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오랜만의 가족여행.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이유도 있지만,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주말에 약속 잡지마’라고 신신당부라도 해야 함께 할 수가 있을 만큼, 아이들도 제각기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어떤 날은 “아빠랑 영화 보러 갈래?”하고 모처럼 인심을 쓰듯 물으면, 오늘 친구랑 약속있어요, 하지 않던가. 지난 휴가기간에도 대만이나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선택은 의외로 간명했다. 3년째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는 딸의 목소리가 제일 컸던 것이다. 막상 일본을 택하자 은근히 방사능 오염이 걸린다. 결국 남동쪽이 아닌 북서쪽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미치고, 어렵사리 선택한 곳이 아키타 현이다.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지만, 윤대녕의 소설 『대설주의보』에서도 나온 곳이라서 더 정감이 간다. 『대설주의보』를 읽고서 밑줄을 쳐둔 후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낙점한 것도 한 몫을 했다.
‘뷰니플 재팬 (http://www.beautifuljapan.or.kr)’이라는 웹사이트를 찾으니 아키타 현에 대한 갖가지 정보가 가득하다. ‘현 어디를 가도 샘솟는 온천, 미인과 좋은 술 그리고 맛있는 쌀의 산지’라는 문구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키타의 한자어가 ‘秋田’이니 아무래도 쌀이 유명하긴 한가 보다.
설렘 끝에 마침내 아키타 공항에 도착 후, '에어텔' 상품에서 제공하는 호텔에 이르니 ‘시즈쿠이시 프린스 호텔’이라고 아키타 현이 아닌 옆의 이와테 현이다. 버스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곳에 데려다 놓는 이유가 뭘까. 호텔이 위치한 곳은 바로 앞에 스키장이 있지만 스키시즌이 아닌 바에야 외딴 산골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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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쿠이시 프린스 호텔 앞 스키장. 개장 전이라서 이렇듯 눈이 쌓이진 않았지만...]
사위는 눈 덮인 산으로 둘러싸여 민가도 없고, 12월 중순 이후 시즌 중에만 버스가 운행된다고 하니 대중교통도 전무하다. 하루에 한두 차례 오가는 호텔 버스를 이용하기엔 시간을 맞추기도 수월치가 않고. 말이 '에어텔'이지 자유여행은 이미 물 건너 간 셈. 다음 날 일정을 생각해 보니, 어쩔 수 없이 패키지에 편승해서 움직일 도리밖에 없다. 그렇다고 호텔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인간이 지니는 폐쇄공포증,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광기를 극대화시킨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생각날 정도이니 더 말해야 무엇 하랴. 이럴 줄 알았으면 비용이 들더라도 비행 편을 따로 예약하고, 교통이 편한 호텔을 정해서 가보고 싶은 곳을 골라가며 여행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아키타 현과 우리가 머문 이와테 현 일대는 호텔뿐 아니라 전역이 온천수가 용출하는 곳이고, 그 중에서 츠루노유 온천이 일정에 포함되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혼탕에서 온천을 즐길 텐가. 만약에 12월에 갔더라면, 패키지상품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타지 않고 하루 내내 스키를 즐겼을 법하다. 아이들이 스키를 타는 동안에 버스를 이용해서 주변의 온천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듯하고, 또 축제가 열리는 시기라면 온종일 축제와 더불어 보내는 것도 좋으리라.
지나고 보면 좋은 것만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호텔에 딸려있는 노천 온천욕을 매일 밤마다 공짜로 즐기고, 아침과 저녁으로 뷔페 식당에서 갖가지 일본 전통요리, 초밥, 대게 등을 실컷 먹고, 황금빛 논 위로 삼나무나 전나무 숲이 펼쳐지고 멀리 산정은 만년설인양 눈이 쌓여있는 풍경.
첫댓글 사진도 같이 올려주시지......^^
게을러서 이제야 올렸습니다. 사진올리기 메뉴에 따로...
다른 pc에 저장되어 있어서 못 올렸습니다. 조만간 사진도 곁들일게요.
가마쿠라도 만드셨나요? 설국의 공간에 빠질 것만 같은 공간이었는데, 도락이 있는 여행이셨다니 소설 특유의 신비로움에 여행자의 활기가 더해진 느낌입니다.
가마쿠라란 단어를 몰라서 찾아보니, 지명 같은데... '만드셨나요'의 의미가 와 닿지 않네요.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서.
여행자의 활기가 느껴지셨다니...
쏘리. '눈의 여행자'를 염두에 두고 너무 빠져서 님의 글을 읽었나봐요. 가마쿠라는 얼음집이라는 일본말인데 소설 속에서 제의적 상징을 갖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소설 속 분위기는 차분함에 비해 역시 여행 단상을 적으셔서인지 활기를 짐작한 겁니다.
저도 안 읽은 작품이 없는데, 너무 오래돼서 그만. 이제서야 이해가 되네요. 귀국하면 <눈의 여행자>를 꼭 다시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