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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인의향기[싱글여행 해외여행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그녀
돔 성당(Dome Cathedral)
1211년 성야곱의 날에 라트비아의 정복자인 게르만족이 알베르트 주교를 책임자로 하여 기초석을 놓았으며 알베르트 주교는 1270년에 공사가 끝난 이 성당의 첫 번째 주교가 되었다. 돔의 뾰족탑은 1547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리가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이었고 높이는 140m나 됐다. 1776년의 재건축으로 탑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고 높이는 90m로 낮아졌다.
건물은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며 그로 인해 현재 성당에는 여러 건축 양식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제단은 로마네스크양식, 성당의 건물은 고딕양식, 18세기에 지어진 뾰족탑은 바로크양식이다. 서쪽 입구는 19세기 후반에 건축가 펠스코가 준고딕양식으로 지었고 이때 유리도 스테인드글라스 판넬을 사용했다.
성당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6,71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인데, 1884년에 독일회사 이에프 워커 앤드 컴퍼니(E.F.Walker & Co)가 처음 설치했으며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었다. 후에 네덜란드 회사가 재설치했다.
리가성(Riga Castle)
1330년에 리보니아 기사단의 본부로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비텐스타인성(Wittenstein Castle)이었다. 정사각형 건물에 각 코너마다 탑이 있으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우가바강 둔치에 위치하므로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배들을 감시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여러 차례 파괴와 복구를 거듭했으며 1497년과 1515년에 완전히 새로 지어졌고 16세기 후반 기사단의 개혁 이후에는 폴란드와 스웨덴 관리에 의해 공공빌딩으로 사용되었다. 1641년에 스웨덴이 성을 차지하고 넓은 부속건물을 지었다. 18세기에 러시아 관리의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18세기 말에 재건축되었고 19세기 초에는 3층이 올려졌다. 마지막 재건축은 1930년대에 건축가 E.라우베 (E.Laube)가 맡아서 했으며 문, 인테리어, 가구는 A.시룰리스(A.Cirulis)가 디자인했다.
1938년 라트비아 정부가 라트비아 국가 소재로 규정했다. 밤만 되면 계단이 삐걱거려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현재 라트비아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 라트비아 해외 미술관 (Latvian Foreign Art Museum), 라이니스 문학미술사 박물관 (Rainis Museum of Literature and Art History)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인 크리스토퍼상
옛날 크리스토퍼라는 거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우가바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 주었는데 어느날 작은 아이를 어깨에 올려 물을 건네 주었는데 알고보니 그 아이가 바로 예수였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전설이 있다는데 시간이 지나 전설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동상은 리가성 앞 강변공원 고수부지에 있고 유리로 보호되고 있다.
삼형제건물
15세기, 17세기, 18세기에 각각 세워진 세개의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1층과 뒷마당을 공개하고 있는데 1층의의 일부는 책상과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아서 사무실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화약탑(The Powder Tower)
처음에는 스밀수토르니스(Sand Tower)라고 불린 이 탑은 14세기 초에 지어진 리가의 방어용 요새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 요새로 들어가는 샌드 게이트는 파괴되었지만 요새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이 탑은 남아있다.
1625년에 스웨덴의 군대의 침략에 의해서 파괴되어 바위만 남아 있었는데 1650년에 재건되었고 그때 안에 보관한 화약을 보호하기 위하여 벽 두께를 3m로 두껍게 만들었다.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포알이 이 건물을 향하여 발사 되었으나 이 두꺼운 벽이 잘 막아내어 지금도 9개의 대포알이 벽을 뚫지 못한 채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세기부터 화약창고로 쓰였기 때문에 풀베르토르니스(Pulvertornis)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그 말의 뜻이 화약탑(Powder Tower)이다. 오늘날에는 라트비아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라트비아 군인들' '1918~1920년의 라트비아 독립 선언과 자유 전쟁' '1919~1940년의 라트비아 육군과 해군' '라트비아와 제2차 세계대전' 등의 전쟁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 둥근 탑의 지름은 14.3m, 높이는 25.6m이다.
고양이의 집(The Cat's House)
스웨덴문
성벽
LAIMA시계탑
자유의 기념탑(Freedom Monument)
라트비아 국민에게 자유의 상징인 탑으로, 1935년에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유명한 조각가인 카를리스 잘레 (Karlis Zale)의 작품이다. 기념탑 밑 소벽에는 노래하고 일하고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라트비아인들을 묘사한 동상들이 있는데 이것은 라트비아 민족의 대서사시인 〈라츠플레시스〉에 나오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윗부분에는 손을 위로 뻗쳐서 세 개의 별을 들고 있는 밀다(Milda)라는 소녀 동상이 있다.
