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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성산(省山)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 별세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의 빈소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고인은 '비 내리는 호남선', '아리랑 목동', '섬마을 선생님'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했다.
/연합뉴스
작곡 40년… 명가수·명곡을 남기고 떠난 사람
2700곡 대기록 박춘석씨 타계… 이미자 "내 노래에 자부심 갖게해 준 분"
"94년 쓰러지셨을 때, 이제 의지할 데를 잃었다는 생각에 1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노래 부르는 일에 자부심을 갖게 해 준 분이 박 선생님이었어요. 스승이자 가족과 같았지요. 너무 공허합니다." 엘레지(비가)의 여왕, 이미자의 목이 메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오선지에 담아 40여년간 2700여 곡을 만든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씨가 14일 오전 6시 강동구 둔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80세. 고인은 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해왔다. 동생 금석(78)씨는 "5년 전부터 의식이 희미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최근에는 동생인 저도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었다"며 "그래도 매주 방송되는 '가요무대'에서 자기 노래가 나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고 애통해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악기를 잘 다루던 '음악 천재'는 경기중 4학년 때 이미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주목받았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한 그는 50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12인조 악단을 결성해 미8군 등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해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장이 됐다.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54년 백일희가 부른 노래 '황혼의 엘레지'를 만들면서다. 1955년부터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전속돼 활동하면서 '아리랑 목동'(박단마), '비 내리는 호남선'(손인호) 등을 히트시켜 유명세를 타게 됐다.
한국의 두 여가수, 패티김과 이미자는 고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패티김에겐 모던한 감성의 곡을, 이미자에겐 한국의 한과 정서가 듬뿍 담긴 노래를 주로 작곡해줬다. 패티김은 고인이 만든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과 '파드레'가 수록된 첫 독집 앨범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 '초우' '못 잊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을 함께 작업했다. 이미자와의 관계는 더욱 긴밀했다. 팝과 재즈적 분위기 물씬하던 박춘석의 음악은 이미자를 만나며 트로트까지 확장된다.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등 3대 히트곡은 물론,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떠나도 마음만은' 등 700여 곡의 주옥같은 노래를 선사했다. 그가 일생 작곡한 노래의 4분의 1이 이미자를 통해 대중을 만났다. 고인의 마지막 히트곡도 92년 발표된 이미자의 노래 '노래는 나의 인생'이다. 동생 금석씨는 "형님이 '노래는 나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박춘석 사단(師團)'은 쟁쟁했다.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은방울 자매, 쟈니 브라더스가 그들이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그의 노래는 1152곡으로 개인 최다 기록이다.
명성은 일본에도 알려져 1978년에는 엔카의 전설 미소라 히바리에게도 곡을 줬다. 외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1994), 옥관문화훈장(1995) 등을 받았으며 지난해엔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박춘석기념사업회 추진위가 발족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자식 대신 최고의 가수들과 함께 명곡을 탄생시켜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 18일 오전 8시. (02) 3010-2370
[작가 탐구]작곡가 朴椿石 -국내 최다 2천7백여 곡 발표,
노래마다 ‘살아 있는 악상’,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일 뿐’이라며 평소 ‘가요와 결혼했다’고 늘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작곡가 박춘석 선생.
활동 기간 40여 년 동안 ‘쉼 없는 창작열’로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2,700여 곡을 발표했고
아울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최다 등록 작품, 1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속칭 ‘박춘석 사단’이라 불리던 톱 가수 군단과 함께 ‘이인삼각(二人三脚)’을 이루며
SP시대를 지나 LP시대, 그리고 CD시대까지 풍미하며 한국가요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선생 음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글ㅣ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신동’.
50년대 천재 재즈 피아니스트로 등장해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 안경’의 변함없는 캐릭터로
화려한 악상과 연주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박춘석 선생.
지난 94년 8월, 밤새 작곡에 몰두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현재까지도 투병 중인 선생의 소식은
많은 가요인들을 매우 안타깝게 하고 있다.
본명은 의병(義秉), 춘석(春石)은 아명.
