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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 高平(1886 ~ 미상)】 "봉오동, 청산리전투 무기구입과 운반, 각 부대의 연합과 후원 기여."
고평(高平)은 1886년 4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고인석(高仁鉐) · 고찬(高鑽)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1902년 서울 보광중학교(普光中學校)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城官立法官養成所)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 뒤 1905년 4월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檢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6~1910년 전라북도 부안(扶安) 내소사(來蘇寺)에 머물면서 불교철학을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1년 7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18일에는 중국 지린성주1〔吉林省〕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하장리(下場里)의 박동원〔朴東轅, 연길도윤공서외교과원(延吉道尹公署外交科員)〕 집에서 구춘선(具春先) · 김영학(金永學) · 유예균(劉禮均)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간도주2 지방의 모든 교회와 단체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는 대로 ‘독립만세’를 절규하기로 결의함으로써 같은 해 용정(龍井)에서 3 · 13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장(朝鮮獨立期成總會長)의 지시에 따라 고덕승(高德勝) · 이상호(李相鎬) · 지송(池松) 등과 함께 인근 지역 사방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힌 결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노령(露領)주3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新國民大會)에 서일(徐一) · 구춘선 · 서왈보(徐曰輔)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또 옌지현 명월구(明月溝)에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본부 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 등으로 배치될 때 중부(中部) 의군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실제 중심 세력으로 5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1920년 8월 하순에는 중국 토군(土軍)이 일제에 매수당해 내습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150명으로 감사대(敢死隊)를 조직, 노야령(老爺嶺)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 토군을 격퇴하고 일본군에게는 큰 타격을 가하였다. 그 뒤 청산리 대첩을 거두고 난 다음 밀산(密山)을 경유하여 노령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軍)과 함께 러시아에 갔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 일어나자 원래의 활동 근거지인 옌지로 되돌아와 의군부 재기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1월에는 옌지현 춘양향(春陽鄕) 합마당(蛤蟆塘)에 자리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군정사군무서(軍政司軍務署) 독판(督辦)주4 서일(徐一) 휘하에서 김덕현(金德賢) · 손범철(孫範哲) 등과 함께 군정회의원(軍政會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5월에는 옌지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을 추대하고, 고평은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병력 규모는 4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사훈련과 조직을 강화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주5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둔전제(屯田制)를 택하는 한편,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오는 등 군세를 확충하였으나, 실제 항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28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 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66)장세윤* 논문접수일: 2019. 11. 2. 심사개시일: 2019. 11. 10. 게재확정일: 2019. 11. 21. *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E-mail: changsy@nahf.or.kr 全北學硏究 제1집(2019) The Journal of Jeonbuk Studies, Vol.1(2019) 2019년 12월 31일, pp.63-107 Jeonbuk Institute, 2019, pp.63-107
목 차
1. 머리말
2. 고평의 출신과 가계(家系)
3. 고평의 생애와 1910년대 대종교의 민족운동
4. 중국 연변(북간도) 망명과 독립운동
1) 용정 3․13운동 주도와 ‘독립선언포고문’
2)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와 고평
3) 봉오동전투의 산파역 - 최진동․홍범도․안무 독립군 연합부대의 성립을 가능케 하다
5. 1920년대 초 중국 연변지역(북간도) 독립운동
6. 1920년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고려혁명군 조직과 민족운동
7. 1930년대 중국 관내(關內)지역 이동과 중국군 장교 활동
8. 해방 이후 대종교 활동과 ‘반민특위’ 재판관 활동 - 제2의 독립운동 참여
9. 고평의 유족
10. 맺음말
참고문헌
