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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겨울 판화
박 윤 배
헛배가 자꾸 불러 온다
비닐포장 처마위에 눈이 쌓이고
얼음꽃 차디찬 이마 뉘인 고등어들
비린내 상자에 잠겨서 지느러미를 꺾고 있다
등줄기 시퍼런 파도가
살갗에 달라 붙는 소금알 몇 개를 닦아내고 있다
눈 치켜뜨고 살아가라고
사람들 얼마나 싱싱한가를 물어오고
가게주인은 몇홉 소주에 취해
코골며 망을 보는 한 폭 그림 속
어머니 심부름으로 달려온 아이 하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서성이는 겨울 저물 무렵
살소름이 점점 섬으로 돋아나고 있다
바다 앞에 멈춰선 벼랑처럼
내가 발라낸 잉크는 미끄러지지 않고
머뭇거리는 추위 몇이 얼핏 보인다
앙상한 활굽이 등뼈로 누워
칼도마위에 얹혀질 순간을
다물지 못한 입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스물스물 죽음도 도려낼 칼날을
귓밥 얼얼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는
분명 새겨 넣고 싶은 것 있어
굳은 피 혈관 속으로 세모칼을 밀어넣는다
흰 등뼈로 누워서만 살 수만은 없음을,
그리하여 완성되는 겨울 판화여
찢어진 부레로 눈발은 가볍게 내리고
싱싱한 뼈도 일으켜 세워야지
허무와 슬픔 뭉쳐진 대가리는
어느 집 싱거운 개가 물어갈지라도
가물가물 흐려진 풍경속에 찍혀질
몸뚱어리 너는 늘 푸른 원목이여
나이테 눈물 중심부에 과거도 그려 넣어야지
사람들 고픈 배로 바라보던 고등어
내장 꺼내던진 서러웠던 날도 있어
온기 나누고 싶어지리라
죽어 있던 시십대의 숯불심장 위로도
세상의 죽어있는 것들에게도
소금 같은 눈발 한줌 뿌려지고
불기둥 세우고 달려나갈
펄떡펄떡한 지느러미를 아프게 새겨 넣는다
** '89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겨울사랑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내소사
김문주
세상에 수런거리는 것들은
이곳에 와서 소리를 낮추는구나, 변산
변방으로 밀려가다 잠적하는 지도들이
일몰의 광경 앞에 정처없는 때
눈내린 오전의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어느새
동행이 되는 길의 지혜
작은 꺽임들로 인해 그윽해지고 틀어앉아
더 깊어진 일은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길이 된다
나무들은 때때로 가지들어 눈뭉치를 털어놓는다
숲의 한쪽 끝에 가지런히 모여앉은 장광 같은 부도탑들
부드러운 육체들이 햇빛의 소란함을 안치고 있다.
봉래루 설선당 해우소 산사의 마당에는
천년의 할아버지 당산과 요사까지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
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
숨길이 되고 집채 사이를 오가다, 아
바람의 꽃밭, 열림과 닫힘의 자리에
바래고 문드러진 수척한 얼굴들
슬픔도 연민도 모두 비워낸 소슬무늬꽃문
난만한 열망들이 마른꽃으로 넘는 저, 장엄한 경계
대웅보전 앞마당에 발자국들 질척거리고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이여
내소사 환한 고요 속에 오래도록 읽는다
서해 바람의 이 메마른 문장을
겨울동백
박이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누군가의 칼날에 죽어갈지 모르는 비운의 武士들이 오히려
그 죽음의 향연을 즐겼단다. 그래서 투구 속에 귀한 향을 넣어 제 목이 떨어지는 순
간 그 진동하는 향기로 살아남은 적에게 더 큰 승리의 도취감을 선사했단다. 그렇다면!
저 푸르고 질긴 잎으로 무장한 동백 한 그루. 그도 이미 그 붉은 투구 속에 향기로운
죽음을 준비했던 걸까? 그래서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 앞에 저렇듯 모가지 댕겅
떨구며 낭자한 향기 콸콸 쏟아내는 걸까? 그리하여 승승장구하여 달려 온봄에게 더 큰
희열 만끽하게 하도록!
