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석 시집/ 호반의 시편, 산수의 노래/ 도서출판 마을/ 2023
나는 새 시집을 사서 첫 장을 펼칠 때와 마음 나누는 지인과 함께 소주 첫 잔을 마실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 시집이 그랬다.
사진에는 시집 표지가 약간 분홍빛이 돌지만 실물은 자주색이다. 예로부터 자주색은 귀족을 상징했거니와
영국 왕실을 나타내는 색도 자주색이다. 나는 자줏빛 도는 이 시집 표지를 들추며 고급진 한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다.
나는 순전히 시집만으로 그 시인을 가늠한다. 세 번째 시집 약력 사진을 보고 그가 대금을 연주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산문집에서 다음 아이디가 kimsaid라는 걸 알았다. 나는 시인의 약력에서 찾은 이런 것까지 보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탐색한다.
said가 say의 과거든 과거분사든 글 쓰는 사람에게 딱 맞는 아이디다. 이 시집 자서에 해당하는 첫 장에 이런 문구가 있다.
<부끄러워도 내 것이니 얼굴을 내밀어본다>. 그는 이전 시집을 낼 때도 부끄럽다고 했다. 겸손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의 글이 좋다.
<글을 쓴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니 쓰고 나면 후련해지기도 한다>. 산문집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를 안 것은 시집이었지만 산문집 <꽃눈 뜨자 눈꽃 내려>를 읽고 나는 이 사람을 참 글쟁이로 인증했다.
시는 즉석에서든 긴 시간이든 다듬으면서 완성되지만 산문은 오랜 기간 사유의 깊이와 삶의 내면이 온전히 숙성되어야만 쓸 수 있다.
조폭 영화에서 억울하게 감옥을 다녀온 후 복수를 위해 몇 년 죽도록 공부를 해서 검사가 되기도 했지만 글쓰기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밀린 시험 공부하듯 속성 과외로 되지 않는 것이 글쓰기다.
산문이 문학의 꽃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분야의 문학인이든 산문 잘 쓰는 작가를 제일 먼저 글쟁이로 인정한다.
나는 김난석의 수려한 산문에서 인생의 깊이를 느꼈고 쌓고 비우기를 반복한 그의 인생을 보았다.
나는 김난석 시인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망정이지 대면한 후였다면 얼마나 낯이 간지러울 것인가.
행여나 저 새끼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인연, 그 허망함이여 - 김난석
사는 게 늘 그렇듯
나뭇가지에 눈서리로 올라붙어
제 숨소리에 흔들리기도 하고
(雪上加霜)
갈댓잎 흔들리는 눈밭에 기러기 내려앉듯
가만히 내려앉아 발자국만 남기기도 하느니
(雲泥鴻爪)
때론 인연 아닌 인연도 있는지라
눈감아버리자
그러나 영영은 아니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두 인연 흔적 모두 사라지고 마느니
그땐 옛 노래나 부르자.
나는 이 시를 대표작으로 올리면서 시를 떠받치고 있는 사자성어에 정점을 찍는다. 만약 설상가상, 운니홍조라고 한글 표기를 했다면
시 맛이 제대로 났을까? 이 시는 雪上加霜 雲泥鴻爪가 싯구 아래에 벽돌처럼 고여져 있을 때 제맛이 난다.
은은한 동양화 한 폭을 보는 것처럼 회화적이면서 가정법 없는 직유법이 독자의 이해력을 돕는다.
죽(竹) 치고 앉아
작난(雀蘭) 치려니
창밖에 짹짹!
*시/ 파적(破寂)/ 전문
이 시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인 <바람 불어 더 좋은 날>에 실렸다. 나는 이 시를 읽고 마치 일본의 하이쿠를 읽은 것처럼 감탄을 했다.
한자와 한글의 오묘한 조화, 적막을 깨는 듯한 기발한 표현은 韓中 두 나라의 문자에 해박해야만 나온다.
이 시집 곳곳에 이런 싯구가 있어 줄곧 마음에 와 닿았다.
내 인생은 자주 어긋났기에 회한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 운니홍조를 허공에다 새긴 것처럼
내 인생은 자취를 알 수가 없고 불확실하다. 하긴 삶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할 사람 어디 있으리.
태어났으니 살았고 살아 있으니 이런 시도 읽는 것 아니겠는가. 인연의 허망함을 일깨워 준 이 시를 읽고 문득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는 영국 작가 마리아 에지워스의 명언이 생각났다.