고평(高平, 초명 高高鑽)은 전라북도 부안군의 장흥(長興) 고씨 전통명가에서 1884년에 태어났다. 8세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고씨 종가로 입양되어 8년 동 안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후 서울로 가서 보광(중)학교와 관립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춘천 지방법원의 검사로 한달간 근무하고 사임하여 고향 부안으로 돌아 왔다. 1911년 7월 신흥 민족종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주요 직책을 맡게되었는데, 이 대종교 조직과의 연계가 만주지역(중국동북지역) 독 립운동에 투신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고평은 1913년 4월 대종교 동도본사(東道 本司)의 전강(典講) 직책을 맡아 대종교 신도들이 이주하던 중국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대종교 세력 을 대표하여 중국 연변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용정(龍井) 3․13 반일시 위운동’의 기획에 참가하여 연변(延邊,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노력한 결과 1919년 3월 13일 중국 연변지역의 용정에서는 3만 여명의 한인들이 대거 참가한 ‘3․13 반일시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평은 1919년 연변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었 을 때 참모장의 직책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와 그해 10월의 청산리전투 시기에도 독립군 부대의 무기구입과 운반, 각 부대의 연합과 후원, 조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에 역시 연변지역에서 설립된 고려혁 명군(高麗革命軍) 독립군부대의 참모장을 맡아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이후 그는 1920년대 북만주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조직이자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신민부 (新民府)의 과장(課長)을 맡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한인 교민 자치운동에 기 여하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 국 민당정부의 참모장이나 법관을 맡아 한․중 연대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45년 4월 귀국하여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49년 후반기에는 ‘반민족행위특별 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친일 민족반역자의 심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납북된 뒤 잊 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앞으로 관련 자료를 더 발굴․수집하고 정리하여 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하겠다.
1. 머리말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평(高平, 초명 高高鑽, 이명 高仁鉐)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거의 유일하게 수년전 작고한 전북지역 보 학(譜學)의 대가 양만정(楊萬鼎) 선생이 30여년 전에 발표한 항일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전라문화연구 제2집, 1988 게재)을 찾아 볼 수 있 을 뿐이다. 이 논문은 7쪽에 불과한 소논문이라 고평 지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을 충분히 조명할 수 없었다. 고평은 호남의 4대 명문가로 꼽히는 장흥 고씨, 저 유명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로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 자 분연히 해외로 망명하여 조상들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줄기차게 항일무장 투쟁에 투신하였다. 199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최후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상 한국학계는 물론, 고향인 전북지역 학계에서조차 잊혀진 존재인 것 이다. 특히 고평 선생이 만주(중국동북)와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지역에서 활 동한 사실이 주목되는데,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조명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그의 조카 고영기(高永基, 1993년 양자로 입적) 씨 가 소장하고 있던 그의 자필 이력서(사본)를 친척들의 도움으로 입수할 수 있 었다. 이에 그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의 개요를 검토․분석하여 그 공적의 일 부나마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필자는 고평 선생의 생애와 중국(동북지방, 關 ∣66∣ 全北學硏究 제1집 內),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최근 발굴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재 조명하고자 한다.
2. 고평의 출신과 가계(家系)
고평(高平)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해인 1884년(고종 21년) 음력 4월 8일(양 력 5월 2일)에 전북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의 본가에서 고재갑(高在甲)과 함풍 (咸豊, 지금 함평)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1)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초명은 고찬(高鑽), 이명은 인석(仁鉐, 族譜名)인데 뒤에 독립운동에 투신하면 서 평(平)으로 개명했다. 자는 수여(秀汝) 호는 백하(白霞)라 했다.2) 고평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884년 생(단기 4217년 4월 8일)이며, 원적은 전북 정읍군(井邑郡) 고부면 신흥리(新興里) 639번지이다. 지금까지 본 명이 인석(高仁碩, 또는 高仁鉐), 이명이 고찬(高鑽)으로 알려졌으나, 필자가 새로 확인한 결과 ‘고고찬’이 본명으로 확인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양자 고영 기의 제적등본에 ‘고고찬’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3) 그의 먼 선대는 원래 제주도에 있었던 탐라국 시조 고을나왕의 후손 제주 고씨였다. 고려․조선시대에 선조들이 육지로 건너와 전라남도 장흥 일대에 세거하면서 ‘장흥’ 고씨로 본관을 바꾸었는데, 이후 영광에서 세거하였다. 그 의 17대조인 자검이 처가를 따라 영광에서 광산군(지금 광주) 대촌면으로 이 주했다. 자검의 아들인 하천 고운(高雲)은 중종 재위시인 1519년(己卯年)에 문 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으나 정암 조광조가 사화로 몰려 사사된 일에 연루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상에서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불렀다.