1930년 5월 8일, 해방 전 조선고무(朝鮮고무工業株式會社)를 운영하던 부친 박영근(朴永根)과 모친 최진주(崔鎭珠)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서울 의주로 1가, 즉 서소문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음악적으로 매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신동’으로
불과 4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
현재 선생의 둔촌동 집 근처에서 12년 째 돌보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박금석(74)씨는
“어릴 때부터 형은 유성기에서 한번 들은 노래를 곧바로 화음을 붙여 다시 풍금으로 연주해내는 천재였다."고 회상한다.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누구의 특별한 지도 없이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독파했던
이 ‘범상치 않은 귀재’가 피아니스트로 처음 무대에 선 것은 48년, 경기중 4학년(고교1년) 때다.
처음 김영순(베니김), 최치정(길옥윤)씨가 찾아와 명동의 나이트클럽인 ‘황금클럽’ 무대에 함께 설 것을 제의해 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 계기. ‘빡빡머리’에 ‘털모자’를 쓴 채 클럽 연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중퇴한 뒤
다시 이듬해인 50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 졸업했다. 본격적으로 악단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 것은 9.28 수복 직후부터.
당시 12인조 악단을 직접 결성해 충무로 2가 ‘은성살롱’에 전속밴드로 들어간 뒤 이름도 ‘은성(Silver star)경음악단’으로 명명했다.
이후 미군 상대 클럽인 ‘금천대회관’ 등의 무대에도 섰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으로 들어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박단마 그랜드쇼’와 콤비를 이뤄 백일희, 곽순옥, 이해연, 후라이보이와 함께
시공관에서 ‘코리아 판타지’라는 공연을 올려 호평을 받기도 했다.
주로 샹송과 팝 등 외국가요 편곡이 레퍼토리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 무렵, 주위의 권유로 창작한 첫 작품이 바로 ‘황혼의 엘레지’.
이로부터 10년 후 가수 최양숙의 목소리로 대중들에게 히트하는 이 ‘황혼의 엘레지’는
처음 유니버샬을 통해 백일희의 목소리로 먼저 취입(유니버샬/PL 17) 되었다.
아울러 그는 55년, 본격적으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기 전까지 ‘황혼의 엘레지’를 비롯해
‘서커스 걸(백설희, 유니버샬/PL 28)’ ‘샌프란시스코 블루스(백일희)’ 등을 취입, 음반으로 발표하는데
이 때 작사가 명으로 쓴 예명이 ’백호(白湖)’. 이 필명은 동생 박금석씨가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KBS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한 지 1년 뒤인 55년, 오아시스에 전속되면서 전속 기념으로 내놓은 첫 음반이 박단마의 ‘아리랑 목동’.
이어 56년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손로원 작사, 손인호노래)’을 히트를 계기로
스물여섯 살의 이 젊은 신예는 비로소 천재성을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어 ‘나폴리 맘보(고명기, 현인)’, ‘아주까리 주막집(백호, 안다성)’, ‘불국사 길손(반야월, 최갑석)’ 등 창작곡을 비롯해
‘로즈 마리’ ‘인디언 러브 콜’ ‘사브리나’ 같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곡을 백일희, 현인 등과 콤비를 이뤄 발표했다.
‘백일희’라는 이름은 당시 인기 팝가수 ‘페기리’에서 딴 이름으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의 동생이기도 하다.
백일희의 소개로 알게 된 또 한 명의 가수가 패티김(김혜자).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까지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첫 독집음반을 통해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 ‘파드레’를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엔 패티김의 소개로 함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여성듀엣 김치켓을 소개받아
역시 번안곡인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발표한다.
이때부터 ‘박춘석 악단’을 이끌고 주로 박단마, 백일희 등 당대의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그는
창작 스타일을 1백80도 전환,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으로 까지 창작 범위를 넓힌다.
영화음악 첫 작품은 ‘진리의 밤(57년, 김한일 감독)’.
아울러 59년, 김석민 원작의 연극 ‘삼팔선의 봄(노래 황해, 이후 최갑석 취입)’을 비롯해 연극 무대음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
다양한 음악적 실력을 선보인다.
이후 영화 ‘사랑이 가기 전에(59년, 정창화 감독)’, ’비극은 없다(59, 홍성기)‘ ’고바우(59, 조정호)‘, ‘슬픔은 강물처럼(60, 전창화)’,
‘딸(60, 김화랑)’, ‘슬픔은 없다(60, 김묵)’, ‘어딘지 가고 싶어(62, 유두연)’, ‘임자 없는 나룻배(62, 엄심호)’등을 비롯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94년까지 쉴 새 없이 1백여 편의 영화음악에 몰두해왔다.
