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애양원 시절 1 - 하나님께서 여수 애양원으로 부르셨다!
미국의 포싸이트 선교사가 광주에서 오갈 곳 없는 나환자들을 토굴을 파고 돌봐온 것이 시초가 되었다.
당시 유명한 깡패 최흥종 씨가 노방전도하는 선교사에게 짱돌을 던져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고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그와 대화하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나서 적극적으로 나환자를 돌보는 동역자가 됐다.
이후 여수의 한적한 바닷가로 옮겨 여수애양재활병원을 짓고, 자립하는 생활 터전으로 축산과 양계를 터전으로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그들을 미국에서 물자와 의약품을 도네이션 받아 무료로 질병을 치료해주고, 완치되었으나 불구가 된 안구 수술과 고형화된 사지수술을 감당하다가 소아마비 전문수술 기관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전국의 소아마비 수술환자가 수만여 명이었는데 7-80%의 수술을 감당했다.
첫 부도를 맞은 당시 우리 세 식구는 천길 낭떠러지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마침 애양원으로 부르셔서 내 사명이 목회나 선교보다는 평생 나환자를 돌보는 사명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살림이라야 장농 두짝, 낡은 티비 한대와 부엌살림, 그리고 바울과 아내와 나 뿐이었다.
신풍 비행장 곁에 방 하나를 얻어 내가 출근하면 아내를 바울이를 데리고 일 키로쯤 떨어진 다른 동네 우물가로 빨래를 하러 갔단다.
바닷가여서 비누가 풀리지 않는 센물(정수)이기 때문이다.
퇴근하면 바울을 자전거 앞에 태우고 길디긴 활주로 옆길을 활주했다.
내 업무는 나병을 진단하기 위한 피부과 진료 보조와 환자 교육과 관리다.
소아마비 수술환자가 대부분 발부터 허리까지 기브스를 육개월까지 하고 있다가 결과를 보러 내원한다.
보통 엄마들이 청소년을 계단으로 이층에 옮기는 게 쉽겠는가?
젊은 내가 뛰어다니듯 하며 환자들을 들어 날랐다.
매주 한번은 전남도내 시군을 돌며 재가 나환자 이동진료를 의사,전도봉사자, 사회복지사, 간호사가 동행하며 여수, 여천, 순천, 남원, 순창, 광양, 고흥, 보성 등을 관리했다.
고흥 지방에서의 점심식사는 특별했다.
백반정식을 시키면 바다 생선요리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나온다.
연세가 있으신 동행분들은 얼마 드시지 않고 숟가락을 놓으시고.
군대시절의 배고픔을 말씀드려 양해를 구하고 그 맛있는 바다 요리를 독식했다. ㅎ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라 생각했다!
나환자 정착민들은 매우 근면성실 하시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몽당손에 호미를 고무줄로 묶어 밭을 메시고, 눈이 안보이는 어르신은 거름을 지게에 지시고 지팡이를 짚고 밭의 빈곳에 정확히 부리셨다.
그 간격이 자로 잰듯 일정하다!
돼지를 수십 마리씩 키우셨다.
새끼를 밤에 낳으면 밤을 꼬박 세우시기도 하시며.
낳다가 죽은 돼지를 가져다 주셔서 많이 삶아 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애저"라고 하는 값비싼 요리였다! ㅎ
외부에서 방문객들이 엄청 많았다.
손양원 목사님 유적지와 나환자 정착마을, 소아마비 수술 입원병동과 나병관련 소개와 홍보를 주로 내가 맡았다.
단풍궁궐을 이루는 애양원의 가을은 절경이었다.
한편 드넓은 병원 정윈과 마당의 낙엽을 쓸어내야하는 수위 집사님의 노고는 끝이 없었다.
난 한두 시간 일찍 출근해서 같이 빗질을 해서 도와드렸다.
"양집사! 그런 일 하지 마소!" 직언하시기로 소문난 내 사수 직원의 말씀이다. 환자를 들어나르고 마당을 쓰는 일을 지칭함이다.
"왜요?"
"양집사가 없을 때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녔어. 근데 양집사가 그일을 하고 다니니 그일을 하지 않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어 부렸단 말이시!"