소녀의 손에 들린 세 개의 별은 라트비아의 역사적인 세 지역인 쿠제메(Kurzeme), 비제메(Vidzeme), 라트갈레(Latgale)를 상징한다.
구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세 개의 별이 발트해 연안의 세 지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상징한다고 하여 소녀상의 이름이 밀다 대신 ‘마더 러시아 (Mother Russia)'라고 불렸다. 그 시절에는 이 탑 아래에 꽃을 바치거나 집회를 가지면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기념탑은 시베리아행 편도 티켓을 받게 하는 '여행 대리인'이라는 농담이 나돌기도 했다.
국가의 공휴일이나 기념일에 시민들은 라트비아 국민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대변해주는 기념탑 아래에 꽃을 바치고, 근처 광장에서는 군인들의 행렬이 펼쳐지기도 한다. 기념탑 앞에서는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데 매시 정각에 교대식을 갖는다.
정교회성당(The Navity of Christ Othodox Cathedral)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데 사진촬영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어 몰래 찍다보니 내부사진은 구도가 엉망이다.
그리 큰 규모는 아이었지만 내부 장식이 화려했다. 특히 금으로 도배를 한 성모마리아상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라트비아 국립미술관(Latvian National Museum of Art)
독일의 건축가인 노이만(W. Neumann)의 설계로 1905년에 개관했으며, 발트해 연안에서는 처음으로 미술관의 용도로 건물이 지어졌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절충식이지만 인테리어는 아르누보 양식이다.
18세기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트해 연안과 라트비아 미술가들의 작품 5만 2000점 이상이 전시돼 있다. 특히 18세기 중반부터 1945년까지의 작품들 속에서는 라트비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미술가들의 작품들도 있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니콜라이 레리흐(Niklaj Rerih)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라트비아 내의 미술품은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활발히 수집되었고 당시 그것을 관장한 사람은 유명한 라트비아 미술가인 빌헬름스 푸르비티스 교수였다. 미술관은 2개 층을 전시관으로 쓰고 있는데 1층에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발트해 연안의 미술가들 작품을, 2층에는 19세기 중반부터 1945년까지 라트비아 미술가들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진열했다.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눈치껏 찍었다.
리가 아르누보 건축물(Art Nouveau in Riga)
아르누보란 1885년에서 1905년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사조의 명칭으로 회화, 건축, 실내장식, 그래픽 등에서 종래의 천편일률적이고 모방적인 양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조를 말한다. 라트비아어로는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라고 한다.
리가에서는 아르누보가 특히 건축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래의 성당중심주의, 이태리적 건축양식을 배제하고 라트비아의 사상을 화려한 장식에 융합시킨 리가의 건축물은 유럽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로 손꼽힌다.
아르누보가 유행하던 시대에 리가는 비행기, 기차, 자전거, 자동차 등을 생산해 내는 공장이 많은 부유한 항구도시였으며 따라서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시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리가의 아르누보는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부유한 여건이 건축물에 화려함을 더해줬다.
리가에 있는 건물 중 1/3이상이 아르누보 건축물일 정도로 아르누보의 본산지라 할 수 있다. 리가 아르누보의 대표적 건축가는 알베르타 거리의 빌딩을 지은 아이젠스타인이며 라우베, 펙젠스 등도 유명하다.
많은 건축물에서 새로운 삶을 태양으로 형상화한 아르누보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외에도 각종 식물들, 몽상적인 사람의 얼굴, 신화에 나오는 신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아르누보 건축물 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아르누보 건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거리는 알베르타 거리, 엘리자베테스 거리, 스트렐니쿠 거리 등이며 화려하게 보수공사를 한 건물도 있고 백 년 전 모습 그대로인 것도 있다.
아르누보 박물관(Art Nouveau Museum)
외곽 구석에 쳐박혀 있어 어렵게 찾아 가 입장료와 사진촬영료 까지 내고 관람을 하였는데 내부의 특별함은 별로였으나 주변 모든 건물이 아르누보양식으로 잘 장식되어 있어 볼만했다.
전통복장을 입고 안내를 하는 아줌마
라트비아대학교(University of Latvia)
라트비아 국립오페라하우스(Latvian National Opera House)
1782년 구시가지에 지어진 '리가 시극장' (혹은 '독일극장')에 있다가 1863년에 루드빅 본스테트 교수가 디자인하고 건축가 헤스와 셀스가 지은 현재의 극장으로 이전했다. 당시 극장의 가장 유명한 상임 지휘자는 1898년~1900년, 1913년에 리가에서 활동했던 독일인 브루노 발터이다. 1919년 1월 23일 라트비아 국립오페라단 엘엔오(LNO)가 공식 창단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플라잉 더치맨〉을 공연했다.
