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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히브 13,15-17.20-21
복 음 :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을 읽다가 친구와 전화하는 이런 대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보세요?”, “응, 너구나. 요즘 어떻게 지내니?”
“좋아, 넌 어때?”, “사실 엉망진창이야.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글쎄 암이라는 거야.”
“그래? 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설마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현대인에게 이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어린 학생들과 노래방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면서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신부님이 먼저 한 곡 불러주세요.”
노래를 선곡해서 부르는데, 아무도 제 노래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노래를 선곡하느라 바빴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왜 부르고 있는가 싶어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마이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 뒤 노래를 부르기보다 열심히 학생들의 노래를 들어주었고 열심히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남이 노래를 들어주지 않으면 굳이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만 노래 부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도 그랬던 것일까요?
들어주지 않는 말의 홍수 속에서 외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한 말만 기억나고,
남이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내가 말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관계를 더 좋게 하시려고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신 우리의 말을, 어떤 말이든 상관없이 모두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에는 늘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요구사항의 말을 가지고 있었지요.
육체적인 아픔을 해결해달라는 말, 마귀를 쫓아 달라는 말,
영적 부족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
그 밖의 많은 청원의 말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가엾은 마음, 바로 사랑하는 마음에 그들의 모든 말들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말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처럼,
나의 이웃과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엠이 부부들과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형제님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안내를 오래 했지만 이렇게 형제님들이 많은 순례단은 처음 봅니다.”
그동안 순례를 오면 대부분이 자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40명이 순례를 왔는데 남자는 신부님 포함 2명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는 자매님보다 형제님이 더 많은 유일한 순례라고 합니다.
10부부에 사제인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르즈나 골프 모임에는 형제님들이 많은 편인데
성지순례에는 형제님들이 적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에 형제님들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기에 형제님들이 기꺼이 자매님을 위해서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성지순례의 기쁨을 잘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기도합니다.
형제님들에게 우선순위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운동과 취미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순례를 함께 하면서 형제님들이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많이 하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들의 우선순위에 성지순례가 맨 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지 않고,
우선순위에 성지순례를 먼저 놓았던 형제님들과 함께했던 성지순례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성지순례를 하는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성지순례 첫날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당엘 갔는데
그 성당에서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 참례에 앞서 부부들은 혼배미사를 드린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부가 축복을 주었기에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곳에서 혼배미사를 볼 수 있었던 부부들도
혼인의 첫날을 생각하며 부부의 사랑을 새삼 확인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22년 전에 서품 10주년 기념으로 동창 신부님들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젊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힘과 열정은 있었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동창들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 우선순위가 아니라 성지순례로 포장된 동창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22년 시간이 흘러 엠이 부부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니 피정을 겸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1521년 스페인은 신대륙으로 왔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과 대포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총과 대포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을 주교님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주교님에게 전하였지만,
주교님은 배우지 못한 원주민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성모님의 메시지가 맞는다면 ‘증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께 주교님의 이야기를 전하였고,
성모님은 장미꽃을 주교님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12월의 장미는 있을 수 없지만, 후안 디에고는 가지고 있던 틸마에
장미를 담아 주교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주교님께 장미를 드리는 순간 틸마에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지는 ‘표징’이 일어났습니다.
주교님께서 요구하는 증표를 성모님께서는 성화라는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에는 현대과학의 힘으로는
규명하기 힘든 표징들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틸마는 선인장으로 만들었는데 길어도 20년이면 삭아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곧 500년이 되는데 아직도 틸마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도 순례 중에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았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색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도료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사의 과학자들이 광학 현미경으로 2000배 이상 확대해서
성모님의 눈을 보았더니, 그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표징이 있는 것도 신앙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후안 디에고의 뜨거운 신앙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후안 디에고의 말을 믿고 따른 주교님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열매를 맺어서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토착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총과 대포로는 열 수 없었던 마음을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4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보호자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멕시코 인들에게 일생에 한 번쯤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멕시코 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22년 전 성지순례에도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면,
저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시금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따로 부르셔서 ME 부부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저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제게 주어진 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 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러니 “외딴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1열왕 22,17).
목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양 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활동과 기도의 조화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수있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중심의 삶
-외딴곳-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시편23,1-3ㄱ)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오늘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오늘 복음의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에 대한 묘사 같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외딴곳 성전에서의 미사 전례입니다.
새 옷을 입으면 마음이 새롭고 기분이 좋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새날이자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오늘 2월 4일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고, 내일은 연중 제5주일이자 정월대보름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오늘 입춘날 대문에 많이 써 붙이는 문구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입춘대길은 조선시대 남인의 거두 허 목이,
건양다경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만들었다 합니다.
매월 첫 주 금요일 고백성사 보는 날이 참 좋습니다. 날마다의 미사 역시 좋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을 상징하는 고백성사요 성전 미사입니다.