이해도 되었고 낙심도 되어 한동안 봉사를 중단했다.
어느날 내 스승이신 행정국장께서 연유를 물으시고 이유를 들으셨다.
"선한 일을 계속하면 참선(眞善)이고, 그만두면 위선(爲善)이야!"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봉사를 계속했다!
나병을 앓은 첫증세는 통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들은 예리한 도구들에 찔려도 아픔이 없기에 방치하다가 손ㆍ발가락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한 땀이 나지 않기에 굳은살이 많이 박힌다.
수족에 박힌 굳은살을 헤쳐보면 살이 썩어가는 상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병원이나 가정 방문 때 세수대야를 준비해서 따뜻한 물로 삼십 분 정도 담그면 굳은살이 불 때 준비한 메스로 굳은살을 벗겨내고 상처를 치료하고 바셀린을 바르고 꺼즈 붙이고 붕대로 피부를 부드럽게 감싸드렸다.
처음엔 자기발을 보일 수 없다고 극구 사양하지만 익숙해지면 그렇게 감사해할 수 없다!
감사하다고 계란을 가져다 주시기도 하고, 때론 농사하신 양파, 고구마, 감자, 애저 등을 가져다 주셨다!
13.애양원 시절 2 - "양집사! 내말 들어봐!
어제 대학생 하나가 나랑 자고 갔어! ㅎ"
일제가 강제로 나환자들을 정관수술 시켜서 대개는 자녀가 없으셨다.
그래서 양자를 많이 들이는데 평상시에 찾아뵙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명절에나 삐쭉 얼굴을 내밀기 일쑤다.
그런데 CCC의 한 대학생이 아버지라 부르며 할아버지의 팔을 베개삼고 자고 갔단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인생 중 최고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학생! 복받을 겨!"
"할머니! 뭣을 그렇게 맛나게 드세요? 나 한입 주세요!"
"잉! 못먹어!"
팔순의 양순자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점심을 양푼에 고추장과 비벼 맛있게 드시고 계셔서 한입 달라고 하자 양푼을 뒤로 감추신다.
숟가락을 뺏어 한입 먹고는
"맛있네요! 고마와요!"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 다음 주말에 다시 찾아뵈니
"양집사! 내가 눈이 어두어 양집산줄 몰라봤네! 내 밥 뺏어먹고 간 날 울었어!" 하시며 이불 밑에서 곰팡이가 새까맣게 핀 롤케익을 내놓으신다.
"누가 먹으라고 준 건데 안먹고 양집사 주려고 숨겼어!"
지난 주에 지인이 사다준 것을 할머니께 드린 것이다! 햐!
"내가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양집사 위해 기도할께!"
애양원에서는 하루 세번 기도의 종을 치면 일하는 장소에서나 어디에서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도(代禱)하는 것이다.
실제로 두세번 교회당에서 기도하실 때 옆에 앉아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 천국에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곧 만나뵈요!"
"양집사! 나 장가 좀 보내줘!"
하모니카 성서반의 칠십 대 후반의 신할아버지께서 꼬깃꼬깃 접은 오천 원짜리 하나를 내미셨다.
"할멈 없이 살려니 외롭고 못살겠어!"
오천 원은 중매다닐 때 차비로 쓰라신다.
"할아버지! 남자 구실 하실 수 있어요?"
"하몬! 할 수 있어!"
"그럼 아기가 생기면 어떡하죠?"
"괜찮아! 지 누이가 곡성에 살고 있으니 키워달라고 그리로 보내면 돼!"
진지하신 모습을 보고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칠십 대 후반의 연세에 나병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안맹하셨고, 두 손은 숟가락도 젓가락도 잡을 수 없는 고형이 돼 버렸다!
생활보호대상자로 가족도 없이 사별 후론 수십여 년을 홀로 사셨다.
기도의 동역자로 인연을 맺은 십여 명을 날마다 이름을 부르시며 축복기도 하셨다.
성서반 하모니카 부의 반장이시기도 하시다.
과연 이 분께 누가 시집오실 것인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참한 규수가 생겨 신방을 차리셨다!
할렐루야!
칠십 대 초반의 같은 병을 앓은 눈이 많이 좋지 않으시나 얌전하신 언행으로 새신랑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셨다.
