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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창3:11~15
◎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무엇이라 물으셨나요(11)? 하나님은 ‘누가’ 아담의 벗었음을 알려주었냐고 물으시며,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여기서 아담의 범죄를 알고 있으시면서도 아담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담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 물으셨습니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본문에서는 인칭 대명사가 특징적으로 명확히 구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3:10절에서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대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묻고 계시는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너의’ ‘네게’ ‘내가’ ‘네가’ ‘그가’ 라는 표현들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질문에서 아담의 벗었음을 알려 준이는 누구입니까? 벗었다고 말해준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탄인 뱀이 유혹하여 범죄함으로 알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탄이 너에게 벗었음을 알게 했냐고 물으시는 질문일까요? 아닙니다. 이 질문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숨었던 이유가 벗은 것 때문이라고(3:10) 말했지만, 사실은 벗은 것이 원인이 아니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아담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시는 음성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누구냐? 라는 물음에 ‘바로 제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다고 나오길 바라시는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결코 벗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숨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벌거 벗은 것을 깨닫게 된 원인이 아담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반어법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내가 네게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는 질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이것을 아담이 진실된 회개로 하나님앞에 나오기를 바라시는 심정으로 묻고 계신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숨고 피하려고 하는 아담의 내면을 보시고 그의 죄를 드러내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원인을 벗었음에서 찾으려고 한 아담에게 그 본질적 원인은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하신 열매를 먹었기 때문임을 지적하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이미 범죄한 것을 아셨지만, 아담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잘못을 저지른 어린 자녀에게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의 잘못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왜 이리 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 자녀를 품어주고 보둠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물으면서, 어린 자녀가 잘못을 인정하였을 때 잘못을 용서해 주며 감싸주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와 어린 자녀와의 사랑의 관계성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질문도 부모와 같은 마음처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목적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했을 때 감추려 하지말고 ‘네가 어디있느냐?’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회개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하나님이 죄를 지적하자 아담은 무엇이라고 변명합니까(12)?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라는 변명은 결국 원인을 누구에게 돌리는 것입니까? 어쩌면 우리도 잘못을 했을 때 하나님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들은 없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또한, 죄로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담의 변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신 여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주셔서 생긴 일입니다라며 하나님께 책임과 원망과 원인을 돌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까지 공범자(共犯者)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이 죄로 인해 생겨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둘 사이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이 사실은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던 때부터 이미 목격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완전한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하시며 영광스럽고 의로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아담에게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크나큰 틈을 만들어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에서 아담은 하나님 때문이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아닌 책임을 떠 넘기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라는 말에 다시한번 주목해 봅시다. 즉, 그것은 실패, 결점, 악조건, 질병, 죽음 등등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악과 나쁜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마치 유혹이나 비극을 주신 이가 하나님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정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유혹한 적이 없습니다. 불행이나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범죄가 들어오고 죽음을 야기시킨이는 아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셔서’라고 우리는 늘상 입으로 말하곤 합니다.
아담의 이런 모습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살았던 과거가 있는데 왜 나에게 고통이 생기게 하셨냐고 불평하지는 않았는지요? 아니 더 나가서 하나님 때문이라고 외치고 절규하며 저주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잘했는데 하나님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고 심판만 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담의 죄를 이어 받은 후손으로 당연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것이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곰씹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아라! 여호와의 능력이 부족하여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귀가 어두워서 너희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을 갈라 놓은 것이며, 너희 죄 때문에 주께서 너희에게 등을 돌리셨고, 너희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 것이다.’(쉬운성경 사59:1~2)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시험받는 일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약1:13:16)
◎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왜 나무 열매를 먹게 되었다고 대답합니까(12)? 아담은 결국 누구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창2:23절의 모습과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도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모습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아담은 왜 나무 열매를 먹게 되었다고 대답합니까?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주므로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 문단에서 아담이 범죄의 일차적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데 이어 본문에서는 범죄의 이차적인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여자 그가’라는 표현을 통해 바로 ‘그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즉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직접적으로는 그에게 선악과를 건네 준 여자에게 근본적으로는 여자를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담의 책임전가(責任轉嫁)는 만약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이었다면 어떤 답변이 나왔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와를 자신에게 데리고 왔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의지했었습니다. 온전한 한 몸을 이루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가정은 서로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사랑의 관계는 깨어져 버렸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분리시킨 것 만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도 틈을 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잘못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당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는 전혀 먹을 마음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권하기 때문에 먹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좀 고상하겠지. 