1) 양만정, 1988, 항일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 전라문화연구 제2집, 전북 향토사연구회, 128쪽. 양만정은 고평이 1884년생이라고 하였으나, 장흥 고씨 구 족보 (간행년도 미상)와 長興高氏 大同譜(권4, 광주 : 道山祠, 2005년 발간)에는 1885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에는 1886년 4월 8일생으로 정리되어 있다. 고평 자신의 이력서(단기 4217년 생으로 표기)와 8살 때 전남 담양 창평으로 갔다는 가문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고평은 1884년생으로 판단된다.
2) 위의 長興高氏 大同譜 참조.
3) 이와 관련하여 같은 장흥 고씨 일족인 전북 부안군 청림리 출신의 高在欽(고평의 재종 숙, 독립운동가 高光契 양자) 선생께 감사드린다. 고선생님은 고평의 양자 고영기 선생 제적등본 열람에 큰 도움을 주셨고(2019년 12월 18일), 많은 관련자료를 제공해 주셨다.
4) 양만정, 앞의 논문, 128쪽
선조 고운부터 그의 현손인 월봉 고부천까지 연이어 5대에 걸쳐 문과에 급 제 하여 명성을 떨쳤다. 특히 임진왜란 때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은 두 아 들 준봉(隼峰) 종후(從厚)와 학봉(鶴峰) 인후(因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대장 으로 추대되었는데, 고경명과 인후는 충남 금산전투에서 고종후는 진주성 전 투에서 각각 순절하여 충절의 가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종후의 부인 함풍 이씨 친가는 지금 담양군 창평면 유촌에 있었는데, 종후가 그곳으로 이 사를 가서 살았기에 창평에 그 자손이 세거하게 되었다. 고종후의 현손 응익 (應翼)은 전북 부안 김씨 가문으로 장가가서 처가를 따라 부안 운호(雲湖)로 이사했으므로, 자손들이 부안에 세거하였다. 응익의 손자인 신겸은 영조(英祖) 재위시 무과에 급제하여 영장(營將)을 지냈고, 손자 대진은 진사가 되었다. 대 진의 5대손이 고평(高平)이다.5) 지금도 전북 부안군 상서면 노적리 일대에 장 흥 고씨 일족이 세거하고 있는데, 오늘날 부안에서는 이 일대 고씨 일족을 노 적리 고씨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6)
3. 고평의 생애와 1910년대 대종교의 민족운동
고평은 1902년 서울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졸업하고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 城官立法官養成所)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였다. 1905년 4월에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에 임명되었다.7) 한편 불교에 심취하여 1906~1910년에는 전북 부안 내소사(來蘇寺)에 머물면서 불교철학을 공부하였으며, 서화전람 일을 맡 기도 하였다.8) 이하에서는 고평의 이력서와 관련 자료 등을 참조하여 그의 생애와 독립운 동을 정리하고자 한다.9) 특이한 사실은 1891년부터 1898년까지 8년간 전라남
5) 양만정, 위의 논문, 128~129쪽.
6) 양만정, 2003, 장흥 고씨와 그 배출 인물 , 부안에 살고있는 姓氏考, 부안 : 부안저널 사, 65쪽.
