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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예인스
샤갈만큼 청색을 잘 썼던 화가도 없다고 한다.
샤갈의 그림에서 보는 청색은 매우 맑은 느낌을 주어 서정적인 그의 그림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샤갈의 청색을 재현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도 샤갈이 거둔 효과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샤갈의 청색이 갖고 있는 비밀은 청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색과 주변의 어두운 색들 사이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샤갈의 그림(과학동아에서는 '마을'을 인용했지만, 웹상에서 찾질 못했음)을 자세히 보면
청색주변을 어둡게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위에 따라 검은색을 사용한 경우도 많다.
이렇게 어두운 색으로 둘러싸인 색채는 원래 밝기 보다 더 환하게 보인다.
반대로 밝은 배경에 둘러싸인 색채는 더 어둡게 보인다.
샤갈은 청색의 주변을 어둡게 해 청색의 밝기를 실제보다 높게 보이게 했다.
평화 1964년 작, 유엔빌딩, 뉴욕, Stained Glass |
에펠탑의 신랑 신부 - The Bride and Groom of the Eiffel Tower,
1938-39, oil on Canvas, 150x136.5cm
결혼식 예복을 입은 신부와 그 신부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신랑은
빠지지 않고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사랑은 천천히 운명으로, 그리고 신성한 세계로 연결되어 간다.
어께를 끌어안은 부부에게 천사는 꽃다발을 내밀 뿐이었다.
여기에도 꽃다발이 있고, 악기가 연주되고 있다.
샤갈은 신부인 벨라를 꼭 끌어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곳이 파리의 하늘이든, 비테브스크의 하늘이든,
단 한순간도 신랑은 신부를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괴기한 새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디로 그들을 데리고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7년전 다른 그림에서 이 새가 부부를 업고 나타났을 때,
그것은 두 개의 다리가 있는 닭 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본 파리, Paris Through the Window 1913
window (전원의 창) 1915
녹색 정원을 창밖에 둔 신혼의 아늑한 보금자리다.
선명한 초록 화면의 한 중간에 하얀 간이 커튼이 걷어 올려져 있다.
사랑이 넘쳐 만물을 모두 같은 아름다움으로 찬미하려는
심정의 행복함이 숨김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 심정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창의 오른편에 쌓아 올려놓은 듯
두개의 옆 얼굴로 샤갈과 부인 벨라가 그려져 있다.
Wedding Candles
산책 1917 캠버스 유채 170*163., 러시아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1917년 페트로 그라드의 미하이로스키 극장에 집결한
시인, 화가, 배우들이 미래의 문화성의 초석을 위하여
샤갈을 미술국장에 추대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여
비테부스크의 벨라 집으로 돌아와 화업에 전심, 사태를 관망했다.
이때 그린 작품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이나
<산책>은 이 시기의 사랑에의 찬가이다.
드디어 약탈과 파괴에 멍든 고향의 산하에서
첫딸을 얻은 아내를 넓은 우주 공간에 휘돌리는 이 작품은
매우 대범하게 처리 한 그의 동화적 표현에 의하여 매혹적이다.
그리고 빨강과 초록의 두 계통의 색채로써
그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맑고 커다란 화면을 이루고 있다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
Double Portrait with a Glass of Wine,
1917-1918, oil on canvas, 233x136cm
그의 딸 '이다'가 천사처럼 아버지의 머리위 에서 날개치고 있다.
AUTOUR D'ELLE (그녀의 주변)
1945, 캔버스 유채, 131.2 ×108.9㎝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샤갈의 애처 벨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그려졌다.
파리 해방과 더불어 파리 개방의 소식을 듣고 뛸 듯이
좋아하던 벨라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은 사람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샤갈은 그 슬픔을 통하여 그녀와의 삶을 이 작품에서,
마치 스테인 글라스의 작품처럼 투명하고 심오한 색으로 표현했다.
