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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 이사 58,7-10
제2독서 : 1코린 2,1-5
복 음 : 마태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연구에 의하면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1년을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은 어떨까요?
다리를 잃는 순간부터 큰 좌절감 속에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한 1년을 넘어가면 불행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년 뒤의 행복도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 안의 유전자가 그 역할을 하는데,
행복감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의지가 약해질 것이고,
반대로 불행에 빠져 우울감이 너무 길어지면
삶을 포기하게 되어 유전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백만 년 동안 진화됐고 또 앞으로도 진화될 인간이기에
계속된 변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 자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할 때
불행의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기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이지만, 이는 욕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어떤 삶이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빛나는 사람,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춰주신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태어났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또 불행 안에서 헤어나지 못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는 삶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꼭 필요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에 맞게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세상에 터져 나올 것입니다(이사 58,8 참조).
세상의 소금
류해욱 요셉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의 소금이며 빛입니다.
소금은 음식이 맛을 내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5-60십 년 전 우리에게는 소금이 다른 역할도 합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까 냉장고가 없습니다.
고기를 사서 한꺼번에 먹을 수가 없으니까요.
보관하기 위해 고기에다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에 절이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는 냉장고가 있으니까 그런 역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소금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 맛을 내게 하고, 둘째, 음식이 썩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썩지 않게 보존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의 가치를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할 때, 우선 우리는 우리 가정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좋은 가치를 잘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수도자와 사제의 가치를 잘 보존해야 합니다.
보조하는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의 삶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가치를 보존하는 사람은 삶을 낭비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이 6년 전 체코에서 치유 미사를 집전한 후에
그곳에 왔던 필립이라는 7살짜리 소년이
안토니오 신부님에게 와서 청소년 피정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안토니오 신부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미사가 참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청소년 피정에도 참가 할 수 있나요.”
저는 그 소년의 상황을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7살은 피정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돌려보냈는데, 그가 피정 봉사자들을 귀찮게 하여,
봉사자가 안토니오 신부님에게 그를 피정에 받아들여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혼자 오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의 집에는 신앙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피정에 오고 싶다고 조르자 할 수 없이 그의 엄마가 함께 피정에 왔습니다.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냥 와서 피정 강의 시간에 앉아 있으려고 생각했었답니다.
피정이 끝나면서 나눔 시간에 필립의 어머니가 아주 아름다운 체험에 대해 나눔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고, 육체적, 심리적 병을 치유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가족사진을 제게 가지고 와서 축복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빠와 형과 누나를 사진을 보고 축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누나도 피정에 왔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형도 피정에 왔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도 피정에 왔습니다.
3년 전에 체코에서 했던 피정에서는
그 아버지가 피정 조직에 함께했고, 성가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7살 짜리 아이의 삶이 세상의 소금 역할을 했습니다.
4 년 동안 이 가족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이 7살 짜리 소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이 필립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니?” 그가 말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처음 저를 성당을 데리고 가셨어요.”
필립 할머니가 믿음을 자식들에게 전해 주려고 했지만, 자식들은 거부했었는데,
손자에게서 빛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가치와 신앙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경제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며, 세상의 소금이며 빛입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것이 빛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빛, 등잔을 어디에 보관합니까? 탁자 밑이 아니라 탁자 위에 둡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빛이다.”라고 하셨을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임무는 산 위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의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이 어둠을 떠나 빛으로 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필립이 가족들에게 한 일입니다.
소금과 빛, 이 두 가지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양 날개입니다.
소금과 빛이 되라는 것은 우리의 큰 소명입니다.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삶은 견딜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타향도 정이 들어 고향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지만
이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자식의 신앙 문제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성당에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복사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부터 많은 자녀들은 성당을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자녀들은 신앙의 등불이 점점 꺼져갈까요?
대화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잘 찾아주고 도와주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시와 명령은 있었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밖에서 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했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컴퓨터 게임에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그 안에서도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시대에는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았지만
우리들의 시대에는 컴퓨터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나고 논답니다.
학업에 지장이 있지않느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직업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쇼핑도, 은행 업무도, 예약도 대부분 컴퓨터로 하는 세상입니다.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 있기 전에도 폭력과 전쟁은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 우승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끔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견진성사 안 받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견진성사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받는 것인데,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신앙에 확신이 서면 그때 ‘Confirmation’을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리 시간에 배운 것과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공헌한 것도 많지만 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유 있는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의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내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정한 규칙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다.
