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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비전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예예
성 경 : 히 11:8-16절
제 목 :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
일 시 : 2020. 6. 3.
히11:8-16/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 라는 주제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은 본향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고 했습니다.
2-30년 전에 유행했던 성가합창곡에 보면 순례자의 노래나 본향을 향하네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순례자의 노래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1.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내가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2.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은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난의 밤은 비바람 모질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로움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기쁜 찬송 주 예수님 은혜로 이끄시네 이끄시네 생명강 맑은 물가에 백화피고 흰 옷을 입은 천사 흰 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 쓰겠네
이 세상 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본향을 향하네
두 노래 모두 세상의 고단함과 괴로움이 심하지만 결국에는 아름다운 동산, 즉 생명강 맑은 물이 흐르는 본향으로 가게 된다는 위로의 찬양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 학기가 시작된 후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 학교에 왔는지 물어 보니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거기에서 쫓겨나서 금성면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안동댐이 걸설 된 당시에 많은 주민들이 보상을 받고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들은 명절이 되어도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인생이 끝나고 분명히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가야 할 본향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의 특징은 본향 찾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제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9절에 보시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고후1:19-20/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라고 말하고 단 한 번도 아니요 라고 말씀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는 항상 예라는 대답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선포될 때 예 또는 아멘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아멘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라고 대답하면 천국의 복을 받아 누릴 텐데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요 라고 대답함으로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가 아니라 아니요 라고 하는 순간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 채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예라고 순종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거역하였는데 아브라함은 유일하게 예라고 대답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언제든지 예 라고 대답하고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복이 됩니다.
2)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의 예를 보면 9절 하반 절을 보시면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고, 보여 주고 부르신다면 아마도 순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자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100% 예 알겠습니다. 하고 예수님을 믿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그 다음의 단계는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다보면 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들려주시지만 처음 우리를 부르실 때는 그냥 나를 따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 순종하여 약속하신 땅에 나아갈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걸음씩만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따라 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가야 하고 왜 가야하는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자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작정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전혀 모르는 낮선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는 길에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강하고 숫자가 많은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가진 재산과 아내까지 빼앗길 수 있는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무법천지였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친척을 버리고 아무도 곳으로 초행길을 가는 것은 수많은 위협을 무릎 쓰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당시의 정서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떤 일을 만날지 알지 못한 채 가는 아브라함의 길이야 말로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나를 따르라 했을 때 믿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따랐습니다. 그들도 앞으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떤 고난을 당한지 한치 앞을 모른 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믿음이 없고 계산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가지 못합니다. 계산기를 두드려서 답이 나와서 그제서야 길을 떠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3)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살면서 장막에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실 영원한 처소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길리운 노예가 318명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딸린 식구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고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막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베두인족은 목축업을 하면서 장막에서 살아갑니다.
왜 아브라함은 그렇게 돈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성을 쌓고 왕궁처럼 화려한 집에서 정착하면서 살지 않고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를 축적하고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살지 않고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 라고 할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2. 사라는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니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여자로서 나이가 많아서 단산하였습니다. 경수가 끊어지고 가임기가 지났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사라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의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할머니가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을까요? 오늘날로 말하면 어떻게 사라에게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중요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이(하나님을)를 미쁘신(신실하시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내년 이맘때가 되면 아들을 낳는다고 말씀하신 약속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믿으면 그 약속이 현실이 되고 실체가 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을 때 그것이 나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현실을 믿지 말고 환경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으면 그것은 이루어집니다.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그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12절에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라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 나이게 무엇을 하겠습니까?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전도현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산 송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가능성이 있고 기적이 일어나고 좋은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은 없습니다. 약속에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고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 일을 행하시고 날마다 우리를 낳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닙니다. 어제의 나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낳아 주십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안는다는 것은 세상은 온통 거짓말뿐이라는 뜻입니다. 감정과 느낌도 거짓말을 합니다. 오감도 거짓말을 합니다. 사람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정치가들도 방송인들도 종교인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불교도 거짓말이고 천주교도 거짓말입니다. 이슬람도 거짓말이고 힌두교도 거짓말입니다. 각종 이단들도 거짓말쟁이입니다. 학자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진화론과 무신론 철학을 가지고 거짓말을 합니다.
또한 술도 거짓말을 합니다. 마약도 거짓말을 합니다. 담배도 거짓말을 합니다. 몸에 좋지 않는 인스턴트 식품과 음식도 거짓말을 합니다. 몸도 거짓말을 합니다. 성경말씀 아닌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돈도 거짓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특별이 두 가지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이 진리이고 참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납니다. 어제의 내가 아닙니다. 일주일 전에 내가 아닙니다. 일 년 전에 내가 아닙니다. 과거에 얽매어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어제는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2)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다름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않을 것이요 걸어가도 피곤하고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여호와를 앙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왜 거짓말하는 내 몸을 믿습니다. 왜 나의 오감을 믿습니까? 진리가 아닌데 말입니다. 사라는 자신의 늙은 몸이 말하는 거짓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의사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90세에 이삭을 낳고 웃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이 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되셔서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