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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0일 금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3,1-8
복 음 :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 많습니다.
단층 주택이었고 넓은 마당에는 나무와 꽃도 많았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저녁 식사 때면 늘 북적대던 기억,
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가족 모두가 함께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
마당에서 키우던 동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집니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부릅니다.
100년 전 헤밍웨이가 걷던 거리와 현재의 파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53년 이후 이렇다 할 재개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을 다시금 간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와 비슷한 감사의 인사를 받곤 합니다.
20년 넘게 써 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 때문입니다.
제 글을 보다가 어느 순간 보지 않았는데,
아는 지인이 저의 묵상 글을 보내줘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묵상 글을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계속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 평화, 기쁨, 희망, 믿음 등의 소중한 가치가 담긴 마음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십니다.
특히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냥 손만 얹어 주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시지요.
손만 얹어도 충분히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계속된 접촉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말로 위로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1973년 ‘첫 영성체’ 교리를 받으면서 외웠습니다.
어느덧 50년이 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준 곳이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흔들리는 것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그 유혹에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에 깊이 빠져들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유혹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교만’입니다.
뱀의 모습으로 온 사탄은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이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합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아벨’을 들판으로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욕망’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욕망’이라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바세바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야가 바세바의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서 넘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욕망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네 번째 유혹은 ‘욕심’입니다.
아합왕은 자신의 포도원이 많았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 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졌습니다.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웠지만,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면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에 따라서 내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혹의 바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유혹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용서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욕망의 문을 활짝 열고 나눔과 봉사의 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병자들, 굶주린 이들에게 그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시대의 ‘에파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망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에파타!(열려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는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 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 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
열려라-에파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즉 그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몸을 설계하시고 육신을 지으신 분께서 몸소 그에게 다가가시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닫힌 귀를 아무런 고통 없이 열어 주셨다.
한마디 말도 내뱉을 수 없이 굳게 닫혀있던 입이 말을 하게 해주신 분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 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 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 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나,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비록 한 가지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하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번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참된 영적 삶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대구 사수동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보 축일이라 대축일로 지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네딕도 오빠와의 오누이 관계가 신비롭습니다.
산 같은 정주의 대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 오빠와의 관계도 참 흥미롭습니다.
이들의 주님 안에서 영적 우정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는지
서로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생몰生沒연대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두 분이 쌍둥이였고 두 분 다 480년 같은 해에 태어나,
547년 같은 해에 선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녀 사후 얼마 지난 그해에 돌아가셨던 듯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두 분의 영적우정(33장)과 성녀의 죽음(34장)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인의 몬테카시노 수도원 가까이 수녀원에서 살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수녀는 일 년에 한 번,
오라버니 베네딕도를 만나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 했던 듯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성녀는 세상을 떠나던 해, 성인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으나,
총총히 떠나려는 매몰찬 오라버니가 원망스러워 성녀는 간절히 기도하셨고
갑자기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로 인해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에 못 돌아가고
밤새 대화를 나눴다는 전설적인 내용이 베네딕도 전기 33장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남매가 만난 삼 일 후 성녀는 세상을 떠났고,
이어지는 묘사가 아름다워 34장 대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삼 일 후에 성인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에 모셔 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
얼마나 열린 수도생활에 주님 안에서 아름답고 깊은 영적우정을 나눈 오누이 관계였는지요!
지금은 잘 부르지 않지만 33장과 34장을 바탕 한 복음 전 라틴어 부속가도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시간 되면 번역된 우리말 부속가를 한번 불러 보려 합니다.
이런 성녀 축일을 배려한 오늘 말씀의 배치도 참 적절합니다.
저는 오늘 성녀 축일과 말씀들을 통해 참된 영적 삶의 세 부분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첫째, 경청과 환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귀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은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의 우선적인 바람이 바로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베타니아 이들의 집에 들리셨을 때,
주님의 마음을 알아챈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합니다.
마르타의 항의를 일축하시며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마르타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베네딕도 규칙 첫 마디 역시,
“들어라, 내 아들아, 스승의 가르침을. 그리고 그 가르침에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라.”
'들어라'로 시작되는 규칙서 첫 말마디입니다.
수도원 식탁에도 큰 산봉우리 셋을 배경한 그림의 천에 씌어있는 글자가 “들어라.”입니다.
산 같은 침묵과 경청의 정주 수도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묵묵히 침묵 중에 바라보며 듣는 정주의 불암산은 말 그대로 정주의 스승입니다.
새삼 참된 영적 삶에 경청의 환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관상과 활동입니다.
둘은 참된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둘은 우열 관계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둘의 균형과 조화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인 것은 관상의 경청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베네딕도회의 모토가 둘 간의 우선순위와 균형을 말해 줍니다.
