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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1632-1677)】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해 낸 철학의 그리스도"
철학자들의 왕.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해 낸 철학의 그리스도._질 들뢰즈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 헤겔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인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그의 죄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_1656년 7월 27일, 스피노자가 유대교회의 종교의식에 따라 파문되었을 때, 파문 문서 내용 중에서...
율법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저주를 퍼부었던 그 유명한 파문은 유대인 사회를 통틀어 살펴봐도 가장 가혹한 파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러한 파문과 함께 유대인 사회는 그와 교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당시 유대인은 관리가 될 수 없었으므로 유대인 사회에서 파문당해 쫓겨난다는 것은 곧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도 파문당한 사람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하려는 한 광신자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잠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렌즈 깎는 기술을 배운 뒤부터는 하숙집 다락방에서 은거하면서 렌즈갈이를 직업 삼아 극히 단순한 생활을 반복했다. 가끔 피우는 담배가 유일한 취미였다. 렌즈 가공을 하고 남는 시간엔 책상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철학을 연구했고 때때로 친구들이나 다른 질문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락방의 합리론자'라는 그의 별명은 여기에서 나왔다. 또한 하숙집 주인 가족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고 온화한 철학자로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대인 사회와는 단절이 되었고 가족도 그와 연을 끊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삶은 아니라서, 여러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스피노자 연구 모임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인 팬들도 있었다. 생계도 렌즈 가공만으로 유지된 건 아니고 친구와 지지자들이 연금 형식으로 보낸 돈도 많은 보탬이 되었기에,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딱히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 수중의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전부 서적을 구매하는데 사용했고, 옷차림 또한 검소해서 외출용 옷과 평상시 입는 옷 두벌만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철학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위험했기 때문에 그의 책이 떳떳하게 출판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신학정치론』은 익명으로 출간되었으나 큰 논란을 일으켰고 그의 대표 저서인 『에티카』는 출간을 시도하다 포기하여 사후에 출판된다.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간한 책은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데카르트 철학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책을 저술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데카르트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독일 팔츠 선제후국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로 초빙을 받기도 하였으나, 한달 정도 고민하다가 거절한다. 이 때 쓴 사양하는 편지도 유명하다.
그는 4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를 두고 렌즈를 가공하면서 생기는 유리가루를 많이 마셨던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형도 폐질환으로 사망한 것을 토대로 가족력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자주 아팠기에 스스로의 죽음을 예상했는지, 재산을 정리해 놓았다.[4] '죽음 앞에서의 공포는 필연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다'는 그의 철학을 스스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죽는 날 당일에도 평소처럼 닭고기 수프를 맛있게 먹고 친구인 의사와 하숙집 주인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다가, 저녁 때 보니 죽어 있었다고 한다.
기존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세상 모든 것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제일 첫번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번째 원인이란,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스콜라 철학자들은 실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여기서 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신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면서도, 신이 '첫번째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이 '신'을 스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 스콜라 철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인이 된다면, '신의 원인'도 '신'이 되므로, 세상의 '제일 첫번째 원인'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신'의 원인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해보면, '신'은 동일한데 단지 변화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분석해본다. 변화는 '변화의 대상'과 '그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 그리고 이로 인해 산출된 '그 변화의 결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변화의 작용'을 '변용(affectio)'이라고 하고, 그렇게 변용되어 산출된 결과를 '양태(modus)'라고 부른다. 이를 실체에 적용해보면,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즉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반면 양태는 실체의 변용(변화한 모습)으로,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즉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이 필요한 것을 말한다.
유일한 실체는 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 실체의 무한한 변용으로부터 무한한 양태들이 산출된 것, 곧 '세상 만물'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신이 '첫번째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은 "동일한데 단지 변화했을 뿐"이어야 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신은 동일한데 단지 변화했을 뿐이고, 이러한 신의 변용이 결국 '세상'이 된다면, '신은 곧 세상'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 첫번째 원인(실체)은 나머지 결과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면, 애초에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첫번째 원인을 찾아가는 논리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가?
즉, 기원을 찾아가는 최초의 질문이 무의미해지므로, '실체가 독립되어 있다'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이는 마치 '둥근 사각형'을 말하는 것과 같아서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과 세상 만물의 관계에 있어서의 '신'은, 세상과 독립된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세상과 합쳐지는 '내재적 immanent' 원인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세계관처럼, 독립된 존재로서 인간세상에 개입하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을 믿는 것은 단지 '미신'에 불과하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세상의 내재적 원인으로서 끊임없이 양태들을 낳는 이 '실체'를 '능산적 자연(생산하는 자연)'으로 이해한다. 이 실체가 무한히 변용되어 나타나는 수많은 양태들, 즉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들은 '소산적 자연(생산된 자연)'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본다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구분은 임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소산적 자연인 양태 또한 그 자신의 내재적인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또 다른 양태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즉, 실체는 자연 만물이라는 수만가지의 다양한 양태들로 표현되면서도, 그들 양태 각각 모두는 다른 양태들을 산출할 수 있는 내재적 원인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체인 신과 (그 신의 양태인) 자연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신은 자연 만물을 산출하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그 산출된 결과이므로, "신은 곧 자연" (Deus sive Natura)이다.
스피노자는 윤리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선이거나 악인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또한 신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며,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나 동일하게 비를 내려준다. 그러므로 선악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코나투스)을 증가시키면, 우리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을 '선'이라고 하면서 그것에 의해 더욱 변용되기를 원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을 감소시킨다면,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악'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원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은 이러한 선악의 윤리를 바탕으로 더 큰 역량, 활동성, 기쁨 및 자유을 위해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스피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나는 인간의 행동들에 관해 조롱하거나, 슬퍼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오직 이해하고자 하였다.