내가 찾아뵌 그날도 할아버지는 어깨춤을 추시며 하모니카로 반주하시고, 그에 맞춰 할머니는 유행가를 곱게 부르셨다.
"ㅎㅎ 장가가길 잘했네! 너무 행복하이! ㅎㅎ"
행복의 미소가 끊이지 않으신다!
성서반 반장이신 양재평 장로님은 무안 태생이시데 영특하셔서 공부를 잘하셨단다.
고교 때 나병으로 진단받아 등교도 못하고 벽장에서 지내셨다.
하루는 밤에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셨다.
너 때문에 누나들 혼사길 막힌다고...
그길로 애양원으로 물어물어 사흘을 걸어 왔는데 선교사들이 반기시더란다.
애양원에서는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거의 불문률처럼 되어 있어 처음에 무척 고되고 싫었는데 세월이 가니 적응이 되셨고, 자연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셨다.
부모님께로부터는 버림받았으나 예수님의 사랑은 받아 주셨으니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단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양자도 들이셔서 가정을 일구셨다.
무료하게 세월을 허송할 수가 없어 성서반을 조직하셨고,
성경 암송을 시작하셨다.
창세기 1장 부터 녹음해서 암송할 때까지 듣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하시기를 수년 여!
드디어 성경 66권, 1189장 전체를 암송하셨다! 할렐루야!
"학생들! 성경 몇 장이나 외워요?" 애양원을 방문한 대학생들이 무안한지 머리를 극적인다.
"우리는 눈이 없어도 성경 전체를 외웠어요!" "와!"
"그럼 우리가 복있어요? 여러분이 복있어요?"
"어르신들요!"
"그럼 눈먼 것 바꿀까요?"
"......"
양장로님의 레파토리시다! ㅋ
김수남 권사님은 나병을 앓아 처녀 때 들어오셔서 수족이 늘어지는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며, 시력도 좋지 않으시지만 애양원의 산증인이시며, 특히 손양원 목사님과의 추억을 많이 가지고 계셨다.
"ㄸㄸㄸ 수남 집사님! 밥 좀 주세요! 밥을 못먹었어!"
깜깜한 밤 노크해서 나가보니 손목사님이셨단다.
유난히 성도들을 아끼셨던 남편을 사모님이 질투하셔서 종종 식사를 차려주시지 않은 모양이셨다! ㅋ
이런 인간적인 얘기를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이순임 권사님은 선하고 인자하신 외모에 사랑이 많으셔서 CCC맨들에게 인기가 많아 "어머니"로 통하셨다!
한번은 버거씨 병을 앓아 손가락이 다떨어져 나간 할머니가 피부병이 심하셨는데 갈 곳이 없다셔서 마침 둘째 딸을 낳고 몸조리를 홀로 하고 있는 아내에게로 데려오니 정성을 다해 섬겼다!
"대책 없는 남편인데 불평않고 섬겨주셔서 감사해요!"
애양원내를 산책하다가 머리를 빗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온 몸에서 돼지 떵 냄새가 풀풀나는 열살 쯤 돼보이는 소녀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그녀를 따라 가 보니 돼지막에 딸린
쓰레기 통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소녀를 데리고 집에 가니 아내가 정성껏 씻기고 머리를 빗겼다.
알고보니 양재승 할아버지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앙녀로 삼아 양육하고 계셨다.
나병의 후유증으로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아 끊임없이 침이 흐르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며, 몽당손으로 십여 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계시니 취사와 위생이 어떻겠는가?
소녀는 우리 집에서 큰 딸같이 밥먹고 목욕도 하고, 숙제도 하며 바울이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런 비슷한 처지의 소녀들이 두세 명 우리 집에 자연스레 모였고 우리 집은 너뎃 명의 어린이들로 항상 북적였다.
이봉수 선생님은 신흥고 대선배이신대 대기업에서 잘나가던 직장을 버리고 애양원의 장애인 재활사업에 헌신하신 분이다.
순천시 매곡동에 위치한 선교사촌의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낡았지만 서양식의 품격있는 이층 건물을 개조해서 장애인들과 동거하며 미싱 자수를 가르쳐 자립생활을 가르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