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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7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창세 1,20―2,4ㄱ
복 음 : 마르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 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라고 하는 독성 화학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더 오래 있고 싶어도 그렇지 못함을 불만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으면,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더 오래 좋은 자리를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시아 인구의 절반이 얼굴 홍조 현상과 같은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유전적 결함이 오히려 더 고마운 것임을
일본의 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1,300명의 알코올 중독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중 홍조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의 숫자를 파악했습니다.
몇 %나 홍조 현상을 드러냈을까요? 깜짝 놀랄만한 결과였습니다. 0%였습니다.
단 한 명도 홍조 현상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인구 절반이 홍조 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알코올 중독자 중에서는 단 한 명도 홍조 현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홍조 현상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잘 생각해보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불만스러웠던 얼굴 홍조 현상도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왜 이렇게 술 마시기 힘들까?’ 하며 힘들었는데,
이 역시도 하느님의 배려이고 선물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하느님의 배려와 선물이 아닌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단점이 오히려 장점도 될 수 있으며,
싫어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유익한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조건 거부하고 나쁜 것으로 단정을 지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뿐인 종교를 따르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자체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로 향한 내적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거룩함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어디에서나 계신 하느님의 손길을 찾았다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항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모습을 많이 취합니다.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들,
그 모습 안에서 하느님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밭에 묻혀있는 보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도, 들에 핀 꽃에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에서도
하늘나라의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과달루페 성지에서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보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과달루페 성지의 시작은 1531년 원주민인 후안 디에고 성인이 성모님을 만나면서입니다.
성모님은 디에고에게 주교님을 찾아가서 성당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의 말을 들은 주교님은 믿지 못하였고,
그렇다면 성모님께 징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의 말을 들은 성모님은
디에고의 틸마(겉옷)에 장미꽃을 담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가 주교님께 장미꽃을 드리면서
디에고의 틸마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졌습니다.
주교님은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면서
성모님의 말을 믿었고, 과달루페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과달루페 성당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있습니다.
많은 순례객들이 성모님의 성화를 보면서 기도합니다.
저도 매일 아침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사람들이 성모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성화 앞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습니다.
성당의 뒤편에는 ‘휘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성모님의 성화 앞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폭탄이 터졌지만, 기적적으로 십자가만 휘어지고 성모님의 성화는 무사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청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단 옆에는 ‘성체조배실’이 있습니다. 저도 시간이 나면 성체조배실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성체조배실은 순례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품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매시간 정시에 미사가 있습니다.
과달루페 성지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신앙인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은 많지만,
현지인들이 매시간 미사 드리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과달루페 성지는 매시간 현지인들이 사제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과달루페 성지는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사는 현지인들의 함께하는 성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주, 성단, 은하, 은하계, 태양계, 지구’입니다.
역시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전선하십니다.
규모도 크고, 우리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으십니다.
지구에는 특별한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번식하고, 스스로 보존하고, 후손을 남기는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우주를 생각할 수 있는 지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과
영원한 추구할 수 있는 오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그렇게 수가 늘어났고,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은 아니기 때문에
역사 앞에서 많은 오류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만의 명예와 능력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이며,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피부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소중한 전통이 파괴당했고, 그들의 전통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제국주의 역사관에 의해서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존재의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방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곧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이는 단지 위생이나 청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 관습 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 하여, 음식물만 깨끗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 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상들의 전통
조욱현 토마스 신부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참되고 반듯한 삶,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다
성덕聖德의 훈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부터 시작된 제1독서 창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다섯째 날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천지 창조는
엿새 날 그 절정인 인간 창조에 이어 이렛날에 쉬심으로 끝납니다.
독서 후 첫 느낌은 “하느님은 참 멋지신 분이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치밀하고 섬세한 질서정연한 창조는 인간 창조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마련하신 후 인간 창조입니다.
이 천지창조 과정 중 만약 하느님의 유일한 파트너인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공허할까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천지창조의 의미이자 목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라도 사람이 없다면
참 쓸쓸할 것이고, 이웃이 없고 나 혼자만이라면 곧 미쳐버릴 것입니다.
마지막 엿새 날의 창조의 절정인 인간 창조 대목을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입니다.