극장 내부가 '백악관'이란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화려하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에 속한다. 주 관람석은 수용규모가 946석이며 별관에 250~300명을 수용하는 관람석이 있다. 매해 여름에 열리는 국제오페라페스티벌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건물은 공연관람 때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관광객들은 영어로 설명해주는 가이드를 따라서 극장 내부를 둘러보며 오페라 하우스의 역사를 들을 수 있고, 밤에 공연이 있는 날에는 무대 뒤에서 준비하는 배우들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야경이 멋있었는데 사진이 없어 아쉽다.
성야곱교회(St. Jacob's Church)
1225년부터 1300년까지 약 75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수도회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으나 이후에 교회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1522년 종교개혁 이후에는 리가 라트비아 교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폴란드 왕인 스테판 바토니가 도시로부터 교회를 사들인 1582년에는 예수회가 교회를 차지했다. 17세기에는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예수회를 쫓아내고 스웨덴 주둔군의 루터파 교회로 바꿨으며, 1710년에는 러시아 교회가 되어 1736년 니콜라우스 폰 진젠돌프가 설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에는 가톨릭에 넘겨져 지금은 리가에서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한다.
예전에는 리가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 고딕 양식의 첨탑이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유일하게 성야곱교회에만 남아 있다. 종이 첨탑 안이 아닌 밖에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형태는 리가에서 성야곱교회에만 있다.
교회 윗부분의 2개 층과 뾰족탑은 15세기 후반에 지어졌으며 1756년에는 피라미드형 지붕, 1782년에는 정문이 만들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해서 성당의 4개 종이 러시아로 옮겨졌으나 이후에 분실되고 말았다. 지금은 첨탑의 밑부분에 시계가, 윗부분에는 종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의 총길이는 약 50m로 자그마한 편이다.
성피터교회(St. Peter's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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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멘 음악대
성베드로교회 전망대에서 바라 본 리가 시가 전경
우측 돔성당
리가여객항(Roga Passenger Port)와 대한민국의 자랑 삼성 광고판
교회 첨탑에 풍향계 역활을 하기도 하며 리가의 상징 퇴역한 황금수탉
무역의 수호신 ‘롤란드’ 동상의 진본
시청과 City Hall Square
크리스마스 장식용 양초 전시회
검은머리전당(House of Blackheads)
독일 르네상스의 진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고딕풍 건물로 리가의 구시가지인 베츠리가의 타운홀 스퀘어 근처에 있다. 1334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당시 상인들의 조합인 검은머리길드의 회원들이 세를 얻어서 사용했다. 1713년에 그들이 건물을 구입하여 지금과 같은 화려한 건물로 둔갑시켰다.
검은머리 길드의 회원은 젊은 독신의 상인들과 배의 선장들로 구성되었는데, 상상 속의 아프리카 흑인 무어인인 '성 모리셔스'를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아서 검은머리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당시 전통사회에서 큰 역할을 한 이 길드의 행사에는 러시아 황제를 포함한 많은 귀빈이 참석할 정도로 영향력을 과시했다.
검은머리전당은 1816년, 188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복구되고 증축되었다. 2층은 전체가 기념홀로 지어졌는데 높이 6.68m이며 매우 호화롭게 꾸며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에 한 차례 파괴되었고 그 후에 라트비아를 점령한 소련에 의해 1948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트비아가 독립한 후에 검은머리전당의 복구를 시작해 2000년에 완성했다.
2001년부터 도시의 800주년을 기념하여 일반인에게 관광안내소, 콘서트홀, 검은머리길드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 등으로 공개하고 있다.
전통복장을 한 입구 안내원
무역의 수호신 성롤란드 동상(Roland Statue)
검은머리전당 앞 시청 광장에 있다. 칼을 든 모습의 동상으로 778년에 죽은 롤란드 장군의 동상이다. 롤란드는 샤를마뉴의 조카였는데 14세기에 북부 독일과 한자동맹을 맺은 도시 여러 곳에 정의와 자유의 상징으로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리가에도 14세기에 용감한 기사의 모습을 한 롤란드의 나무상이 세워졌는데 손상을 입고 복구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1896년 12월 11일에 새 동상이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1945년에 소련은 훼손된 동상마저 다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1999년 12월 9일에 동상의 새 받침대가 만들어지고 2000년 5월에 에드빈스 크루민스가 동상의 복제품을 만들어 세웠다. 훼손된 동상 진품은 성피터교회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성롤란드 동상이 들고 있는 검의 끝부분은 리가와 라트비아 전체에서 거리를 측정하는 한 지표가 되고 있다.
리가 시청
시청 전시관
로얄 스퀘어 호텔로 돌아와...
발틱택시를 타고...
라거공항에서...
라트비아 리가맥주 한잔하고...
Air Baltic항공편으로 헬싱키로...
헬싱키공항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