7) 고평은 1902년 4월 京城 官立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1905년 3월 졸업했다고 했지만, 국내 전문가 연구성과에 나오는 이 학교의 졸업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최기영, 2001, 한말 법관양성소의 운영과 교육 , 한국근현대사연구 16집, 한국근현대사학회, 60~63쪽 참조). 혹시 중퇴했거나, 아니면 관련 기록이 미비할 지도 모른다. 관립 법관양 성소에 대해서는 최기영의 위 논문 참조. 이 학교는 일본 및 프랑스식 법률교육을 실시 했다고 한다. 8) 이력서 참조.
9) 이력서 전문은 논문 끝의 별첨 이력서 참조.
도 창평 유천리(柳川里) 학봉 고인후 종가에 종손으로 입양되어 한문을 수학 했으나, 집을 나와 뒤에 파양되었다고 한다.10) 고평의 항일독립운동 투신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 3부자의 대일 의병항전과 구한말 전남북 일대에 거주하던 장흥 고씨 일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광순 의병부대의 활약․순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고광순(1848~1907), 고광채(1876~?), 고광훈(1862~1930), 고제량(1849~1907) 등의 의병전쟁 투신 과 순절 등은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11) 특히 어릴 때 양자로 입양되 어 8년간이나 생활했던 창평 출신의 의병장 고광순의 의병 봉기와 순국, 창평 고씨 집안의 일본군에 의한 피해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2) 더구나 고평은 가까운 일족인 고광계(高光契, 일명 고광설[1897-1933], 대 한광복단)이 연락원의 직책을 맡아 1920년 전후 시기에 중국 길림성 장백현 (長白縣)과 함경남도 혜산진, 고향인 전남북 일원과 국내 지역을 왕래하며 항 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사정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자료가 없어 상세히 고증하기 어렵지만, 최근 확인된 단편적인 고광계의 활동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13)
10) 전남 창평에 거주하고 있는 장흥 고씨 학봉(鶴峰) 종가 고영준 선생은 창평 유촌리에서 집을 나갈 때 양가의 허락도 없이 집에서 키우던 소를 끌고 나가 좀 소연했다는 이야기 가 전해온다고 증언했다(2019.10.21, 창평 종가에서 청취).
11) 고광순․고광채․고광훈․고제량 등에 대해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6,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웅진출판, 330․609쪽 참조
12) 관련 고씨 일족의 호남 의병전쟁 참여와 활동에 대해서는 홍순권, 1994, 한말 호남지 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 홍영기, 2004,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 조동걸, 1989, 鹿川 高光洵 의병장의 전적지 기행 , 한국근대사의 시련과 반성, 지식산업사 ; 조동걸, 2010, 호남의병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 한국근대사 별고(우송 조동걸전집 16), 역사공간 등 참조.
13)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12(大正10年[1921년]2月18日 高警 第3104號 ; 秘 受2181號), 大韓光復團 分團 檢擧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 검색일 2019년 10 월 3일) 및 1921년 1월 대한광복단 咸南甲山分團 검거자 명단 , 每日申報 1921년 1월 8일자 기사 참조..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69∣
<그림 2> 고평이 종손으로 입양되어 8년간 수학했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촌리 전경
<그림 3> 고평의 생애와 어린 시절을 증언한 힉봉종가 고영준 선생 (창평 유천리 거주) 고평은 이력서에서 1899년 보광중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했다고 했 지만, 실제로 이 학교는 보광학교(普光學校)로 파악된다. 이 학교는 1904년 한성 운니동에 설립되었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1901년 서광세(徐光世) 외 수명이 한 성(서울)에 세운 낙연의숙(洛淵義塾)이 후에 보광학교로 개명되었다. 따라서 고 평이 입학․졸업 연도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1904년 9월 이준 등 4인의 유지 ∣70∣ 全北學硏究 제1집 들이 교육과 문화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는 사 립국민사범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원 양성교육을 실시하고, 한성에 보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에 한남학교(漢南學校)를 한성에 설치하였다. 