나는 그래도 괜찮겠지라는 환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한 사람들이며 여전히 그 죄 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다만 좀 더 훈련되고 훈련되지 못한 차이만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정확히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탓하기를 좋아하는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안이나 잘못에 대해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로 인해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 때문에 또 상황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서 남을 탓하기에 급급한 전가하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질책이나 책임이 두려워서 제각기 목소리를 높여 다른 사람의 실수와 약점을 떠벌리고 상대적으로 자신은 죄가 없음을 주장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경제인은 경제인대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책임을 미루기에 바쁜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 하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이는 없습니다. 오죽하면 ‘내 탓입니다’라는 스티커를 승용차 뒤에 붙이고 다니며 문제를 자신에게서부터 찾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극히 일부의 경우이지만 교회도 언론에 나올 정도로 문제가 발생하면 목사님과 장로님이 교역자와 평신도가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있는 모습이 눈살을 찌뿌리게 만들곤 합니다. 어쩌면 ‘떠넘기기 식의 책임회피’는 자신의 잘못은 없고 자신만은 옳다라는 자기의(自己義 )나 교만에서 나온 것은 아닐는지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뺴어라. 그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13)?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 대답하였습니까(13)? 여기서 범죄했을 때 다른 상황이나 조건을 핑개하는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여자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도 여자에게 기회를 주시는 음성은 아니었을까요? “너는 너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겠느냐? 네가 나의 계명을 어겼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시는 음성은 안타까움과 아픔에 찬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음성처럼 생각되고 들렸습니다. 여자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신중히 숙고해 보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음성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물으시는 음성이 지금 이순간 나에게 말씀하신 것 같기만 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 “우리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 자문자답(自問自答) 하여 보며 되돌아 보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 대답하였습니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는 자신이 그 과실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이 먹기는 했으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뱀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변명이었습니다. 여자의 이 말 역시 사실입니다. 뱀의 꾀임에 넘어가 생긴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유혹자 사탄이 뱀으로 다가와서 꾀더라도 그 일을 범한 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선악과 나무로 데리고 가서 꾀는 것까지 할 수 있지만, 선악과를 따서 입안으로 선악과를 넣어 준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분명히 여자와 아담이었습니다. 결국 여자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한 교만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와 아담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시34:18). 후일 다윗의 모습은 그 좋은 예시가 되었습니다(삼하12:13, 시51:1~19).
여기서 범죄했을 때 다른 상황이나 조건을 핑개하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는 말은 범죄한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 혹은 어쩔수 없는 상황때문이었다고 핑개대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든 아론이 변명하는 모습(출32:22~24)에서,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버림받은 사울의 모습(삼상15:21~24)에서,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을 언도했던 빌라도의 모습(마27:23~25)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나 책임 전가가 자신의 죄를 없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듭 죄를 범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또한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이나 조건을 핑개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차적으로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만,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그 책임을 상황이나 조건을 핑개하며 다른 원인을 찾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의 마땅한 자세이며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다시금 돌아왔을 때 품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눅15:11~24). 범죄하였으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셨던 다윗(삼하12:13)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지은 죄를 숨기지 않고 고백했을 때 주께서 죄악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시32:5). 그러므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나,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1:8~10).
◎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서 뱀에서 이르신 말씀이 무엇입니까(14)? 하나님께서는 아담이나 여자와 달리 왜 뱀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바로 저주하셨을까요? 잘못은 아담과 여자가 했는데도 왜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뱀을 저주하셨습니다. 이때 뱀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9절과 13절에서 아담과 여자에게 먼저 질문하시고 대답을 들으신 것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정죄(定罪) 하시기 전에 먼저 질문을 통하여 스스로를 점검할 기회를 주시며 회개를 유도하고 있지만, 뱀에게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죄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뱀이 저주를 받게 된 이유를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란 사람을 유혹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시킨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뱀을 대하는 것이 달랐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깨닫게 되는 안타까운 일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모든 동물도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말은 다른 가축들도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는 아담만의 문제가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3:17~18절에서 땅에 내려진 저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롬8:19절 이하에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담의 타락은 단순히 아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저주로 모든 동물이 약육강식의 비참한 세계에 살게 되었습니다. 동식물도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룻하게 되었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14)? ‘배로 다닌다’ ‘흙을 먹는다’는 뜻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하셨습니다. “너는 배로 기어다니고, 평생토록 흙먼지를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첫째, 배로 기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시킨 뱀은 벌레처럼 땅을 기어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신토록 배로 다닌다는 말씀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원래 뱀은 배로 다니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징계로 배로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뱀이 발이 달려서 원래는 걸어다녔었다는 것일까요?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말씀 그대로 현재 우리가 뱀을 보듯 뱀은 배로 기어다니는 존재일 뿐입니다. 둘째,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티끌을 핧는다는 표현으로 극도의 멸시와 굴욕의 상태가 됨을 나타낸다고 합니다(시72:9, 사49:23, 미7:17). 뱀은 실제로 흙이나 티끌을 먹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뱀이 가장 비참한 존재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탄에 대한 징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너의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말씀으로 볼 때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사망’의 법 가운데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뱀에게 임한 징계의 핵심적인 것은 뱀이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내용은 무엇입니까?(15)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각 각 누구를 가리킵니까? 여기서 두 세력이 원수가 된다는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 내용이 무엇입니까? 3: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기서 너는 누구입니까? 그 뱀, 즉 말하는 그 뱀으로 온 천하를 꾀는 것으로 상징되는 사탄을 말하는 것일입니다(계12:9). 여자는 누구입니까? 아담의 아내인 하와를 지칭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각 각 누구를 가리킵니까? ‘뱀의 후손’은 옛 뱀·마귀·사탄의 후손, 악의 권세를 추종하는 사탄의 영적인 후손을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요8:44, 요일3:10). 이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일차적 의미는 장차 동정녀(童貞女)의 몸에서 탄생하실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이를 좀 더 확대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모든 거룩한 씨들, 곧 ‘성도들’까지 포함한다고 해석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7:14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마태복음 1:23에서 응답되었으며, 갈라디아서 4:4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라는 말입니다. 