초점을 맞춰 강론했다.
(시메온의 인내심은) 오늘날의 남녀 축성 생활자들의 삶에서도 많은 것을 말 할 수 있는 인내심이다.
미사는 교황이 불 켜진 초를 손에 들고 입장하면서 시작됐다.
미사에 참례한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로 불 켜진 초를 손에 들고 있었다.
(미사 직전) 어둠에 둘러싸였던 대성전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초 축복과 신자들에게 성수를 뿌리는 예식을 마친 다음,
교황이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에 이르러(미사를 시작하고),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기 직전에서야, 불이 밝혀져 구석구석을 비췄다.
시메온의 인내심
루카 복음사가는 시메온이 평생동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성전에 봉헌된) 그 아이를 보았을 때 그 아니가 ‘사람을 비추기 위해 온 빛’임을 알아보았다고 전한다.
교황은 강론을 시작하면서,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우리 일상의 단조로움”과
우리가 하려는 작은 일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시메온이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메온은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시간의 흐름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나이 든 사람이지만, 마음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긴 생애 동안 때때로 상처받고 낙담했을지 모르지만, 희망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약속에 충실했습니다.
과거의 쓰라림이나 인생의 황혼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우울함에 자신을 내팽개쳐 두지 않았습니다.”
항상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인내심
시메온은 그가 구원을 보는 날까지 깨어 있을 수 있었다. 끈기 있는 기다림을 희망할 줄 알았다.
교황은 시메온이 기도를 통해 인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이 백성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불충에도 지치지 않으시고 항상 회심하길 기다리시는
“자애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심을 항상 믿었다.
교황은 “시메온의 인내심은 하느님의 인내심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열정을 요구하시며”,
우리가 당신 말씀을 듣지 않을 때도 우리에게 말씀하려 하신다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 희망의 이유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침 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멀어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찾으러 오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다 돌아올 때, 그분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항상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힘(resilienza, 회복탄력성)과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르쳐 줍니다.”
“저는 로마노 과르디니를 기억하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내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변화할 시간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나약함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에서)”
우리의 인내심
우리는 하느님과 시메온을 보면서 인내심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
교황은 인내심이 단순히 관용이나 어려움에 대한 참을성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인내심은 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짐을 짊어질 수’ 있게 해주고,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마음의 굳셈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점들을 견디게 해주고, 타인들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선 안에서 인내하게 만들고,
지루함과 게으름이 우리를 엄습할 때도 걸음을 멈추지 않게 합니다.”
실망을 넘어 신뢰하며 기다리기
그렇다면 인내심을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
교황은 남녀 축성 생활자들을 언급하면서 세 개의 “장소”를 제시했다.
첫 번째 장소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다.”
그곳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열정을 가지고 응답한 후에 걸어가는 여정이며,
실망과 좌절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우리의 일에 대한 열정이 우리가 원했던 만큼의 결과에 미치지 못하고,
우리가 뿌리는 씨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도의 열정은 식어버리고, 영적 건조함에 더 이상 아무런 대처도 못합니다.
우리 축성 생활자들의 삶에서 실망을 준 기대 때문에 희망이 닳아 없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인내해야 하며,
하느님의 시간과 하느님의 방식으로 신뢰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주춧돌입니다.”
교황은 축성생활자들의 삶을 때때로 공격하는 내적 슬픔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것이 “우리 내면을 갉아 먹는 벌레”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러한 내적 슬픔에서 우리가 도망쳐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 생활에서 인내하는 법을 알아야
인내심을 살아야 하는 두 번째 장소는 공동체 생활이다.
공동체 생활은 항상 평화로운 것도 아니며 항상 분쟁이 없는 곳도 아니다.
“평화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자신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교황은 영적 식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무일도의 한 구절을 인요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다가 거칠게 출렁일 때 물고기를 볼 수 없지만, 바다가 잔잔할 때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어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고 참을성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좋은 식별을 할 수 없고 진실을 볼 수 없다”며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는 상호 간의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견디는 것, 다시 말해 형제자매들의 삶과 심지어는 형제자매들의 약점과 결점까지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이를 기억합시다.
주님은 우리를 독창자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합창단의 일원으로 부루십니다.
때로는 音離脫이 나더라도 항상 함께 노래하라고 부르십니다.”
慈悲로 세상을 바라보기
인내심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살아야 한다. 세상이 바로 인내심을 살아야 하는 세 번째 장소다.
교황은 “인내심을 가지고 빛을 기다리며, 잘 풀리지 않는 일들에 대해”
주님께 불평하지 않았던 시메온과 한나의 태도를 다시 한번 언급했다.
“우리는 불평불만의 포로로 남지 않기 위해 이러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불평불만의 달인이고, 불평불만의 학위를 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평불만에 아주 능숙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불평불만은 우리를 속박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와 같은 말을 듣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우리말을 듣지 않아요.’
‘더 이상 성소자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문을 닫아야 해요’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아, 나네게 하는 말이니!’ 이처럼 불평불만의 이중창이 시작됩니다. (...)
때로는 역사와 우리 마음의 밭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인내심에 반대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조바심을 보입니다.
지금 아니면 안돼. 지금, 지금, 지금 바로 해야 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미덕인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희망을 잃은 많은 남녀 축성생활자들을 보았습니다.
단지 참을성이 없어서 희망을 잃은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용기 있는 인내심
교황은 축성생활자들에게 “우리 삶에 대한 도전”처럼 들리는 말과
가만히 멈추어 있을 수 없는 삶에 비추어 양심 성찰을 하도록 권고했다.
교황은 “우리 눈도 구원의 빛을 볼 수 있고, 그 빛을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시메온과 한나의 인내심을 하느님께 청하라고 당부했다.
이어 성령의 권유에 귀 기울이며 “삶의 여정을 걸어갈 용감한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험담은 멀리하되, 유머 감각은 잃지 마십시오.
미사를 마치면서 교황청 수도회성(정식명칭: 교황청 축성생활회와 사도생활단 성) 장관
주앙 브라스 지아비스(Juao Braz de Aviz) 추기경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교황에게 짧은 인사말을 전했다.
이에 교황은 브라스 지 아비스 추기경을 비롯해 모든 남녀 축성생활자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과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시기에 보여준 증거에 대해 감사를 전했다.
교황은 이같은 상황에서도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공동체 생활을 위한 유용한 권고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첫 번째는 험담을 멀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험담을 피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과 상황 심지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좋은 마음으로, 웃어넘길 줄 아는 것입니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되, 험담은 피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권고하는 이것은, 말하자면, 너무 성직자적인 조언이 아니라 인간적인 조언입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험담하지 마십시오.
(험담이 나오면) 혀를 깨무십시오.
그리고 유머 감각을 잃지 마십시오. 유머 감각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황의 마지막 말은 많은 어려움과 성소자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에 대한 격려의 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께서 위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뒤를 따릅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