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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9.9.29.) 말씀 /마태복음 7:12
행복으로 가는 길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이 왜 세상을 만드셨나요? 왜 인간을 창조하셨나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행복하시고, 또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 합니다. “사명, 나는 행복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삽니다,” “와, 대단하다 믿음이 참 좋습니다”. 보기에는 참 멋지고 위대해 보이지만 하나님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잘 못된 대답입니다. 무지 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소감을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해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은 낙원, 행복의 동산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을 위해서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과실나무, 생명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금은 보석이 번쩍이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행복 입니다. 에덴동산을 사람의 행복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뭐하러 인간을 만드셨겠습니까?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1,000년을 산들 영생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행복이라는 것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행복방정식’ 책을 내면서 행복은 풀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행복의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시고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you are to free to eat from any tree in the garden. but you must not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redge of good and eveal. 인간에게 행복의 동산을 주시고 자유를 주심으로 행복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임 재범 집사님 도둔도로 들어가서 “내가 왜 이런 오지 섬에 들어와 갇혀서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나가는데 왜 나는 이다지도 운이 없는가?”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런 별천지 조용한 바다 정원으로 보내주셔서 독서도 하고 사색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주님과 더 가까이 할 수 있게 하시는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나왔지만 행복해지는 삶을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줄 믿습니다. 지난 번 주일 말씀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소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어. 나는 억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구나 할 수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 안에 죽는 내는 행복하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잠언서 22: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 우리가 왜 겸손해야 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 합니까? 그래야 행복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억만 장지인들,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자 인들, 이름을 날리는 인기인이 된들 하나님을 모르고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행복의 길은 하나님만이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줍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를 구원해줍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줍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이 세상 살아가면서 누가 우리를 죄와 사탄과 사망에서 지켜줍니까? 신명기 33:29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여러분, 행복의 길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요한복 14: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만 해도 우리는 이미 행복의 길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아멘! 그러나 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만이 길 위에 있기만 하면 됩니까? 길은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이라고 해고 무조건 믿음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순종의 길이 있고, 섬기는 길이 있고, 베푸는 길이 있고, 사랑하는 길이 있고, 부모 곤경, 이웃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다양의 길의 여정을 걸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행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무슨 소망으로 그 길을 힘들여 갈 필요가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같아도 행복을 주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도 행복의 길입니다. 남을 대접하면 내가 대접을 받고 남을 행복하게 하면 내가 행복해진다는 최고의 율법입니다. 이 것은 깨닫고 실천하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아주 이기적인 집단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이 행복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요즘 검찰 개혁을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법대로 하는 것 같고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한 행태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남을 헐뜯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검찰이 조국 교수 아들까지 소환해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고백이 거기 가서보니 자신이 이제까지 나쁜 몸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아이를 그렇게 검찰이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정 경심 교수님이 이를 보면서 피눈물 난다고 하였습니다. 조국 교수는 남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이번에서 검사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까? 억울한 사연들 권력의 비호아래 파묻혀지는 진실, 절망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을 개혁하려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인을 위한 길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의 길이고 행복의 길입니다. 어떤 길이던지 자기만을 위한 길은 주님의 길이 아닙니다. 그 길에서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비판 정죄가 아니라 베풀고 나누고 살리는데서 따라 오는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 임재범 집사님과 천사대교를 지나 자은도에 들어가서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점심을 먹고 섬을 트래킹 하였습니다. 아주 오붓하고 행복한 여행 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왜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가 이유를 알았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또 다른 사람을 여유를 가지고 사랑하며 행복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점심은 김밥과 라면이었지만 바닷가에 먹는 그 맛이 그만입니다. 행복이란 결코 비싸게 돈을 투자해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돌아오면서 압해도 헤밍웨이 카페에 들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바닷가에 운치고 있고 멋있는 곳 이었습니다. 음식이 좀 그랬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벽에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태양은 저녁이 되면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태양은 결코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태양은 밝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따스함도 준다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희망이 곧 태양이다(훼밍웨이)ᆞ
글이 좋아서 캡쳐했습니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희망이 곧 태양이다. 그 태양이 그 희망이 곧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혼돈하고 비구름 폭풍이 몰아쳐도 태양은 언제나 다시 떠오릅니다. 늘 변함없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세상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따스한 태양처럼 우리를 감싸 주십니다. 허물을 덮어주시고 희망을 주고 살려주십니다. 이 바로 그 태양처럼 주님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자고 눕고 일어나는 동안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함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로 절망이란 주님이 없는 것이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동안은 언제나 희망임을 믿습니다.
헤밍 웨이의 글을 읽다보니 ‘헤밍웨이의 풍선’이란 제목의 또 다른 글이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심리학 강의시간 이었습니다. 교수는 풍선 속에 각자의 이름을 써넣고 바람을 빵빵하게 채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풍선들을 한 군데에 모아 천정으로 날려 보냅니다. 한참이 지났습니다. 교수는 자기 이름이 들어있는 풍선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은 딱 5분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풍선을 찾으려고 서로 부딪히고 밀치고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5분이 흘렀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풍선을 단 한사람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무 풍선이나 잡아 거기 넣어둔 이름을 보고 그 주인을 찾아 주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기 이름이 들어있는 풍선을 찾았습니다. 교수는 말합니다. " 지금 시험한 자기 풍선 찾기는 우리네 삶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행복을 찾아다니지만 행복이 어디 있는지 장님처럼 헤매고 있습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함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풍선을 찾아주듯이 그들에게 행복을 찾아서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반대로 여러분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헤밍웨이 법칙이라고 합니다. 헤밍웨이는 행복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행복을 가꾸는 것은, 손닿는 곳에서 꽃을 따다 꽃다발을 만드는 것이다.'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손닿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옆에 친구입니다. 행복은 바로 옆에 있는데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라들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헤밍웨이 이야기를 하면 헤밍웨이는 왜 자살을 했을까?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킬리만자로 정상 부근에는 얼어 죽은 표범 사체가 있다. 표범이 무엇을 찾아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헤밍웨이는 키는 183cm에 미남 이었습니다. 사냥과 낚시를 좋아하는 그는 전쟁 종군기자로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고,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매사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도 항상 고독과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외형적인 것이 아무리 충만해도 내부는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지개를 찾아 떠나지만 결국에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무지개는 집 이었 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보니 부인도 자녀들도 없습니다. 오직 텅 빈 적막 이었습니다. 훼밍웨이 주는 영적 교훈을 그렇습니다.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복을 찾으면 그런 행복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패할 확률이 많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행복하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게 되면 행복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풍선은 바로 주님의 남을 대접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따른다는 교훈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하루 한나절이었지만 임 재범 집사님과 길을 걸으면서 주님을 묵상하고, 헤밍웨이 카페에 들려 답은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행복의 길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 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점점 이기적이 되고 타인을 비판하고 죽이는 일을 계속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사는 길인 줄 착각 합니다. 기독교인들조차 그런 길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고전적인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행복의 길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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