집안에 기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마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수제비’를 해 주셨습니다.
수제비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찰지게 반죽을 하였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완전히 스며들어 반죽이 찰져야만
수제비는 끓여도 잘 풀어지지 않고, 맛이 쫀득쫀득 했습니다.
수제비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수한 육수와 호박과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는 비 오는 날 저녁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운 부식을 사오지 못한 날에는 ‘비빔밥’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양푼에 야채와 밥을 넣고 구수한 들기름을 넣고 비벼 주었습니다.
맛을 더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수제비가 밀가루와 물이 하나 된 작품이라면
비빔밥은 야채와 밥이 기름에 어우러져서 각자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기름도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빔밥의 고소한 맛을 더해 줍니다.
저는 신앙에는 두 가지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물이 스며들어 밀가루를 맛있는 반죽으로 만들어주는 수제비의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기름처럼 밥과 야채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의 영성입니다.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자녀들의 고유한 인격과 품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대로 하나가 되도록 강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리가 땅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꽃이 피게 하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여라.”
저는 이것이 스며듦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기름이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죽’이 되기보다는 ‘비빔밥’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기름이 되어 아이들의 삶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서 맛을 내는 스며듦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은 각자의 품격을 잃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비빔밥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입니까?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 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지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 해야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빛이다.
연중 제3주일에도 빛이 나오는데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의 전례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시켜
세상에서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언행의 일치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산상수훈의 내용을 확대하고 있다.
마태오는 오늘의 말씀을 산상설교에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신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
즉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3-14절).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고 있다.
소금이란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기능적인 상대성에서 찾아야 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이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께서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13절) 하셨다.
복음에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개념은 세상(14절)과 일치하는 말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행동들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행위가 모든 것에 새 맛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맛과 의욕을 갖게 해 줄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13절).
그런데 천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들 안에 구원의 맛과 그 맛을 전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빛의 상징적 개념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빛의 비유는 산 위에 있는 마을의 비유(14절)와
등경 위에 얹어 비추게 하는(15절)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빛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빛 자체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생명과 기쁨,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빛과 같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에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 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다.
즉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은 산상설교의 정신에 따르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선교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 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줄 수 있고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 1.48)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의 행위 이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 행위는 새벽 동이 트는 것과 같이 시작되어 대낮같이 밝아 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며, 세상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때 교회는 그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1-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것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코린 2,4) 세상에 증거가 돼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삽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바로 우리 믿는 모든 이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신자들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갈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 한결같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짓밟힐 따름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 자명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변질, 변절, 변심하지 않은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삶인지요.
늘 제맛을 지닐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부패로 맛이 간 변질 된 삶이라면 원상복구는 참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제맛의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한 항구한 수행의 노력이 필수이겠습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겠는데 사람은 맛이 가면 버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합니다.”
오래전에 들은 말마디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제맛을 잃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금은 조미료나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있을 때면 모르지만,
적절량이 없으면 금방 맛이 드러납니다. 또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그러니 소금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합니다.
음식 맛을 내기 위한 소금이요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한 소금입니다.
또 소금은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은 점차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면서 서서히 녹아 사라집니다.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작용하면서 자신은 서서히 사라지니
그대로 한결같고 묵묵한 희생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단절 격리된 소금 같은 존재라면 참 무의미한 삶일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존재라면 말 그대로 존재 이유의 상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단수이면서 복수입니다.
참으로 변질되지 않고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세상의 소금 같은 개인이요 교회공동체인지,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인지 묻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듯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같은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인지요?
서서히 꺼져가는 희미한 빛은 아닌지요?
늘 한결같이 세상을 은은히, 환히 밝히는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 삶일까요.
촛불의 이치가 소금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마지막 끝나는 순간까지 서서히 녹아 사라지며 세상을 밝히는 촛불 같은
사랑과 헌신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오늘 마태복음 소금과 빛의 상징어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 산상설교에 나오는 일부입니다. 바로 산상설교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몸소 산상설교의 말씀을 사셨기에 이렇게 힘차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앞의 참 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산상설교 말씀의 수행에 한결같은 분투의 노력과 공부를 다 할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같은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빛나는 모범이자 영원한 롤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숱한 성인 성녀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벌써 부패로 변질 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선의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캄캄한 어둠 속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교회공동체가,
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제반 종교공동체들이나,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상에 동화, 속화되어 제맛을 잃고 부패 된다면,
또 제빛을 잃는다면 그 폐해가 얼마나 크겠는지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종교공동체가 속화俗化 된다면, 참으로 절망적일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부패하면 그 악취는 대책이 없습니다.