보광학교의 학과목은 수신·국어·교육학·작문·법학·경제학·이과·일어·산술·지 지(地誌)·역사·도화·체조 등이었는데, 사범과도 개설하여 민족교육의 선봉에 나 설 교사양성에 진력하였다. 이준의 보광학교는, 이종호의 보성학교, 이동휘의 보창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라고 일컬어졌다.14) 후일 이준은 국민교육회가 모태인 보광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노동청년과 애국청년들의 계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준은 “교육은 국방”이라며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남의 나라 청년보다 십배의 정열을 내서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엿다. ‘3천리에 3천개 학교 설립’을 주창하기도 하였다.15) 이러한 애국계몽운동 조류 속에서 고평도 보광학교의 이러한 교풍에 영향을 받아 후 일 대종교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평은 1911년 7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고, 이듬해 2월 대종교 남도 본사 관내의 포교원(布敎員)에 임명되었다.16) 또 1913년 4월에 대종교 본사 전강(典講)에 임명되어 중국 연변 왕청현(汪淸縣)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대종교의 종교 활동과 연계된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17) 대종교 총본사 소장의 대종교인 간부 명단인 종문영질(倧門榮秩)(1922년 발간)을 확인해보니 고평이 1916년(丙辰年) 10월 10일 참교(參敎) 직책을 맡았 다가18) 이듬해(丁巳年) 5월 17일 지교(知敎) 직책을 맡았음을 알 수 있었다.19) 1910년대 후반 북간도(현재 중국 연변) 일대에서 강력한 종교공동체를 형성 하고 강렬한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대종교 세 력의 일원으로 적극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평은 대종교 세력 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대종교 민족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 지역의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14) 보광학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 검색일 2019년 9월 8일) 참조. 15) 위와 같음. 16)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자신의 이름(高高鑽, 혹은 高人鉐)을 두자 이름인 ‘高平’으로 개명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1910년대 대종교 관련 인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외자 이름으로 개명(혹은 假名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보기를 들면 申圭植 → 申檉, 曺成煥 → 曺煜으로 개명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17) 이력서 참조. 18) 조준희, 2012, 종문영질(倧門榮秩)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2집, 한국민족운동사학 회, 284쪽. 19) 조준희, 종문영질(倧門榮秩) , 294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71∣ 이 과정에서 1914년 3월에 한인들이 세운 간민권학소장(墾民勸學所長)을 겸 임하였다가, 같은 해 4월에는 부근의 신성(新成)중학 강사에 임명되어 교육활 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또 서일이 대종교 동도본사를 이끌던 1918년 1월 대종교 교리·교사의 핵심 이 되는 경전을 하나로 엮은 사책합부(四冊合附)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 간하였는데, 고평은 이 책의 편수를 담당하였다.20) 한민족의 근대민족운동사에서 종교와 종교인, 또는 종교 관련 학교와 단체 들은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대종교는 단 군(檀君) 신앙을 기반으로 한 한민족 고유의 종교로서 일제하 독립운동의 전 개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실제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대종교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교조 나철과 제2대 교주 김교헌(金敎憲)·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 이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박은식·김두봉·김좌진·박찬익·서일·신규식·신백우·신채호·안희제·이동녕· 