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가지 종류의 방언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고 이어서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성령이 나를 압도하고 소리를 외치도록 몰아붙이는 정도의 강한 기름부음이 있을 때만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런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방언의 다양성에 관한 가르침도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자연적 마음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나 다른 어떤 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당신을 세워주어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깨닫도록 하여 줄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은 자연인의 마음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 다른 초자연적인 방언의 흐름
그러면 이렇게 별로 이해가 되어 있지 않은 여덟 번째 하나님의 사역을 탐구해 봅시다. '각종(diversities)'이란 말은 단순히 '다르다(different)'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종 방언'과 '방언의 다양성'이란 용어는 다른 방언의 초자연적인 흐름이나 나타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세계에 방언에 대한 이런 혼란이 있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방언의 모든 나타남과 역사에 대하여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 간에 큰 혼란이 생겼으며,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기는 커녕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가 제공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게 하였습니다.
성령이 원하심에 따라 다양한 방언이 있지만 말씀에 비추어 보면 네 개의 기본적인 나타남이 있습니다.
1. 개인적인 세움을 위한(for personal edification) 방언 (고전 14:4)
이것은 초자연적인 언어로써 성령님이 우리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면 수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방언은 성령 세례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2. 통역하기 위한(for interpretation) 방언 (고전 14:5)
이 방언의 나타남은 보통 공적인 예배 때에 나타나게 되며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 통역을 동반합니다.
3. 중보 기도하는 깊은 신음의(deep intercessional groaning) 방언 (롬 8:26)
이 방언은 신자들에게 능력을 입혀서 신자들이 자신들이나 자기 가족들, 자기 교회, 자기가 사는 도시, 자기 나라 등을 위해 갈라진 틈에 서서 중보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전혀 모르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도록 그들을 부르시기도 합니다.
4. 불신자에 대한 표적으로서의(a sign to the unbeliever) 방언 (고전 14:22)
이것은 오순절 날 일어난 현상입니다(행 2:4-11). 이것은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자신이 전혀 지식이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거나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으로 모든 언어 장벽과 지성을 초월하여 일어납니다.
방언 통역에 적용되는 규칙과 개인의 세움을 위한 방언에 적용되는 규칙은 밤과 낮이 다른 것처럼 다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중보 기도하는 깊은 신음의 방언에 적용되는 규칙도 위의 어떤 두 방언의 나타남과도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불신자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다양함도 다른 세 가지 방언과 매우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방언의 나타남 중에서 개인적인 세움을 위한 방언과 중보 기도하는 깊은 신음의 방언 이 두 가지는 개인의 기도 생활에 사용하도록 디자인 된 것입니다. 다른 두 가지 방언, 즉 통역을 위한 방언과 불신자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보통 공적인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각종 방언의 나타남을 이해하고 자신을 드리기 시작하면 성도의 삶은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 개인적인 세움을 위한 방언
가장 독특하고 흔한 각종 방언의 나타남은 아마도 개인적인 세움을 위한 방언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받게 되는 기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비밀과 신비를 이전시켜 주십니다.
내가 앞에서 가정하여 예를 들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각종 방언을 한 아름 가지러 세 번째로 높은 곳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역을 그리스도의 몸에 던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개인적인 세움을 위한 방언에 대한 잠재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자든지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나서서 이 선물을 받기만 하면 그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세움을 위한 방언은 어떤 설교자나 교사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위해 행하시도록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이 기본적인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하나님의 특성인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 옳고 그름과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같은 것을 당신의 영에 심어 줌으로써 당신을 세워줍니다.
교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말해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 힘은 거듭난 사람의 영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영에 그 힘을 심어주도록 하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방언기도는 당신이 근원이 아니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이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나 초자연적인 언어의 근원은 똑같이 성령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은사의 가용성(availability of the gift)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열거된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 중에 처음 일곱 개의 하나님의 역사와 네 가지 방언 중에 세 가지는 모두 성령님의 의지에 따라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바로 자신의 충전을 위한 방언은 당신이 성령 충만을 받은 다음 즉시 원하면 언제든지 하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정말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영들을 분별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하여 그분의 뜻대로 나와 별도로 나를 통하여 흘러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간단한 은사만은 나를 세워주고 나를 충전시키기 위하여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단순한 은사를 통해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나 자신의 세움을 위한 관리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방언이라 불리는 이 단순한 은사의 사용권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를 통하여 기도하시도록 허락함으로써 우리 마음대로 얼마나 많이 혹은 얼마나 적게 우리 자신이 세움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으면 우리는 단지 순간적으로 우리의 믿음의 손을 뻗치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님은 즉시 응답하셔서 우리의 영 속 깊은 곳에서 초자연적인 언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실에 머물러 있는 동안 몇 시간씩 계속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열 두 시간을 기도할 수 있다 해도 이런 기도는 우리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격을 점점 갖추도록 영원한 유익을 주는 일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방언기도는 우리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침을 따라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든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일만 합니다. 성령과 말씀은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요일 5:7).
방언기도는 결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언기도는 말씀에 이미 담겨 있는 계시의 지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우리의 영을 세워줍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은 항상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너무 많이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개인의 세움을 위한 방언은 우리가 성령님께 좀 더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림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더 많은 능력 안에 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높여주는 일만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통하여 이 첫 번째 방언을 받은 후부터 우리는 다른 일곱 가지 하나님의 역사들 또는 그 중의 몇 개에 합당한 자격을 구비하기 위하여 울라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충전을 위하여 방언 기도를 할 때 성령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풀어놓으십니다. 이 계획을 위해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기에 가장 합당한 분은 물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우리 삶의 필요를 위해 우리의 영을 통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시므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 세움의 과정을 통해서 영적 권세가 자라고 우리의 믿음이 세움을 받습니다. 너무나 많은 권세가 풀려 놓아짐으로써 우리가 마귀에게 대항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묶을 때 우리의 믿음의 명령이 적의 왕국을 문자 그대로 뒤흔드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마치 연체된 신용카드 빚 앞에 떨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면 우리는 마귀의 왕국을 흔들어 넘어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 엘리야도 배웠어야 했던 교훈이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무찌른 다음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셔서 믿음을 회복시키시기 전까지 악한 여왕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푸념을 하고 있었습니다(왕상 18, 19장).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평안의 처소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시험이나 시련을 만났을 때 그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곳입니다(약1:2).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가장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서 우리의 영적 권세가 자라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유 20절). 우리는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대신에 우리에게 적대적인 환경에 맞서 어떻게 환경을 바꿀 수 있는지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의 충전을 위한 방언은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도록 해 주는데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국에는 그 능력이 흘러가는 그릇마저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나는 한 집회에서 어떤 창조적인 기적이 너무나 필요한 한 소녀를 위해 기도했지만 즉시 역사를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린 소녀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는 너무나 실망했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호텔의 내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당혹스럽고 슬퍼서 하나님께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 어린 소녀와 나를 모두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성품이 주님 안에서 더욱 발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이런 창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능력을 자제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영적인 성숙함의 수준에서 내가 하나님의 그 정도의 능력을 받는다면 그 능력이 나를 파괴시켰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어질 때까지는 하나님의 능력도 우리에게 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그분의 자산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방언 중 자신을 세우는 방언이야말로 그런 성숙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가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