저는 일컬어 목운동의 영성이라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 보고 땅 보고, 하느님보고 사람 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이 우선순위를 절대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환대가 우선이고 음식의 환대는 다음입니다.
이래서 미사 구조도 말씀 전례에 이어 성찬 전례입니다.
바로 이점을 마르타는 몰랐습니다. 마르타 역시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요!
음식 접대 사랑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는 마리아 같은 관상가도, 마르타 같은 활동가도 필수입니다.
마리아만 있어도 안 되고 마르타만 있어도 안 됩니다.
두 부류의 형제자매들의 균형과 조화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둘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밖으로는 활동가 마르타,
안으로는 관상가 마리아의 두 측면을 지니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죽비 같은 말씀에 마르타는
크게 회개하여 깨닫고 배우며 우선순위를 바로 잡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는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셋째, 영적 우정과 회개입니다.
영적 우정에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입니다.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깨달음과 더불어, 배움과 더불어
마음은 순수해지고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질 것이니,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영적 우정도,
보이는 도반 형제들과의 영적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다음 말씀은 광야 인생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덕목들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파트너로, 협력자로 삼아
당신과의 영적 우정을 깊이 하겠다는 주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참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사이든지 형제간의 사이든지, 참된 영적 우정을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할 필수적 덕목이,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경책 말씀의 가르침에
마리아는 경청의 중요성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을 것이며,
마르타도 활동을 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경청의 관상에
각 별이 유의해야 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오늘 앞서 소개한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영적 우정은 얼마나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웠는지요!
마리아와 마르타도,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도
주님 안에서 수직적 차원에서 주님과의 영적 우정을 깊이 하며,
더불어 상호 간 수평적 차원의 우정도 깊이 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주님 안에서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간의 우정도 함께 가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영적 삶을 위한 세 요소를 공부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 우정과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영적 삶의 중심에 이 거룩한 미사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이런 참된 영적 삶을 훈련, 습관화하여
우리 모두 참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어제 써놓은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외딴곳”이란 자작 깨달음의 잠언성 글을 나눕니다.
-“답은
내 안에 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적 초월의 자리 외딴곳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적 깊이와 높이의
본질 추구의
내적 초월의 삶을 살자
주님 만나러
외딴곳 찾아 나설 것 없다
언제 어디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초월적 거점의
내적공간이 형성되고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이 된다
참 겸손
은총의 열매다”-아멘.
에파타, 제발 열려라 열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이방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은 참으로 모범적이었다.
반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 구원의 현주소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스스로가 이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애를 끓는 심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과 메시아는 그들을 넘고 비켜서
이방인과 온 세상을 향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 서두에 띠로를 떠나신 예수님은 북쪽으로 약 36km 더 떨어진
항구도시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를 거쳐 다시 갈릴래에 호수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어디 예수님의 이방인 지역 선교여행이 이렇게 단 한마디로 요약될 그런 사안이겠는가?
예수께서 띠로에서 시돈으로 가셨고, 시돈에서 데카폴리스 지방으로 가시자면
골란과 바타네아 지방을 거쳐 남쪽으로 가셨을 것이고,
데카폴리스에서 다시 갈릴래아 호수까지 오셨다면
이 長程은 아무리 짧아도 150km의 먼 길이다.
예수께서 대장정의 이방인 선교여행 끝에 도달한 곳은 다시 갈릴래아 호수였다.
추측컨대 이곳은 호수 동편 골란 지방과 데카폴리스 지방의 접경지역이었을 것이고,
일찍이 ‘부대’라는 마귀를 쫓아내고 돼지들이 떼 죽음 당하게 했던
게라사(게르게사) 마을(5,1-20) 근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넓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두말할 필요 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 효과 역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그리 탐탁치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께서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같은 믿음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보실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귀먹은 반 벙어리’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벙어리(dumbness)란 음성언어를 소리 낼 수 없는 사람인데,
음성언어를 소리 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전에는 말을 할 수 있었으나 어떤 원인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聾啞인데,
농아는 귀가 먹어 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와 치유를 청하는 귀먹은 반벙어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듣는다고 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이방인 모든 사람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외치신다.
”에파타!“ ‘열려라’는 뜻이다.
에파타! 열려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다.
‘에파타’는 비단 오늘 복음에만 행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온 세상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서 ‘지금 여기에’만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과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통용될 말씀이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들음과 말함’을 찾았다고는 하나,
‘들음과 말함’이 예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을 때는 언제고 緘口令이 내린다.
들어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엄한 함구령 다음에는 또 다른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37절)라는 사람들의 경탄은 지극히 당연하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는(이사 35,5-6) 현실은 메시아 시대의 표징들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