이시영·조성환·조완구·황학수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직접·간접으로 대종교 를 신봉하거나 관련을 맺고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21) 1915년 10월 조선총독부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교세가 확장되고 있던 대종교를 불법화하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대종교측에서는 일제의 탄압 을 피하고 재만한인들을 기반으로 활발한 포교와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주도로 1914년(일부 기록에는 1917년) 봄에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의 청파호(靑坡湖) 부근으로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그 직후 대 종교 인사들은 주로 만주(중국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포교 와 교육활동을 통한 교세확장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후반부터 교세 가 신장되었는데,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1923년 경에는 시교당(施敎堂)이 모 두 48개소나 되었고, 신도수도 수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22) 중국동북으로 이전한 대종교는 이후 고유의 신앙을 매개로 하여 한민족의 독 립운동에 앞장섰다. 1917년 7월의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3월의 ‘대한독립선 언서’ 작성 및 배포, 기타 대한정의단․중광단(重光團) 등 많은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과 각종 교육·계몽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20) 高平 編修, 1918, 四冊合附, 대종교 東道本司 ; 이동언, 2011, 서일의 생애와 항일무 장투쟁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8집, 독립기념관, 58~59쪽 참조. 21) 장세윤, 1998, 大倧敎 敎報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집, 한국민족운동사학회, 435쪽. 22) 다만 1920년대 중반 중국동북 군벌정권의 탄압으로 신자가 많이 줄어들어 1937년 경 대종교 신도수는 모두 28,635명이었다는 통계가 있다(박영석, 1982, 한민족독립운 동사연구, 일조각, 169쪽). ∣72∣ 全北學硏究 제1집 <그림 4> 고평 자필 이력서 앞부분 4. 중국 연변(북간도) 망명과 독립운동 1) 용정 3․13운동 주도와 ‘독립선언포고문’ 1919년 1~2월 중국 연변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미국대통령 윌 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 지역에서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할 각 지역 대표 선정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한민족 독립선 언서 발표 및 그 이후의 독립운동 계획이 논의되었다. 1918년 11월 중순 미주(美洲)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파리강화회의 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정하고 해주 지역에서도 한인 동포 대표자를 파리에 파 견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이에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도 니콜리스크-우수리 스크(蘇王嶺)에서 비밀집회를 열고 이동휘(李東輝)와 백순(白純)을 파견 대표 로 선정하였다. 2월 14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의 남공선(南公善) 등은 길림 성(吉林省) 국자가(局子街, 지금 연길)의 박경철(朴敬喆)과 이성근(李聖根)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대표자를 선정 파견하고 기부금을 모집할 것을 권유하였다.23) 이에 따라 연변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위원을 선정하고 23) 朝鮮軍參謀部, 朝特報 第2號 大正8年 3月 13日 間島方面 韓族獨立運動ニ關スル起因 及經過槪要 , 現代史資料 26, 東京: みすず書房, 1977, 82~83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73∣ 기부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국자가, 국자가의 양구(楊口)․소영자(小營子)․와 룡동(臥龍洞), 의란구(依蘭溝), 평강(平崗) 소오도구(小五道溝), 동불사(銅佛寺), 용정촌(龍井村)과 두도구(頭道溝), 동량(東良)․대랍자(大拉子), 종성간도(鍾城 間島) 지역 등에서 위원이 선임되었다.24) 이어 1919년 1월 25일과 2월 8일 국자가 소영자에서 두 차례의 비밀집회를 열고 간도(연변)지역 대표자로 김약연(金躍淵, 明東學校長), 정재면(鄭載冕, 용 정촌 기독교 전도사), 이중집(李仲執, 국자가 중국勸學所 學務員) 등 3명을 뽑 아 러시아 지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수행원은 와룡동 사립학교 교사 정 기영(鄭基英)이 맡았다.25) 훈춘(琿春)에서도 양하구(梁河龜)와 박태환(朴兌桓) 을 파견원으로 선출하였지만, 2월 18일 모임에서 문병호(文秉浩)와 윤동철(尹 東喆)로 교체하였다. 