희망 없는 두려움도 없고, 두려움 없는 희망도 없다.
나는 기성 종교의 방해자가 되지 않고서 철학을 가르칠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하는 말은, 베드로보다는 바울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훌륭한 모든 것은 이루기 어렵고, 그만큼 귀하다.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활동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해함은 곧 자유로워짐이기 때문이다
Und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 würde ich heute mein Apfelbäumchen pflanzen.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말은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다.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 1632. 11. 25. - 1677. 2. 21.)
"데모크리토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스피노자는 서로 쌍둥이 처럼 닮은 분들입니다. Men like Democritus, Francis of Assisi, and Spinoza are closely akin to one another."
(A. 아인슈타인 Einstein, '과학과 종교', <뉴욕타임즈? 1930.11.9)
“모든 철학자에게는 두 명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Every philosopher has two philosophies: his own and Spinoza's"(앙리 베르그손,1932년)
크고 작은 욕망으로 끊임없는 상승과 추락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사! 최근 정치•경제의 난장판에서 꿈틀대며 머리를 처드는 "욕망"들을 바라보면 스피노자 선생의 말씀이 성큼 마음에 다가옵니다.
인간의 본질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 그이들이 던지는 의지의 망언과 행동의 추태도 살아 남으려는 실존의 욕망인가!
“욕망을 어떤 정서에 따라 어떤 것을 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여기는 한,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다”(<에티카3부>, 정서의 정의,1677년)
그이들에게 48가지 감정의 첫 번째 “욕망(cupiditas)"은 무엇일까? 권력의 상승을 되찾아 ”기쁘고 싶은 욕망(laetitia)“일까? 또 한번의 추락을 맞보는 ”슬픔을 피하고 싶은 욕망(tristitia)“일까? 매일 목격하게 되는 그 욕망의 "악"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어떻게 치울 것인가.
“악은 만나지 말아야 할 두 사물이 만났을 때 생겨난다. 예를 들어 뱀의 독은 인간이 그것을 먹고 소화시키면 더는 악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물은 없다. ... 악의 문제는 우리가 사물을 적합한 조건에 둘 때 해결된다”(발타자르 토마스, <비참할 땐 스피노자> 2013년)
우리의 욕망으로 저지른 과거의 나쁜 선택에 대한 후회를 극복하고 지금과 미래의 좋은 선택을 위한 조언!
“우리는 이따금 회한과 후회에 사로잡힌다. 왜 그렇게밖에는 하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 그러나 우리 의지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런 질문은 의미 없게 된다. 과거 우리가 한 행동과 운명은 그런 상황과 인식, 분석 등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오늘날 인식과 경험은 과거 그 사건 당시의 우리가 갖지 못했던 것이며 따라서 과거 우리는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오늘날 나쁜 것으로 보이는 과거의 그 선택이 오늘날 판단을 가능하게 만든 경험을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며 동시에 더 나은 선택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다. 회고적으로 더 좋은 선택이 가능했으며 따라서 그것이 나쁜 선택이었음을 오늘날 깨닫게 됐다는 사실은 과거 우리가 이해하고 해석한 조건 아래서 그것이 나쁜 선택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해준다.”( 발타자르 토마스, <비참할 땐 스피노자> 2013년)
지행합일의 자세로 살아간 현자의 고귀한 생애!
"현자는 그와 같이 고찰하는 한에서 영혼의 동요가 거의 없으며 자신과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인식하며,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항상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소유한다." (<에티카5부 정리 42의 주석>)
"스피노자는 예의 바른 자, 겸손한 자, 현자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스피노자와 이런 저런 친분을 가졌던 사람들과 은거를 한 이후 한동안 그가 살았던 마을의 농부들은 모두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피노자는 정직하게 거래했고 다정했으며 충직하고 앞에 나서지 않았다.'(피에르 벨, <역사적·비판적사전> 1697년)" [발타자르 토마스, <비참할 땐 스피노자> 2013년]
“스피노자는 모든 위대한 철학자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사랑받을 만하다. 지성의 관점에서 과연 그를 뛰어넘은 철학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도덕의 관점에서도 역시 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할 것이다”(버트란드 러셀, “<서양철학사>1945년)
무지를 자책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
-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려운 것이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 "철학의 최후 목표는 자유인이 되는데 있다. ... 자유인은 죽음을 최소한 생각한다. 그이의 지혜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묵상이다."
- "나는 사람의 행동을 경멸하거나, 탄식하거나, 비웃지 않고, 그저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 "한 번 분노할 때마다 한 살씩 늙어가고 한 번 기뻐할 때마다 한 살씩 젊어진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다. 또한 최악의 형벌이다"
-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다"
- “우리와 지복과 비참함은 모두 오직 하나의 요소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 미움, 혼란도 생기지 않는다”
- "일등이고 싶지만 일등이 아닌 오만한 사람들이 아첨에 가장 잘 속는다."
- "공포 없는 희망 없고, 희망 없는 공포 없다."
- "과거와 다른 현재를 바란다면 과거를 공부하라.
첫댓글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동일 민족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스피노자. 그러나 이 파문과 배척이 해방과 지유의 길을 걷게 했으니...위대한 자유혼 스피노자의 생이 어느 누구보다 존귀하다.
"철학의 최후 목표는 자유인이 되는데 있다. ... 자유인은 죽음을 최소한 생각한다. 그이의 지혜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묵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