천하 만물을 다스리며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사명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주목할 바 이때 인간의 양식은 육식肉食이 아닌
순전히 풀과 열매의 초식草食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새삼 창조 본연의 하느님을 닮은 참되고 반듯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총과 더불어 평생 성덕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똑같이 은총의 선물로 받은 인생이지만 평생 한결같기는 얼마나 힘들겠는지요!
도중에 변질 되거나 타락하여 실추되기 십중팔구이겠습니다.
그래서 제 지론은 광야 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요즘 면담성사를 주면서 참 많은분들이 자녀들 문제로 고충을 토로합니다.
듣다 보면 저절로 탄식이 나옵니다.
“악순환이구나!
꿈도 희망도 없고 어른이나 부모로부터 참되고 반듯한 삶을 보고 배운 것도 없고,
훈련도 없으니 어찌 잘 성장할 수 있겠나!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구나!”
하느님 지으신 창조 세계를 관상하는 인간,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한 인간!
바로 다음 시편 8장 화답송 내용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궁극으로 꿈꾸고 희망해야 할 존귀한 품위의 인간 모습이겠습니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으로 빚으신 하늘하며,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
얼마나 멋지고 고귀한 품위의 인간 존재인지요!
바로 우리 인간이 궁극으로 꿈꾸고 희망해야 할 하느님을 닮은 인간상이겠습니다.
이래서 은총의 선물에 이은 평생 성덕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작물 농사는 일 년이지만, 사람 농사는 평생이란 말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은 원초적 인간에 근접한 분들이 성인이겠습니다.
어제 구입한 “나무처럼 자라는 집”이라는
의식이 있는, 깨어 있는 어느 젊은 건축가 부부가 만든 책인데
앞 월리엄 워즈우스 영국 시인의 詩句,
“평범한 삶, 고매한 생각(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순서는 고매한 생각에 평범한 삶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삽니다.
고매한 생각에 평범하고 고매한 성인다운 삶이겠습니다.
십계명이나 율법,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은 좋지만,
율법주의자라는 꼰대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하지 말라”는 금령의 십계명이나 율법들이나
조상들의 전통을 준수하면 도저히 더 이상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신자, 모범적 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성인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본연의 예수님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제대로 성덕 훈련이 안되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바로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자기를 모르는 분별력이 부족한
무지의 바리사이들이요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제가 착안한,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 중 계명이라 일컫는 산상설교의 참 행복 선언, 진복팔단입니다.
진복팔단은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활짝 열려 있는 수행입니다.
우리가 성덕 훈련으로 삼을 바, 고백성사 시 성찰 대상으로 삼을 바 진복팔단입니다.
금령의 십계명은 지키면 끝나지만, 진복팔단은 끝이 없는 평생 성덕 훈련을 요구합니다.
진복팔단의 중심에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전혀 변질 되지 않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처럼,
예수님 친히 체험하신 진복팔단의 참 행복이요,
이런 예수님은 성덕 훈련의 대가大家임이 분명합니다.
다시 진복팔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래야 헛된 섬김의 삶이 아니라 참된 섬김의 삶이요, 참되고 반듯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요즘 참으로 강조하는 것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이런 진복팔단은 물론 신망애, 진선미, 침묵, 경청, 겸손, 기쁨, 찬미, 감사 등
좋은 수행덕목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은총의 선물에 이런 평생 성덕의 훈련이 뒤따를 때
비로소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인 본연의 참 나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
어제 수십 년 홀로 열심히 기도하고 일하면서 남매를 훌륭히 키운 한 형제가 방문하여
면담성사를 보고 보속으로 성덕훈련 점수를 계산해 봤는데
무려 105.5점, 100점 만점을 초과함이 너무 경이로워 격찬했습니다.
언젠가 4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 형제에게 아내에 대한 만족도를
100점 만점에 몇점을 주고 싶으냐 물으니 300점을 주고 싶다는 말도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밤 제가 잠자는 동안 받은 세상 한복판에서
묵묵히 겸손히 성인처럼 살아가는 형제의 카톡 글도 반가웠습니다.
“신부님 혼인주례 1호 부부가 진짜 성인의 삶을 살고 계시지요.
어제도 신부님과 헤어지고 오면서 죽과 과일을 갖다주셨어요.
제가 나름 독거노인이잖아요. ㅎㅎㅎ 늘 고마운 분들입니다.”