김약연, 정재면, 정기영은 2월 11일, 이중집은 2월 13일 연해주로 출발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공식 발표 등에 관해 서로 합의하 기 위해서였다. 또 이들 특파원 6명 가운데서 연변지역 총대표자를 뽑아 러시 아지역 대표자 이동휘, 동청철도(東淸鐵道) 연변(북만주)지역 대표자 백순 등 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가게 하고, 상해에서 국내 대표자인 이용(李鏞)과 합류하여 프랑스로 가도록 할 예정이었다. 한족독립선언서는 각 지역 대표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 모여 프랑스로 출발한 후 위의 각지에 살포하고, 동 시에 각국 공사와 각지 주재 외국영사 등에게도 공식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 런데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고종)가 승하하자 연변 각지에서 추도식 거행 을 명목으로 기부금을 모집하고, 한족독립선언서 공표와 동시에 각지에서 시 위운동을 개시할 계획이었다.26)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독립운동 단체 결성도 추진되었다. 중국 연변지역에서 이처럼 독립선언 움직임이 고양되는 가운데 고평은 연해 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의 한인촌에서 1919년 2월 18일과 20일에 국자가(局 子街 : 지금의 연길)의 연길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 외교과원 박동원(朴東轅, 호는 海觀)의 집에 가서 이 지역 독립운동가 33명과 함께 다음의 결의를 하였 다. 이 때 참가한 사람은 집주인 박동원 외에 이홍준(李弘俊), 이성근(李聖根), 박경철(朴敬喆-후일 홍범도 대한독립군의 참모), 김영학(金永學), 김순문(金舜 文), 강용헌(姜龍憲), 구춘선(具春先-후일 간도국민회장), 이성호(李盛浩), 백유 정(白瑜晶), 최봉렬(崔鳳烈), 박정훈(朴貞勳), 이동식(李東植), 고동환(高東煥) 24) 위의 책, 83쪽. 25) 위의 책, 84쪽. 26) 위와 같음. ∣74∣ 全北學硏究 제1집 등이었다. 이들은 첫째 간도(중국 연변) 내 각 교회와 단체는 서로 단결하고 협력 일치하여 한족(韓族) 독립운동에 힘을 다할 것, 둘째 한족 독립선언서 공 표와 동시에 간도지역 각 단체는 일제히 시위운동을 개시할 것, 셋째 한족독 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각 단체 유력자는 용정촌(龍井村)에 모여서 독립을 선언 하여 기세를 올릴 것 등을 결의하였다.27) 이 때 위에서 결의한 첫째의 각 단체 연합 방법은 기독교(耶蘇敎)·천주교·대 종교(大倧敎)·공자교(孔子敎) 각 유력자의 연락을 밀접히 하고, 이들 교도와 친 지들을 권유할 것, 제2의 시위운동은 각 단체 수 백 명이 집합하여 공개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 대세의 추이와 미국 대통령 윌슨(Wdrow Wilson)의 숭 고한 행동 찬미, 데모크라시 를 고창하고 일제히 한족독립만세를 절규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국제정세에 매우 해박한 시위형태였음을 알 수있다. 세번째 결의에서 각 단체 유력자의 집합지를 용정촌으로 정한 이유는 용정촌이 간도 (연변)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일본 침략세력의 초점이므로 한족 독립선언의 최적지로 보았기 때문이었다.28) 그런데 고평 등 이 때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만약 일본 관헌에게 체포 또는 끌려가는(引致) 등의 상황이 될 때에는 다소의 희생자를 내더라도 과감히 독립 선언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또한 2월 18일 밤 11시에 박동원(朴東轅)의 집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는데, 가맹자는 결사의 각오로 자기의 이름을 혈서 로 표기했다고 한다. 그 가맹자는 국자가(局子街-연길) 이홍준․이성근․박동 원․김영학, 용정촌 김정(金精), 종성간도(鍾城間島) 자동(子洞) 백유정, 팔도구 (八道溝) 유예균(劉禮均), 평강(平崗) 고동환 등이었다. 이후 이들 연변지역 독 립운동자 유력자들은 이 지역 각지에 출장하여 광복단 결사동맹자를 권유, 모 집하였다.29) 광복단 결성은 이처럼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온 연락 에 의한 것이며, 광복단 단원은 미국, 북경(北京), 천진(天津), 상해(上海), 서울 (京城), 평양, 러시아 연해주 지역 등에 걸쳐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30) 한편 일본 간도총영사관의 국자가(局子街, 지금의 연길)分館에서 파악한 정 보에 따르면 2월 17․18일경 위 박동원의 집에 모인 기독교도 구춘선․유찬희 등과 대종교도 고평․김영학 등 17명은 일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 27) 朝鮮軍參謀部, 朝特報 第2號 大正8年 3月 13日 間島方面 韓族獨立運動ニ關スル起因 及經過槪要 , 現代史資料 26, 東京: みすず書房, 1977, 84~85쪽. 