짙은 파란색 밤의 중앙에 초승달이 비치는 비테프스크의 또 다른 밤이 둥굴게 끼워졌으며,
이밤의 구체를 아크로바트로 변한 이다가 받쳐 들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신부를 껴안고 요정의 꼬리처럼
하얀 베일을 끌고 너울거리며 올라가는 젊은이가 있고,
앞에는 보기만 해도 저승 사람의 표정을 한 벨라와
저승의 하늘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화가의 거꾸로된 얼굴이 있다.
중앙의 원은 초승달과 함께 해와 달을 상징하는데,
그 후의 많은 작품에 음양의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 기호의 발단이다.
화촉
벨라의 죽음은 샤갈에서 있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불행과 고독을 이겨내는 9개월간 그는 붓을 들지 못했고
온갖 그림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았다.
드디어 화가(畵架) 앞에 앉을 기력을 회복하여 처음으로 그가 손에 잡은
그림이 12년 전 그가 사랑에 잠겨 살 때 그린 <아르르 캉> 이었다.
시집가는 신부를 거의 중앙에 그리고,
주위에는 여러 형상과 인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이 오른쪽 반쪽의 테마로서는 <화촉>이라는 이 작품을,
왼쪽 반으로서 앞에 소개한 <그녀의 주변>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벨라를 잃은 후 한 동안 샤갈의 화면은 깊은 푸른색이 지배한다.
후에 이 푸른색은 정제되고 단련되어서
가히 "샤갈의 푸른 색"이라 할 맑고 환상적인 색채에 이르게 됐다.
벨라가 죽고 난 이후 몇 점의 작품에서 샤갈의 색채가 얼마나 투명하며 깊이 있고,
아름답게 발색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의 내면 속에 깊이 깔린 슬픔을 그가 얼마나 알뜰하게 소화하며,
정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화면의 부분을 메운 투명한 푸른색 속에
몇 가지 드러낸 강렬한 대비색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샤갈이 돌연 화면에 매를 그리게 된 것은 어느 친구의 '천야일야(千夜一夜)'의 삽화를 경험에서라 한다.
어쨌든 그의 즐겨 쓰는 나선구에 의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 모자의 하강과 썰매와 말의 상승운동을 통하여
어떤 리얼리티와 결합한 점에서, 이 작품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썰매를 타고 가던 마돈나는 상승하는 썰매에서 떨어져 땅에 떨어지고 있다.
바바를 위하여
"이제야 제2의 청춘이 열렸다."라고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노화가(老畵家 65세)는 부르짖었다.
25세 연하의 검은 눈의 어여쁜 러시아 여성 바바를 위하여 이 그림이 그려져,
그녀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
샤갈의 바바에 대한 헌신의 정도는 감동적인 이야기 거리가 될 정도로서,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유태인이었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어쩌면 그의 혈통이나 현상이 그의 그림 모두에서
그런 동과 서, 몽환과 현실들이 뒤섞여 꽃을 피운
멀티 컬쳐리즘의 현학성을 보여주는 이유일지도
Homage to the Past 1944
라일락속의 연인들 Lovers in the Lilacs 1930
연인들 Les Armoureaux de Vence
여름밤의 꿈 - 1939
"이 조인(鳥人)은 전적인 주역이다.
파우스트극의 메피스트처럼 무대로 뛰어나온 모습이다.
무대는 서커스의 원형 스타디움을 닮았다.
배심원 같은 관객에 둘러싸인 공간에는 텔레비전에라도 비치는 것처럼
이스바와 말을 탄 소녀가 음울한 빨간색 필터의 빛 너머로 부각되어 있다. "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것이며,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의 부부싸움에서 시작된다.
잠깐의 다툼에 약이 오른 오베론은 티타니아를 골탕 먹이려고 요정 버크에게 마법의 꽃을 구해 오라고 명했다.
마법의 꽃인즉, 그 즙을 눈에 바르면 눈을 뜨고 나서 맨 처음으로 보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꽃이다.