불가의 고 성철 큰 스님이 수좌에게 줬다는 평생 좌우명이 소박하나 결코 잊지 못합니다.
'속이지 마라'입니다.
남은 물론 자기도 속이지 마라, 진실하라, 정직하라는 말씀인데
평범하나 얼마나 공감이 가는 말씀인지요!
거창한 거룩함이 아니라 이런 정직하고 진실한 수행자의 삶 자체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입니다.
또 어제 도반형제의 말에 참 반가웠습니다.
"우리 수도원에는 아부하는 형제가 없다"
정말 수도자다운 순수한 모습입니다.
아부한다는 것은 수도자의 정서에 너무 안 어울릴 뿐 아니라
이러면 결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못 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깨달음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살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그 아득한 옛날에 우리를 위한 참 귀한 가르침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참된 단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는 단식은 밥을 굶는 단식의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좋아하셨던 이사야 예언자가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다음 같은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으로 말뿐, 마음뿐, 실천이 결여 된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 지는 내용이라 제1독서 전문을 그대로 다 인용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저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어찌 수천 년 전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이런 진리 말씀이 선포됐는지
참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없는 삶과 유리된 단식이나 전례 행위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 하나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대로 온 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겸허한 미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파스카의 삶을 살아갔던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애오라지 이런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된 삶이라면
그 삶 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 같은 삶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 되어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빛은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하나 될수록
비로소 우리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가 변질 부패 되는 것을 막아 한결같은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또 한결같이 세상을 밝히는 환한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맛을 잃는다.’는 동사는 그리스어 원문에 ‘어리석어진다.’는 동사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같은 동사를 찾아보면,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여 삶이 제맛을 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소금과 빛, 이 두 개의 단어로
복음서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할 역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않고, 녹아서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빛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불태워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고,
보이지 않던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인을 소금과 빛에 비유한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행복 선언’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소금과 빛으로 있기 위해 요구되는 실천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행복 선언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선언은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행복 선언들은 지켜야 할 계명도 아니고, 닦아야 할 德目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자적 선언이며 권고입니다.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서 일하시게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느님은 자유를 지닌 인간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 무엇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같은 계명을 지키고,
같은 덕목을 수련하여 劃一的으로 살 것을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피조물과 다양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입니다.
획일성을 강요하면, 인간 생명은 위축되고 창의력도 말살됩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살 것을 원하셔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실천으로 소금과 빛이 되어
은혜롭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그분은 주어진 각본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교가 요구하던 계명 준수에 얽매여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당신의 창의력으로 다양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만나고, 병고를 덜어주고,
죄인이라 낙인찍힌 이를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 혹은 직업이 세리라 유다교 당국으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을 만나면, 그분은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당부하신 말씀도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며 죄를 용서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바를 제자들도 실천하여 사람들을 살 맛나게 하는 소금이 되고,
사람들이 진실을 보게 하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는 먼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것을 많이 가지겠다는 욕심은 강박관념이 되어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런 욕심에 사로잡히면, 재물을 마치 인생의 목적인 양, 그것을 위해 삽니다.
복음은 그런 욕심의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것에서 벗어 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복음서는 또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무슨 일에든,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웃의 생각을 알아듣기 위해 온유하게 경청하고,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복음서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인생이기에, 신앙인은 자기도 이웃에게 베푸는 노력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이 베푸셨기에 우리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자기를 기준으로 주변을 보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며, 자기를 사람들 앞에 과시할 수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웃보다 더 강하고, 더 높아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함께 계신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소금과 같이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내어주어서,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섬김을 세상이 맛보게 합니다.
신앙인은 빛과 같아서 자신을 소모하고 욕심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에게서 배워, 참다운 자유를 실천합니다.
우리의 실천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보살핌과 용서가 사람들의 삶의 맛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보살핌과 용서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보게 하는
새로운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