아울러 영화 ‘유랑극장(63, 강범구)’주제가인 ‘바닷가에서(안다성)’ ‘사랑이 메아리칠 때(안다성)’를 비롯해
‘남과 북(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곽순옥), ‘고향하늘은 멀어도(금호동),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박재란)’ 등을 발표하며
오아시스 전속 기간동안 히트 작곡가로 부상하며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1964년, 지구로 전속을 옮기며 스스로 ‘제2의 전환기’를 맞아 작풍도 본격 트로트로 급선회한다.
비로소 이미자씨와의 콤비시대가 개막된 것.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떠나도 마음만은’
‘삼백리 한려수도’ ‘낭주골 처녀’ ‘타국에서’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이미자씨와 콤비를 이뤄 발표한 곡이 무려 7백 여곡.
말하자면 이미자씨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왕관을 씌워준 장본인이 선생으로 히트곡의 4분의 1을 이미자씨가 불렀고, 또 그의 히트곡 3분의 1 역시 박선생이 지은 노래인 셈이다.
당시 빅 히트 3대 공식이었던 이 ‘지구+박춘석+이미자’라는 진용을 이뤘던 시기에 그는
‘가슴 아프게(남진)’를 비롯해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방앗간집 둘째딸(쟈니브라더스)‘,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등을 잇달아 발표, 히트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다.
동시에 영화음악작업도 계속 병행했다.
‘마포 사는 황부자(65, 이봉래)’, ‘남과 북(65, 김기덕)’, ‘초연(66, 정진우)’, ‘밤하늘의 부르스(66, 노필)’, ‘초우(66, 정진우)’,
‘가슴 아프게(67, 박상호)’, ‘섬마을 선생(67, 김기덕)’, ‘그리움은 가슴마다(67, 장일호)’, ‘엘레지의 여왕(67, 한형모)’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84, 정진우)’ 등이 그 것으로 그의 히트곡은 곧바로 영화로, 또 주제가는 곧바로 히트곡으로 자리하며
만인의 가슴을 적셨다.
‘어떤 가수도 박춘석씨에게 픽업되면 성공한다.’는 등식까지 화제가 되었던 66년 무렵.
그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직후 67년 3월, 시민회관 대강당 무대에서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 째 발표’라는 이색적인 타이틀의 공연을 펼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자신의 노래 모두의 전주와 간주는 물론 치밀한 계산 아래 다양한 편곡을 스스로 했던 인물.
70년대 들어서자마자 ‘박춘석 창작가요 2천곡 기념공연’ 무대를 국도극장에서 막을 올림과 동시에
‘박춘석 사단’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이어 ‘박춘석 작곡사무실’을 열어 이현, 이영일 등 신인을 발굴함과 동시에
‘물레방아 도는데’의 나훈아, ‘연포아가씨’의 하춘화 등 정상급의 가수들과 손잡고 히트 곡 행진을 계속했다.
국내 히트 작곡가로의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 측의 의뢰로 일본 최고의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에게 ‘風酒場(かぜさかば)’를 취입시켜,
외국인 최초로 그에게 신곡을 써준 인물로 자리매김 된다.
현재 ‘美空 ひばり전집 CD’에 수록되어 있는 이 노래를 기점으로 그의 음악성은 더욱 인정받아 이로부터
11년 뒤인 89년, 미소라 히바리가 세상을 타계했을 때에는 ‘초청하객 인사 1백인 명단’에 그가 포함되었을 정도로
일본 측으로부터도 그의 음악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80년대 초반, 작곡가 길옥윤, 송재리씨 등과 함께 ‘(주)태양음향’을 공동으로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88년 거성레코드사로 독립,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을 직접 음반으로 제작을 시도했던 적극적인 가요인이었다.
1987년 한국 음악 저작권협회 회장을 거쳐 95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서훈 받은 그는
지난 94년 8월, 밤새워 곡을 쓰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완벽주의자‘인 그는 이러한 와병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거부해왔었다.
3년 전 폐렴으로 큰 위기를 넘긴 이후 현재는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지만
이젠 가까운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평생 음악적 동지이자 동생인 박금석 선생이 현재 그의 손발을 대신하고 있다.
‘오로지 음악과 결혼했다’며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한국 가요의 지평을 넓힌 작곡자이자 탁월한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그가 남긴 살아있는 화성들은 여전히 만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첫댓글 사람은 떠났어도 노래는 영원히 남는 것~~~~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이~~~~삼가 명복을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