그해 겨울의 눈
이형기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맥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에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겨울에게
마경덕
내가 앉았던 자리가 그대의 지친 등이었음을 이제 고백하리. 그대는 한 마리 우직한 소. 나는 무거운 짐이었네. 그대가 가진 네 개의 위장을 알지 못하고 그대를 잘 안다고 했네. 되새김 없이 저절로 움이 트고 꽃 지는 줄 알았네. 그대가 내뿜는 더운 김이 한 폭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인 줄 알았네. 그저 책갈피에 끼워 둔 한 장의 묵은 추억으로 여겼네. 늦은 볕에 앉아 찬찬히 길마에 해진 목덜미를 들여다보니 내 많은 날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알겠네. 거친 숨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성자를 떠올리네. 퀭한 눈 속의 맑은 눈빛을 생각하네. 별이 식어 그대의 병이 깊네
겨울의 유서遺書
한우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겨울 선운사에서
이상국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뾰로통하게 토라진 동백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절 아래 레지도 없는 찻집
담벼락에서 오줌을 누는데
분홍색 브래지어 하나 울타리에 걸려 있다
저 젖가슴은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는지
중 하나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고해(苦海)만한 절마당을 건너가는 저녁
나도 굵은 체크무늬 목도리를 하고
남이 다 살고 간 세상을 건너가네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이경임
비어 있는 숲들은 장례 행렬 같다
어떤 숲은 유아세례식 같기도 하지만
이 숲은 텅 비어 있으면서
숨이 막힐 듯이 채워져 있다
어둠이 숲을 채우면 이 숲은 무겁다
어둠이 숲을 채우면 이 숲은 무겁지 않다
숲의 형식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 숲에는 요염한 여인이 누워 있다
이 숲에는 성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이 숲은 차갑지 않다
빛이 비치면 이 숲은 평화롭다
빛이 비치면 이 숲은 평화롭지 않다
이 숲에는 짐승의 냄새와 신의 체취가 떠돈다
겨울의 유목
황혜경
춥지, 축적과 이동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탓이나니 동파는 예고된 이야기라 하사 너는 너로 인해 차가워지고 뜨거워질 것이니 어둠을 끄고 우두커니 않아 있을 때 선명하게 보이게 될 천연색 슬픔의 선인장이로다 너는 너로 인해 따가워하다 부정해야 할 것이나니 파열도 당연한 이야기라 하사 입김이 뜨거운 천사들의 뒷바라지는 기대하지 말지어다 뒤의 반대인 너는 앞서 달려야 하는 윤기나는 운명의 흑마라 하사 본디 가혹할지어다
겨울 아침
박형준
뜰에 부려놓은 톱밥 속에
어미 개가 강아지를 낳았다
햇살이 터오자 어미 개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새끼들을
혀로 세웠다
톱밥 속에 어미 개가
강아지를 낳은 겨울 아침
이쪽으로 쓰러지려 하면
저쪽으로 핥는 어미 개의
등허리에 서리가 반짝였다
아, 서리에서 김이 나고 있다
겨울 삽화揷畵 2
정창준
스승은 오랫동안 병중病中이었다
사나운 여름이 지나가자 병석을 털고 일어나
행동하지 않는 고민을 종용慫慂했고
말끝에선 백묵이 뚝뚝 부러져 나뒹굴었다
몸 밖에선 언제나 불길한 소식만이 들려왔다
딱딱해진 몸을 고장난 라디오 배터리처럼
의자에 묶어두고, 수신불능의, 우리는
몇 줄의 구인란에 밑줄을 그어댔다
늙은 교수의 낮고 우울한 음장音長만이
생활고처럼 오래 귓속을 맴돌았으며
창틈을 후비고 들어온 바람에
잔털들이 툭툭 부러져
옷 안에서 싸르륵 쓸려나곤 했다
뿌연 미세기창이 보여주는 질 나쁜 화면 속으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마스카라를 칠하는 여자들과
하나같이 길고 두터운 외투를 걸친
늙고 지친 얼굴의 사내들이
느릿느릿 롱테이크로 잡히고 있었다
햇살은 비췄으나 따뜻하지는 않았으며, 우리는
기성복 같은 그림자를 낮 내내 끌고 다녔다
물가지수와 스커트는 이미 상종가를 기록했고
밤이면 어둡고 후미진 골목 끝에서
겨울은 어린 여자들의 몸을 빌어
고아를 낳고, 혹독한 삶을 유전시켰다
겨울 아이오와
마종기
1
네가 돌아간 후 수십 년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이, 어느새
끝없이 이어진 콩밭이 된 것 말고는
키 큰 옥수수 대신 조신한 콩들이 모여
여름내 하늘을 지고 구름을 만드는 것 말고는,
내가 나이 들고 네가 소식이 없는 것 말고는,
내 걸음이 더 이상 바쁘진 않은 것 말고는,
그래 사실은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허름한 사무실은 아직도 허름하게 늙어 있고
모두들 낯선 정거장처럼 이곳을 지나갔는데
우리가 버린 들판에 잘못 도착한 회오리 눈보라,
눈송이 사이로 시야가 닫힐 때쯤에야
아이오와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알고 있겠지.
겨울이 와서야 꽃 피고 눈뜨는 것은 알고 있겠지.
호흡이 짧아지고 어지름증 자주 오는 추운 계절,
사랑한다는 말은 어제쯤 한번 듣게 해줄래?
