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윤관장군의 대해서...
윤관은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서부소감을 지낸 집형 의 아들이다.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동현 시호는 문숙이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숙종때 어사 대부, 이부 상서 등을 거쳐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고 1104년(숙종 9년)에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 병마 도통사가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그들의 강한 기병부대에 패하고 강화를 맺고 회군했다.그후 전투력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위해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창설,대원수가 되어 1107년 (예종2년)정병17만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설치,영토를 확장하였고 1108년 여진이 국경을 다시 쳐들어오자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국경를 지킴으로써 영토를 개척하는 대업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여진이 조공 등을 조건으로 계속 북방 변경 지방을 요구하자 예종은 윤관이 쌓은 9성을 여진족에게 내어주고 강화를 맺었으며, 이후 그를 시기하던 신하들의 모함으로 벼슬과 공신 칭호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후에 윤관은 문무를 겸한 공신으로 관직을 다시 받았으나 사양하고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언인,언순,언식,언이,언민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윤언순은 예종때 남원부사를 지냈고 윤언식은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윤언이는 인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때 정당문학에 올랐고 나머지 두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여진정벌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이 되어 처음으로 여진정벌의 임무를 띤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으로 이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은 더욱 성장하여 그 부족장 영가에 이어 1103년(숙종 8)에 우야소가 그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왕은 무력으로 여진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게 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윤관은 1104년(숙종 9) 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별무반이라고 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과 17만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 둔 허정· 나불 등을 돌려 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명을 보내 왔는데, 이때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 잡았다.
5만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은 김한충, 좌군은 문관, 우군은 김덕진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은 선병별감 양유송 등이 2,600명으로 도린포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은 척준경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3.별무반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조직한 군대를 말한다. 여진은 거란의 지배를 받았지만 동여진 완옌부의 강성과 비례하여 고려에 대한 침략행위가 더욱 심해졌다. 1104년(숙종 9) 여진이 함경도 정평의 장성 부근에 출몰함을 계기로 정면 충돌하여, 2차례에 걸쳐 판동북면행영병마사 임간· 추밀원사 윤관을 보내어 막게 하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윤관의 건의로 정규군 외에 별무반을 조직하였다. 양반 ·승려 ·이서·상인·노예 등을 동원하여, 신보:(보병) ·신기:(기병) ·항마군:(승려)과 연호군:(노예)으로 나눠 조직하였다. 신기군은 문무산관 으로부터 서리·상인 ·복례 및 주부군현에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는 이에 소속되었다. 신보군은 과거를 보지 않는 20세 이상의 장병들로 이루어졌다. 항마군은 사원에서 노역이나 사원전 경작에 종사하는 수원승려를 징발한 것이 특징이다.
보병을 신보·도탕·경궁·정노·발화 등의 특기부대로 편성하여 정규군과 함께 훈련을 받게 하고, 병기 ·병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1107년(예종 2) 10월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여 출병한 고려 17만 대군은, 함흥평야의 여진족 소굴을 급습하였다. 적 5천을 죽이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350개 부락을 수복하고 함주:(함흥) 등에 동북9성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숭녕 ·통태 ·진양의 9성을 설치하였다. 그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1년 반만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