원래는 적대감, 혹은 증오감이라는 말입니다. 원수가 되게 한다는 말씀은 지속적인 적대관계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두 세력이 원수가 된다는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와 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탄과 여자의 후손은 영원히 적대관계라는 말씀입니다. 합하려야 합할 수 없는 관계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서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두 세력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도 이 전쟁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아담의 타락이래로 인간들은 지속되는 사탄의 유혹 가운데 치열한 영적전쟁을 수행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려고 하는 한 지속적인 전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적과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과 문화와 환경을 사용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처한 상황입니다. 이 전쟁 상황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무장해제하고 삽니다. 그 말은 곧 아담과 하와가 그리했던 것처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의 실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지속되는 영적전쟁을 옳게 이해하고 무장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의 모습처럼, 6장에서 타락한 인생들의 모습처럼, 11장에서 바벨탑을 쌓는 인생들의 모습처럼 영적인 싸움에서 형편없이 패배하고 있는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위하여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친히 감당하시고 승리한 싸움을 싸우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이 인간들에게 내려진 징계의 상황이라는 것을 옳게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여전히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또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각각 어떻게 됩니까(15)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이 계획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을 향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각 각 어떻게 됩니까? 다시 한번 15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며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머리통을 박살내고 승리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도 뱀의 후손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뱀의 후손은 사탄의 자식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후손에게 고통을 당하지만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부수어 사탄을 멸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탄이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 는 것은 곧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상하게 한 것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죄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려고 유인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심증에서 그리스도를 배반케 하고,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게 되고, 대제사장들이 그를 고소케 되고, 거짓 증인들이 그에게 죄를 씌우게 되고, 빌라도가 그를 정죄케 되는 등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 구원주를 멸하여 훼방하려는 것은 바로 마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죽으심을 말미암아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망시켰던 것입니다(히 2:14).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세력을 짓밟아 쳐부수고 승리하신 것입니다(골2:15). "그의 머리를 상하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술책과 권세를 파괴하고 그 나라와 세력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시험을 좌절시켰고, 그 손아귀로부터 영혼을 구원해 내시었으며, 사람의 몸에서 그를 몰아내셨으며, 죽음으로써 그는 마귀의 왕국에 결정타를 때리셨습니다. 곧 사탄의 머리를 깨부수어 사탄을 결박하고 마귀를 불과 유황 못에 던져버릴 것입니다(계20:10). 하지만 그리스도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그의 발꿈치는 상하였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귀는 그들을 시험하고, 옥에 던져 핍박하고, 죽이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고난에서 함께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계획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향해서 때가 되면 메시야를 보내고자 처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단수입니다. 하나님은 한 명의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회개치 않는 사람들에게 먼저 그리스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여자의 후손에서 태어난다는 말씀은 이사야를 통해서 처녀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을 것인데 그분이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발꿈치를 물려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창세기에서의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벌을 내리셨지만, 죄문제를 해결하고 사탄을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다는 약속이 동시에 이루어 진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저주 속에서도 구원의 메시지를 내려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뱀과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 이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로 이미 끝난 싸움이지만 성도들의 삶을 통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의 삶은 전투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싸움과 관련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만일 우리가 우리의 스스로의 능력으로 사탄을 대적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승리의 주님을 의지한다면 어떤 대적도 격퇴하고 이길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5:4)
하나님께서는 창3:16절 이하에서 범죄한 사람과 피조물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주에 앞서서 3:15절에 미리 구원의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저주에서 해방 될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땅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저주를 사라지게 하십니다. 아담은 불순종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는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저주 받은 자는 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둡게 생각합니다. 불행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아담이 받은 저주에서 해방됩니다. 본래 범죄하기 전 아담이 받은 복을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두려움, 수치심이 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성도 회복됩니다. 질병과 슬픔과 가난의 저주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새로운 질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인생의 슬픔과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병과 고통을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53:4~5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슬픔도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도 가져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나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②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에 사탄이 우리의 속에 들어왔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사탄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과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결국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의 결과로 죽은 후에 영원히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칭해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 우편으로 가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모략과 재능을 주시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도우십니다. 서로를 사랑하게 도우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세상이 받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③ 셋째로,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창세기의 범죄로 아담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후손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22절은 말씀하십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가 왜 죽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에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담으로 인하여 낙원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주 받은 땅과 식물과 동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금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이 만드신 새 하늘과 새 땅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모두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ㅇ출처 : 한절한절 따라가는 성경묵상(Q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