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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승학산 억새
낙동강을 건넜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남진을 하며 낙동강하구언을 지나 다대포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지하철 사하구 괴정역이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산기슭을 오른다. 애당초 부산(釜山)은 그 자체가 한반도 동남쪽 모서리 해안의 한 산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며 산 따라 주택이 들어서고 터전은 넓혀져 방대한 지역이 되어 우리나라 제2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시멘트로 포장된 기슭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20여분 헐떡거리며 돌샘약수터에서 물 한 구기 마신다. 좀은 미적지근한 것이 속을 식혀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본 능선에 올라서야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주변에 소나무의 에이즈라고까지 불리는 재선충 탓인가 비닐을 푹 씌워 논 소나무의 무덤이 보이며 여기저기 보기에 그리 탐탁하지 않다.
길 따라 왕벚나무들이 보이지만 지금은 볼 품 없는 평범한 수목일 뿐이다. 다시 한샘약수터다. 주위에 휴식할 수 있는 의자며 운동구도 일부 준비 되어있다. 부산 아주머니들 특유의 보다 높은 톤의 수다스런 목소리가 숲으로 번져나간다. 연한 보랏빛 구절초 해말간 모습이 청초하기만 하다. 아마도 저 구수한 이야기들을 귀동냥으로 먹고 자라며 텁텁하게 꽃을 피웠나 보다. 햇살을 맞으면 아직도 땀이 흐르며 몹시 따가운 날씨다. 그러나 숲속 응달에 바람이 불어오면 서늘하니 가을을 실감한다. 양지와 음지에서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극우와 극좌의 이분법 같다. 큼직한 바위에 올라선다. 옅은 해무에 덮인 바다가 들어온다. 좀은 비좁아 보이는 포구를 빠져나가며 몇 개의 섬들도 떠있다. 웅장한 모습에 구덕산기상관측소의 건물을 따라 간다.
구덕산 정상에 섰다. 잠시 부산을 조망한다. 저 아래가 구덕체육관이고 너머에 영도다. 용두산 공원도 보이고 그 아래로 자갈치시장도 있을 터이다. 왼쪽으로 우뚝 솟은 금정산이다. 해안을 타고 용케도 집들이 산을 타고 오르고 있지 싶다. 깎아진 절벽에 누운향나무를 심어 온통 푸르게 바꾸어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상의 억새꽃이 막 피어올라서 풋풋한 모습이 좋다. 이제 건너편에 승학산을 향해 간다. 가는 길 산자락 9만여 평이 온통 억새밭으로 부산시민의 가을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이름이 거론된다. 부산의 가장 서쪽에 있는 산으로 그 모습이 마치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여 승학산(乘鶴山)이라 하는데 불과 496m의 나지막한 산이다. 지금은 비록 학이 없지만 가을이면 억새꽃이 피어 은빛날개를 펄떡이나 보다.
억새를 본다. 바다를 본다. 그러다 보면 바다에서 억새가 출렁이고 억새에서 바닷소리가 들리지 싶다. 그렇게 기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억새가 지나는 바람을 등에 업고서 으악으악 울어댈 때 바다는 바람을 안고 출렁거리며 해조음을 쏟아내는지도 모른다. 낙동강에서 올라온 바람과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은 연신 담금질을 하며 억새를 아주 억세게 만든다. 여기서 치받고 저기서 치받기에 가능한 키를 낮추고 몸뚱이를 보다 강인하게 단련을 하였지만 여름날 수많은 비와 여러 번의 태풍에 피해갈 수 없어 군데군데 많이 망그러졌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듯 포기하지 않고 끝내 긴 목을 뽑아 꽃을 피웠다. 처음엔 다소 붉은 빛을 띠우기도 하지만 갈수록 하얗게 은빛으로 변해가며 출렁이는 모습이 가히 환상적이라 할 것이다.
그래, 비록 꺾일망정 굽히지는 않는다고 했던가. 그 불굴의 정신들이 모여 억새 숲을 이루며 일사불란한 춤사위에 넋을 놓고 바라본다. 그 속에 풍덩 빠지듯 사이사이 길을 따라 승학산에 오른다. 저 아래로 낙동강이 들어온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듯 해안 쪽보다는 그래도 넉넉해 보이는 들녘이 있어 마음이 멀리 따라가 본다. 산자락 아래로 동아대학교가 둥지를 틀고 있다. - 2010. 09. 28. 文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