혼자 부르는 노래 - 김난석
난야
네가 아니어도 좋다
내가 아니면 더욱 좋단다
하얀 버선발로 다가와
바람 휘감고 사라졌느니
서둘러 문지방을 넘느라
그림자는 흘리고 갔구나
너는 갔으나
난야
간 것은 아니다
보고 싶은데 너는
너는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는 네가 있다
난야.
시집에는 <난야>라는 호칭이 자주 나온다. 시뿐 아니라 시집 말미에 실린 몇 편의 수필에서도 난야가 언급된다.
영화 감독이 특정 배우를 자화상처럼 여기듯 난야는 김난석 시인의 페르소나로 자신이면서 맞은 편의 당신일 것이다.
시집을 읽고 저자한테 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말은 그냥 <좋네요>다. 시뿐 아니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다.
댓글 <잘 읽고 갑니다>처럼 좋네요는 뒤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설마 작가가 어떻게 좋은데요? 라며 되묻기야 하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좋네요라는 편한 길 대신 이런 글을 쓴다. 긴 글은 잘 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시집뿐 아니라 김난석 시인의 글에는 예술지상주의자의 무한한 날갯짓을 감지할 수 있다.
文史哲에다 다방면의 예술에까지 조예가 깊으니 어찌 그의 인생이 풍요롭지 않으리.
나는 시집을 읽고 그의 정체성을 和而不同이라는 사자성어로 마무리한다.
和而不同 사전적 의미는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장수사회가 되었다지만 팔순까지 건강하게 살기도 어렵거니와 팔순에 시집을 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만큼 매사에 자기 관리를 잘 했기에 가능하다. 마음에 닿는 시 한 편 더 올리면서 언감생심 시인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글 친구 합시다. 시인님께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김난석 시인의 건필을 빈다.
꽃을 피운다는 건 - 김난석
꽃을 피운다는 건 하늘과 땅 사이
충만하는 것
그곳에 꼭 있어야 하는
그러나 곧 사라져야 하는 거다
한 가닥 향기로 오르고
한 가닥 밀알로 묻혀야 하는
꽃을 피운다는 건 하늘과 땅 사이
그렇게 빈자리 하나 만드는 거다.
# 이유 있는 뱀발
그는 동인집이든 개인 시집이든 간에 책에 실린 이력에서 나이를 밝히지 않고 있다. 작년에 처음 접했을 때 그랬다.
얼추 7학년은 훨씬 넘어섰을 것으로 보였고 설사 그가 8학년이면 어떠랴 했는데 올해 딱 맞춰 傘壽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그의 生面에 앞서 오직 글로 교류하는 文面을 볼 뿐이다.
내가 오프라인 만남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에 그를 영영 안 보고 지나갈 수는 없겠으나 친해지면 선입견 때문에
이런 글쓰기가 수월하지 않다. 어쩌면 얼굴 익히기 전에 오직 시로 만난 지금의 관계가 객관적이서 좋다. 지금 쓰기를 잘했다.
첫댓글
작난을 먹그림으로 의뢰받아
해드렸는데 송구하더라구요
카페에 이런 분이 계셔서
서권기를 나누주심은 우리들의
문복이지요
그러셨군요.
석촌 선배 시는 그림이나 서예로 옮겨도 좋을 작품이 여럿 있더이다.
나중 평화님 전시회에 간다면 내 가슴에 가득 담아서 후기 한번 맛나게 쓸 기회를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저도 이 시집 읽은 것을 복이라 생각하네요.ㅎ
ㅎㅎㅎ
석촌님 쎈친구 등장으로
꽃눈 뜨는 아침을 다시 만나게 될지...주목됩니다.
가을님 그런 소리 하덜 마소.
나 같은 시정잡배는 말석에 앉아 멀찌기서 시인님 글향이나 맡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거늘,,
내가 말하는 친구의 의미는 그런 자리 꼽싸리 껴달라는 부탁이랍니다.ㅎ
석촌님이나
유현덕님 글이 참 좋네요.
라고만 할게요.
오늘 아침
석촌님 글 읽고 그 감동이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여운이 남고 다시 되새겨 보게 하는
멋진 글 정말 매력있지요.
묵은 장맛처럼
진득한 깊이가 느껴지는 석촌님글을
어찌 안 좋아 할 수가 있을까요.
며칠전 1990년생 작가의 시집을
앉은 자리에서 세 시간동안
읽었는데 신선하고 참신했지만
정서가 공감되지 않아
세대차이를 느꼈습니다.
부디,
석촌님과 유현덕님
이곳에 글벗으로 오래오래 계시길요.