꽃의 즙이 눈에 닿은 요정여왕은 하필 못난 얼굴의 당나귀 인간인 바텀을 처음 바라보게 되고,
순식간에 사랑의 마법에 빠져든다.
The Woman the Roses 1929
1924년부터 샤갈은 서커스를 통하여 많은 그의 심중을 이야기하려는데 열중해 왔다.
그는 그 주제를 때로는 많은 팟슈로, 혹은 아크와틴트의 판 형식으로, 또 유화로 많은 경험을 했고,
또한 서커스는 그의 화면 공간을 그만큼 자유롭게 설정하는데 성공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그의 화면에는 <초록 눈의 집> 이후 자주 선량하고 우수에 찬 눈이 등장하고, 또 물고기가 등장한다.
투명도가 높은 푸른색 속에 그가 항상 그려오던, 이미 그에겐 일상성을 지닌 여러 형상들이 물 속에 잠기듯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빨강과 노랑, 초록들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푸른색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이후, 이 몽상적이며 환상적인 랍소디 인블루에 의하여 연인들의 로맨스를 물들일 것이다.
곡예사 - 1943
오른쪽 위에는 신부 모습으로 자란 소녀가 발레리나와 같은 손짓을 하며 등장한다.
밝은 녹색과 혈관이 뻗어있는 두 다리의 무서운 회백색과 개방된 바이올린과
인간의 조건을 암시하는 괘종시계는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대비된다.
환상이 형이상학으로 높여진 이 작품은 섬뜩한 환상미의 극치이다.
7개의 손가락 자화상,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 1913
"이 작품의 부분적으로나마 처음으로 파리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왼쪽 창밖에 거리와 에펠탑이 그려진 현실로의 파리와, 오른쪽 벽에는 회상으로서의 비테부스크를 나타내어
그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키고 있다.
그가 그린 얼굴은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괴신(怪神)의 것으로,
그 현실성은 일곱 개의 손가락과 함께 조화되고 있다.
""나무가 뜻밖에 엉뚱한 것으로 하고, 별안간 자신의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인데
왼 손이 일곱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세계를 나는 극히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싶습니다."
"(E. Roditi와의 대화)"
6년 후 샤갈의 아내가 될 벨라 로젠펠드를 그린 초상화이다.
이 해에 처음으로 벨라를 그때까지의 여자친구 테아의 소개에 의하여 알게 되어,
그의 영원한 반려자로의 한 여성상을 이 유태 여성으로부터 찾게 되고,
그 선택의 순간을 기념하기 한 초상화로 그려졌다.
"돌연 나는 느꼈다. 내가 살아나갈 길은 테아와 함께 라는 것을! 벨라만이 내 아내라는 것을."
샤갈은 바로 전년에 테아를 모델로 한 <빨간 나무>를 거친 표현주의적 묘법에 의하여 그린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청산하고 이 작품에서는 엄격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서로 융화하듯 한,
샤갈의 독자적인 여성미 표현에 있어 최초의 기념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만 배경 앞에 하얀 의상, 그리고 까만 장갑의 대조에서 기품 있는 화면을 느끼게 된다.
꿈을 그린 화가
마르크 샤갈 약사
Marc Chagall (Mark Zakharovich Shagal)
(1887 - 1985)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화가의 한 사람인
샤갈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동시대의 어떤 미술사조에도 몸담지 않은
가장 독창적이고 신비스러운 작품세계를 만들어왔다.
뛰어난 상상력과 탁월한 감각으로 색채의 마술사처럼
그가 그려낸 화려한 캔버스를 통해 작가는
"우리네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
라고 말한다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한 사랑의 메세지를 현란한 색채를 통해 만나게 된다.
사랑의 감정은 가장 독창적이고 신비스러운 작품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샤갈은 말한다
" 나의 작품은 내 추억들이다" 라고
삶의 희로애락을 그려낸 서커스 풍경과
샤갈 예술의 걸작이라 일컫는 모스크바 유대인 극장 패널화,
그리고 고향 러시아를 회상하는 그림들.
