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고향 충청 서해 남단 舒川군 麒山面 內山亭里에서 北녘으로 들판건너 시초면 선동리 출신인 친구가 객지나와 서울에서자영업을하다가 경기남양주 퇴계원 으로 이주,지금은남양주 진건 지세마을이란데서 밭 농사를 하는데 그가 구기창君여유. 몇 년간 자주 만나다가 최근 뜸 했더니 이게 날 보고싶다고 여러차례 부르는데 일터 투쟙 관계로 미루고 또 연기 하다가 오늘은 萬事를
제끼고 서울장수 댓병 사들고 친구 밭으로 이재갑니다.
친구 기창이는 59년도 서천중학교 입학해서 만난 동무유. 친구는 선동국민학교 제대후,
나는 기산국민학교 졸업 후였지만 나이 열 서넛 어린나이에 가깝게 지내며 들판 건너 서로의 집에도 왕래 했었쥬. 기창이와 친했던 내력은 기창이가 사는 선동부락 옆동네 아룽구지(선암리)에 감나무집 고모님 댁과 (장남 :구우환 /서천中 後서울철도고교국비생 으로 진학)과(차남:형환 이ㆍ대환이 쌍둥이 형제 랑 3남 순환이)
저의 한 분 뿐인 이모님댁(노종일의 父이신 이모부:노철래/前 시초우체국장)이있었던 연유였슈.
우리가족이 동네에서 맨 첨 기독교 가족이 된 것이나 우리가족 때문에 오늘의 산정교회가 있음도 누가 아프면 약국 의원을 찾는게 아니라 장구치고 꽹과리 두들기며 미신에 얽매여 살던 울엄니를 교회로 인도, 신유의 은사로 병 고침 받게하신 고모님 때문이었쥬.
7남매 낳아 키우시며 고생하시던 엄니가 몸이 아퍼서 난리났는데 무당 불러 굿이나 벌리고 있으니 선암침례교회 다니시던 감나무집 고모님께서 신유의 은사가 충만하신 담임 전도사님께로 엄니를 전도ㆍ인도 하시고자 시누이가 올케인 울엄니 병 고쳐 주시려고 고모님네 방으로 데려다 눕혀 은혜받아 병고침에 이어 우리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를 믿는 기독교 가족으로 변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웃동네 막동리 외산정에 까지 전도 시켰던거유. 고모님 그리고 울엄니 때문에 오늘의 산정 침례교회가 세워진 은혜랑게유.
이렇게 자연스레 고모님 이모님댁을 다니며 이웃동네 선동리에 사는 기창이랑 가깝게 지내게 됐던 계기로 오늘날까지 돈독하게 지내며 기창이까지 서울장수 마니아로 바꿔논거쥬.
친구는 학교다니다가 밭에서 아버지랑 일하다가 벌한테 눈알을 쏘여 학업을 중단함으로 헤어져 잊고 지냈죠.
60년대 初 삶에 허덕이시던 아버지가 경기도 포천 설운리 땅으로 이주, 살면서
10여년 후 70년대 初
기창이 친구 얘기를 물으시기에 어디 사는지? 만나 보고 프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역시 포천 어딘가에 산다는 기창이 친척을 알게 되어 그 분을 통해 기창이 소재를 찾아주셔 20여년 만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竹馬故友나 같은 동무쥬.
(서울에서 다시 만난 날이 제 두 번째 아들인 바름이가 태어난 80년 1월 12일여유) 그 후 서울에서 쭈~우~욱 만났쥬.
동무가 삶의 터전을 퇴계원 담터로옮겼다가, 진건 밭으로 옮겨 자주 만나 마셨쥬.
지세마을 밭에 가려면
24시간 근로 후 귀가, 밥 먹고 상일동역 10시쯤 출발하면 군자역에서 7호선 상봉행으로 환승해서, 상봉역에서 경춘선으로 다시 환승,
사능역에서 하차, 버스로 다시 환승, 지세마을 입구 하차 후 빠른 도보로 20여분 소요, 밭에 11시 30분 쯤 도착혀유.
여러해 前 처음 다닐 적 입구동산에 原州邊氏
네 선영이 있는데 묘지
앞에 비석하나를 읽다
보니 우리고향 舒川 郡守를 했더라구.
우리나라 어디에 同名 2地域이?
마침 내일 친구네김장을
하려고 친구 부인과 아들까지 밭에나와 배추를 소금에 절이대유
나는 쪽파를 다듬으며 금년 친구네 김장의 일익을 담당한 셈이쥬
막걸리를 점심대행, 일터 후 집에 들려 아침밥 먹고 왔기를 다행.
밤9시 거의돼서 귀가, 밥상 차려논 아내가 부어주는 장수를 반병쯤 추가. 낼 아침 05시기상 하려면 푸우욱 자야니까.
오늘은 거룩한 주일
저는 일터 당번이라
목사님께서 잠시후 1부예배 후 녹음을 주셔유.
고구마 2개를 여기 일터 전자렌지에다 이렇게 물 그릇에 담가서 돌렸더니 안 익어서 물 빼고 계속 돌렸땡 먹기 짱이구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