참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이런 성인 같은
형제들의 일화를 들으면 마음 역시 푸근하고 따뜻해집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착하고 좋은 의인들도, 성인들도 곳곳에 참 많으니 살 만한 세상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또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힘을 주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부록의 내 성덕 점수를 한번 내 보시기 바랍니다.
면담고백성사용
내 성덕聖德 점수
진복팔단을 근거로 성사를 본 60대 초반의 두 자매의 진복팔단을 근거로
성덕 계산 점수를 함께 산출해 봤습니다.
최대한 각 항목 별로 스스로 후하게 주도록 한 후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20점에 8개 항목 합산 후
예수님이 10점을 더 보너스로 준다 하며, 계산해 봤더니
무려 한 자매는 90점, 또 한 자매는 93점이었습니다.
“성녀입니다. 90점을 넘었으니 정말 성녀입니다. 성덕도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앞으로도 성덕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로 성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성덕 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8개 각항목 별 10점 만점에 점수 후하게 주시고
마지막 합산한 후 기본점수 20점, 보너스 점수 10점을 합해 보세요.
8개 항목 | 점수 |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 |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 |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 |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 |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 |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 |
합계 점 |
조상의 전통을 파기하는 하느님의 뜻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그동안 뜸했던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율사 계층의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다시 시작됨을 알린다.
예수님 공생활 초기에 있었던 논쟁에 이어 이는 두 번째 논쟁이다.
첫 번 째 논쟁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레위를 부르신 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일로
바리사이파 율사들이 예수님을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노는 작자’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그에 이어 단식 논쟁이 있었고,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까먹은 일과
역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한 일로
논쟁은 한층 격렬해져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단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제거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른다.(2,13-28; 3,1-6)
그 이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이 예수가 베엘제불에 사로잡혔고,
마귀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모함한 적도 있다.(3,22)
이 대목도 논쟁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첫 번째 논쟁에서와 다른 점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과 함께 예수와 논쟁을 벌일 작정을 하고 몰려온 것이다.
생각건대, 갈릴래아 지방의 바리사이들이 예루살렘에 율사들을 청하여 오게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몰려오자마자 그들의 눈에 띈 것은
제자들 몇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논쟁의 주제가 된 셈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논쟁은 율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정결에 관한 율법 규정은 따로 있다.(레위 12-15장)
조상들의 전통이란 넓은 의미로 볼 때,
율법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은 아니다.
여기서 전통이란 율법을 확대하여 생겨난 慣習이나 因習을 말하는 것으로,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와 사람들의 몸에 배이거나 익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는 일종의 ‘터부(taboo)’로서 그 사회에 줄곧 통용되는 ‘禁忌’이다.
터부는 통상 종교적 神性을 제고 할 목적으로 사람의 생활 태도, 행위, 언어, 사물 등
인간의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 묶어 둔 禁忌를 말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7,1-23에는 유다인들의 조상 전통에 속하는 정결 관습, 코르반 관습,
그리고 금기식품에 관한 습관이 언급되고,
이 세 가지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내려진다.
오늘 복음에는 정결 관습과 ‘코르반’ 관습이 그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율사들은 제자들이 이 정결 관습을 어겼다 하여 예수께 시비를 건 것이다.
‘코르반’이란 복음에 설명되어 있듯이,
“자식이 부모에게 해 드려야 할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11절)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놓고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뜻으로
‘코르반’이라고 말하면, 드리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습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핑계 삼아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숩, 관습, 터부, 금기 등을 지키는 일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중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
사람들이 군집한 시장이나 공공장소에서 돌아와 몸을 씻는 일,
음식을 담기 전에 그릇들을 씻는 일을 놓고
이 일들을 하지 않으면 종교적⋅도덕적으로 不淨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며, 하지 않으면 단지 위생상 불결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茶道가 복잡하지만,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되고,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규칙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린 자식의 양육은 부모가 책임지지만, 나이 든 부모의 봉양은 자식의 의무이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여
‘코르반’ 서원문을 이용하여 부모 봉양을 무시한다면,
이는 조상의 전통을 빙자하여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며, 제4계명을 범한 것이다.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자식은 분명히 부모를 업신여겼거나 부모에게 악담을 일삼았을 것이다.
이런 자식들은 ‘코르반’ 서원문을 외치기에 앞서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출애 21,17),
“누구든지 자기 부모에게 악담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레위 20,9)는
구약의 율법을 되새겨야 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관습이나 규정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애써 받들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