러시아 출신 유대계 프랑스 화가. 비텝스크 출생. 고향마을의 미술학원에서 배운 뒤,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실미술장려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L. 박스트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유럽근대미술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1910년에 파리로 가서 1914년까지 머물렀다. 그 사이에 A. 모딜리아니·C. 수틴·J. 들로네 등을 알게 되었고, 시인 B. 상드라르·G. 아폴리네르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
또 1911년의 앵데팡당전에 첫 출품을 하고, 1914년에는 베를린 데어슈투름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기 위해 독일을 방문,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그대로 러시아에 머물렀다.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샤갈 작품의 중요한 영감(靈感)의 원천이 되었다.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자 비텝스크지역 미술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미술학교를 창설하였다. K. 말레비치와 E. 리시츠키를 교수로 초빙하였는데, 말레비치와의 의견대립으로 1919년 위원직에서 물러난 후, 모스크바로 옮겨 국립유대극장의 벽화를 그렸다.
1922년 베를린, 이듬해에는 파리로 돌아가서 화상 A. 볼라르의 의뢰로 N. 고골리의 《죽은 혼》의 삽화에 손을 대는 등 차츰 파리의 유력한 화가로서 주목을 받는 동시에, 환상적인 작풍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1941년 뉴욕근대미술관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냈고, 발레 의상과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1947년 파리로 돌아갔으며 1950년에는 남프랑스 방스에 머물렀다. 1952년 V. 브로드스키와 재혼, 20세기 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제작활동의 폭이 넓어 유채·구아슈·판화, 파리 오페라극장의 천장그림, 예루살렘 하다사병원의 스테인드글라스, 그 밖에 조각·도기·무대장치에까지 미치고 있다.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내용, 러시아에 대한 향수, 유대인 특유의 전통과 상징에 대한 경애 등 그의 작품의 기조(基調)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파리에서 색채의 발견, 입체파의 영향, 상드라르나 아폴리네르 등 전위시인과의 접촉은 그의 예술에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색채와 형태에서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지를 시적으로 구성하였다. 입체파의 경향은 곧 색채가 넘쳐흐르는 보다 자유로운 스타일로 전환되었고, 그 뒤 그의 환상적 우의표현(寓意表現)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샤갈미술관에 《성서의 메시지(1969∼1973)》 작품군이 있다.
러시아 비테프스크 9형제 중 맏이로 출생 (1887. 7. 7) |
첫댓글 샤갈의 작품을 보면 청색의 공간에 펼져진 이야기가 한 편의 감동적인 수필을 읽는 기분입니다.
샤갈의 아름다운 작품이 다 모였네요, 샤갈이라는 이름은 환상적인 색채와 더불어 꿈, 환상, 추억, 고향,사랑, 가족 ,같은 달콤하고 가슴 설레이는 단어와 연결되지요, 러시아 그의 고향은 샤갈에게 환상과 신비로운 감성의 샘이었답니다. 좋은 작품 감상했습니다.
그림과 소리로 마음을 나타내는 예술가들은 놀랍습니다. 샤갈은 책 한 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폭의 그림에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들이 부럽습니다. 밝고 투명한 물감을 즐겨쓰는 샤갈의 영혼도 그러했겠지요?
배경음악이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라서 환상적인 그림속으로 더욱 빠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샤갈의 영혼은 그의 그림속에 청색, 프로방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푸른색에 파도처럼 실려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는 정녕 이 시대에 군중속에서 살아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를 비웃으며 숨겨진 진실을 고발하는 듯 합니다.
샤갈에게서 푸른 물감과 꿈, 환상과 벨라를 빼면 남는게 없을 듯하지요.
'색채의 마술사'란 별명은 쉽게 얻을수 없는 것이란 것을 다시 실감합니다.
샤갈의 청색과 김환기의 청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