앗! 제라님,
댓글에서 저의 긴 글을 정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라님은 댓글로도 친구 자격이 충분합니다.
80년이라는 오랜 세월 숙성된 사유에서 나오는 싯구가 오죽하겠습니까.
산문을 보면 그 사람의 내공을 느낄 수 있는데 밑줄 긋고 싶은 명문들이 참 많았네요.
공유해 주신 제라님, 글벗이란 단어가 참 정겹습니다.ㅎ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죽치고
작난치려니
창밖에
짹짹
얼마나 기발하고
신선한지 ㅡㅡ
사람도 이래야쓴당게라
석촌님이나
유현덕이나
글이 너무 고급스러워
예를 갖춰 댓글을 달아야하는데
그 게 참 어려워요
물론
글을 간파하는 실력 부족이겠지만요
두 분 글
참 좋으네요
내가 오히려 윤슬님의 고급진 댓글에 흠집을 낼까 답글 달기가 저어됩니다.
마치 쌍둥이처럼 저와 보는 눈이 비슷해서 윤슬님도 그 시에 꽂혔나 보군요.
술이 먼저냐 풍류가 먼저냐를 가르자는 사람도 있겠으나
풍류 없는 술은 술폭이 될 수 있어도 풍류 뒤에 오는 술은 술술 마음을 데워주지요.
나는 잡탕이라서 풍류든 술이든 순서 따지지 않고 무조건 먹는다요.
하여, 윤슬님도 나와 술글 친구합시다.ㅎ
@유현덕 제게
술은
가장 ㅡ맛 ㅡ없는 음식이면서
가장 ㅡ멋ㅡ있는 음식이기에
술 맛 나는 분과 함께라면
곧잘 마시는데
감성과 이성이 시이소게임 할 쯤
실실 웃는 것이
영락없이 나사풀린 여인네 같다고나
할까요 ㅎㅎ
현덕님이 요즘 많이 유해졌음을
느낍니다ㆍ
술
글
쪼깐 딸리긴 해도
저의 화술로 커버할 수 있을 겁니다 ㅎ
좋은 글에 좋은 댓글 나는 그대들이 주고 받다 흘린 것이나 없는가 바닥만 쓸다 가려는데 괜찮겠쥬?
운선님의 맛깔스런 글에야 비하겠습니까.
되레 제가 운선님 글에서 행여 떨어진 거 없나 이삭줍기를 합니다.
운선님 글을 읽고 동기가 되어 쓴 글도 있네요.
동기 부여가 되는 그것을 저는 달빛에 함께 걷는 글동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이곳에서 오래오래 글동무해요.ㅎ
ㅎㅎㅎ 하여튼 운선님의 이 여유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석촌님 글에 대한 촤고의
찬사 로군요.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알고 존중 한다는것
글의 깊이는 아예 판단할 엄두
도 자격도 없지마는 인생
살아가면서 큰 행복 중 하나라
생각이 됩니다.
전 아름문학상 글이던 책이던
사실 별 관심이 일지도 않고,
좋은글 작품성 있는글 같은곳도
제겐 별 관심사항은 아니지만
삶방에 가끔 이렇게 고급지고
깊이 있는글을 마주할때 읽는
재미가 쏠쏠 하네요.
두분이서 오래오래 따뜻한 우정
글벗으로 지내시기를 바래봅니다.
제가 금박사님 글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면 사람 냄새 나는 글맛을 느끼곤 합니다.
님처럼 가슴에서 나오는 대로 솔직하게 쓴 글이 좋은 글이랍니다.
사람 잘나고 못나고의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더라구요.
그럼에도 저는 잘난 사람 만나면 존중해주고 박수쳐 줍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일이니까요.
삶방에 오래 머물면서 생활 글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ㅎ
어제 잘 읽었습니다.
탈자 하나 있었는데...ㅎ
그건 순도 99.9 프로란 뜻입니다.
바로 오타 수정했는데 그전에 읽으셨나 봅니다.
시를 옮길 때는 행여 오탈자로 인해 시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눈을 부릅 뜨지요.
제 글쓰기는 저를 위한 것이기에 쓰고 난 후 뒷감당도 저의 몫입니다.
책임질 수 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석촌 선배가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좋은 글 많이 쓰시기를 소망합니다.ㅎ
향기로운 글 한자한자 되새김질 하면서 읽었습니다 ㆍ고맙습니다 ㆍ건강하십시요 ㆍ
추소리님의 뒤늦은 댓글이군요.
제 글이 되새김질 할 만큼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의 있게 쓰려고는 합니다.
저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님도 건강하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