불행 중의 불행이 주님을 잊고 사는 것이요 자기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궁극의 삶의 의미,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인,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27,1ㄱ)
어제의 화답송 시편 후렴은 바로 주님은 내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의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주님은 내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얼마 전 은평성모병원에 갔을 때 시편 성구가 한눈에 들어왔고 감동했습니다.
주님만이 참된 치유자요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의사분들을 한없이 겸손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의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당신 백성 위에 당신의 복을 내려주소서.”(시편3,9)
우리가 외딴곳에 만나는 하느님은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히브리서는 끝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 말씀입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시니
우리는 감격에 벅차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빌게 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시는, 좋은 기도문은 늘 읽어도 새롭고 좋습니다.
제 행복기도도 그러합니다.
원래는 감사기도였다가 행복기도로 바꿨고 또 바꾼다면 예닮기도로 바꾸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기도요 예수님을 닮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호칭 다음에 “참회합니다”, “믿습니다”를 넣으니 대만족입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을 만나는 외딴곳이자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특히 "참회합니다" 고백하니 전 존재가 깨끗해진 느낌이 듭니다.
외딴곳 쉼터에서 바치기에 참 좋은 기도문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파견派遣과 귀환歸還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파견되었던 제자들은
주님께 귀환하여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합니다.
귀환하여 외딴곳에서 주님과 깊은 친교와 기도 시간으로
충전되면 제자들은 또 파견될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미사 봉헌 후 다시 파견될 우리와 흡사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대로 주님의 사목적 배려입니다.
일에 중독되어 쉬지 못하는 것도 큰 병입니다.
그러니 때로 죄책감 없이 “노(NO)”라고 말하며 외딴곳의 쉼터를 마련하여
번 아웃 된 심신을 충전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외딴곳의 쉼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예수님 말씀에 굶주린 군중이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이 가엾은 마음이 들어,
쉴 사이도 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빵에 앞서 말씀입니다. 말씀과 빵, 결코 이 순서가 바뀌어선 안 됩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 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우선적으로, 근원적으로 말씀을 갈망하는 인간 영혼들입니다.
그러니 말씀으로 해갈되어야 할 영적 목마름이요,
말씀으로 충족되어야 할 영적 배고픔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에 이어 5천 명을 배불리 먹인 빵의 기적입니다.
그대로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이뤄진 성체성사 미사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놀랍고 감사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만의 외딴곳이 아니라
배고파 모인 모든 군중들에게도 외딴곳이 주님과 함께하는
배움터이자 쉼터가 샘터가 되었고 모두 영육으로 충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외딴곳을 상징하는 성전 미사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참 좋은 선물이 미사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외딴곳의 쉼터이자 배움터이자 샘터인 이 거룩한 성전 미사를 통해
우리의 지친 영육을 치유 충전시키시어 세상 삶의 자리에 복음 선포자로 파견하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四端의 마음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된 제자들의 복귀와 활동보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 복음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한 사실을 들었고,
어제 복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접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주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도록 아주 엄중한 여장 규칙과 함께 파견하였고,
파견된 제자들은 실제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동안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과거사를 들추어 보도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편집상의 묘기로 볼 수 있고,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헤로데를 포함한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을 拂拭시키는데 一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고,
그들의 활동 내역(6,13)은 이미 복음에 언급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활동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기 되었을 터이고, 더러는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 당신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재충전이란 한적한 곳으로 떠나
좀 쉬면서 음식도 먹고 편안하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편으로는 예수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찾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의 일행이 이동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했으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중은 영악했다. 그들은 여러 동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의 일행을 앞질러 배가 닿을 곳에 이미 가 있었다.
이렇게 예수와 군중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곧 펼쳐질 ‘오천 명을 먹인 빠의 기적’(6,35-44)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을 위한 빵을 먹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빵이다.
무릇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마태 4,4)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로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자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피곤해하여
휴식을 필요로 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의 빵을 내리신 이유는 군중에 대한 惻隱之心이다.
말씀의 빵은 인간의 靈的인 배고픔을 충족시킬 것이다.
그러나 肉身을 위한 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고 명하신 것이다.
불쌍한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모든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하는 기본적 素養이리라.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할 소양에 관하여는
유교교설의 四書 중 하나인 孟子에서도 엿볼 수 있겠다.
맹자에는 四端이라는 대목이 있다.
사단은 사람의 본성인 仁⋅義⋅禮⋅智에서 우러나오는
惻隱⋅羞惡⋅辭讓⋅是非의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의 형편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경계하는 마음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여 不義를 받지 않거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마음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밝히고 따지는 마음이다.
이들 마음은 예수님처럼 행동에 옮겼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선 이런 마음을 우리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 넣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