만개한 아이오와의 추위 속에서는 만지고 싶어진다.
불안하게 유배 떠나온 발걸음을 다 덮어버리던 눈,
얼어버린 모든 겨울의 말을 매해 귀 시리게 들었지.
죽은 후에라도 이곳에 와서 몇해 정도는 지내야겠다.
발자국 없는 정류장에서 이번에는 소리쳐 부르겠다.
당신이 돌아오고, 눈이 덮히고, 내가 당신을 안는다.
얇게 퍼지는 당신의 입김이 눈발 속에서 몸이 된다.
2
지구가 아직 둥굴어지기 전에
땅끝까지 눈이 내렸다, 그것을
아이오와에 와서야 확인했다.
세상의 냉대 속에서 살아온
눈 덮인 숲에 들어와서야
나무가 체온을 가진 모습을 본다.
나무마다 둥치 주위에 눈 녹는 자리,
온기의 호흡이 오래된 얼음 녹여놓았다.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익히는 체온,
나무가 따뜻하다는 것을 아직껏 몰랐다니!
내가 살아온 길이 허술했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언 손으로 나무의 살을 포옹한다.
아무도 억울한 일 당하지 않기를,
아무도 눈물짓는 일이 없기를,
지구가 아직 다 익기 전,
지구가 아직 둥굴어지기 전,
사랑이 우선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아이오와의 겨울 숲, 저기 겨울 숲...
겨울 검단산
송문헌
유길준 묘에서 경사진 길을 따라 산행 들머리를 잡으면 산의 높이에 따라 펼쳐지는 산아래 모습. 비행장 활주로처럼 검게 펼쳐진 미사리 강변도로 덕소의 아파트촌 휘돌며 내달리는 강물. 정상을 향해 오를수록 평면으로 펼쳐지는 하남 시가지와 멀리 강남벌의 아슴한 회색 도시가 낯설다. 팔당대교 아래로 추락하는 하얀 포말들의 거친 물줄기가 당차고 통쾌하구나. 산꼭대기를 향해 치닫는 마음은 헐떡이는 발걸음 재촉하고 사방팔방으로 거칠 것 없는 정상에 서면 빼어난 여인네 몸뚱어리인 양 예봉산이 비스듬히 누워 반긴다 아련한 운길산이 운무에 삼삼한데 둘러선 양평산 운길산 멀리 도봉산 북한산이 든든하게 다가선다. 겨울의 검단산 거침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차다
갈퀴여, 꼬리여, 채찍이여 서둘러 달리게 하사 회복하면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니라 숫자들을 손에 쥐고 매서운 날짜들을 주무르다 보면 스케이트를 타고 빙그르르 소년의 몸매를 가진 여자가 관련된 것들을 어루만져 이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원을 그리게 될 날이 오리니 쪼그려 앉아 붉은 촛농처럼 오줌을 누게 될 그때에 비로소 구멍 하나가 열리게 될 것이리니 그리하여 빙하를 뚫고 태초가 되고 곧 어의 숨통이 되게 하사 여기 또다시 눈의 마을을 고립이라 불러보면 풀밭이 보이는 쪽으로 와디를 찾아 워워, 겨울이 몹시 세차게 몰아가고 있나니 거처를 버리는 꽃의 입술이 바람을 향해 열리게 될 날이 가까웠느니 영원히 떠도는 쪽이라 했나니
겨울에 대한 질문
이장욱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내가 당신을 함부로
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
얼음이 되거나
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
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
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
겨울에는 겨울만이 가득한가?
밤에는 가득한 밤이?
우리는 영영 글자를 모르는 개가 되는 거야
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는 거야
어느 새벽의 지하도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당신은 지금 어디서
혼자 겨울인가?
허공을 향해 함부로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어느덧 눈으로 내리다가 문득
소식이 끊기고
겨울 사랑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겨울 월정사
이영재
월정사 숲에 들어 곧게 선 나무에게
나무야 사랑해
귀엣말 고백하면
온 산이 붉게 물들어 제 몸을 불질렀지
가을비 지나가고 얼음 속 월정사
생애는 단풍아닌
상처로 여물어
빈 절간 흰 산을 쓰고 곤히 잠든 동자승
사행천 계곡에 섶다리 위태롭다
펑펑펑 함박눈이 함박나무에 쌓이고
수북이 고봉밥 쌓던 어머니가 그립다
첫댓글 좋은 겨울 詩를 읽으며 새해 첫날을 보냅니다.
누가 겨울에 겨울을 그리워하겠는지요
누가 봄에 봄을 그리워할까요
여름에 여름을 가을에 가을을 그리워하는 이 있을까요
겨울이 있어 봄이 그립고 여름이 그리운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새해 꽃처럼 화사하고 동백처럼 푸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