일본 정보자료에 따르면 이 때 고평은 러시아에서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8) 위의 책, 85쪽. 29) 위와 같음. 30) 위와 같음.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75∣ 하면서 이를 위해 1인당 50여원의 경비를 갹출하여 운동자금으로 활용키로 했 다고 한다. 특히 매우 주목되는 사실은 고평 등이 모여 국권회복운동을 논의하 면서 국권을 회복한 때에는 공화제를 채용할 것을 적극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 이다.31) 이를 통해 ‘용정 3․13운동’ 주도세력은 독립 후의 국가정체로 ‘공화 제’를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2월 15일에는 용청촌 신촌(新村) 영신학교(永信學校)에서 기독교 신도 중 주요 청년들이 모여 기독동지청년회(基督同志靑年會)를 조직하였다. 연변 지역의 한인 사립학교와 중국학교에 통학하는 학생들도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펼쳤다. 명동학교 학생 유익현(劉益賢), 국자가 도립(道立)중학교 학생 최웅렬 (崔雄烈)․김필수(金弼守), 소영자 광성학교(光成學校) 학생 김호(金豪), 정동중 학교(正東中學校) 학생 송창문(宋昌文) 등은 각 학교의 학생 대표자로서 독립 운동 실행방안을 협의한 후 각자 자기 학교에서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여 학 생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이 가운데 유익현과 용정촌 기독교 신자인 임국정(林 國正)은 연해주에서 열리는 한족(韓族)독립선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2월 16 일과 24일 각각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향하였다.32) 1919년 2월에 식민지 조선에서 2명,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각각 1명이 파리에 가서 뉴욕 대표 자와 통신하였다는 소식이 미주 국민회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같은 추세에서 ‘용정 3․13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수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던 만주지역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1919년 3월 13일 북간도(현재의 중국 연 변지역) 용정(龍井)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운동에는 최대 3만여 명의 많은 동포 들이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지방관헌들의 발포로 13명이 사망하고 30 여 명이 부상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 현재 연변 학계에서는 이를 ‘3․13반일시 위운동’ 또는 ‘3․13반일군중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연변 3․13 운동 당시 김약연 등 17명의 ‘재남북만주(在南北滿洲) 조선민족 대표’ 명의로 발표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 의 의미와 그 시사점을 좀더 확 실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윤병석 교수(전 인하대)는 이 문서가 연해주를 연 계하며 3․13운동을 주도한 김약연 등이 북간도(연변)를 중심으로 ‘남북만주 31) 秘受02797號 機密第12號 大正8年2月28日 在局子街分館主任外務省書記生木島仙藏 →外務大臣子爵內田康哉殿 186~187쪽(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 일 2019년 11월 3일). 32) 앞의 現代史資料 26, 85~86쪽. ∣76∣ 全北學硏究 제1집 조선민족 대표’를 자임함으로써 이제 운동의 중심에 서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했다.33) 그리고 ‘3․13독립축하회’ 개최 이후 열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지원, 또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한 다음 독립을 요구하는 두가지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3․13운동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축하회’를 개최했으므로, 이제는 독립정부를 세워야 하겠다, 그런데 그 정부의 형태는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 제가 아닌 공화제 정부여야 한다. 따라서 임시정부와 같은 공화주의 정부여야 한다는 논리와 주장이 이를 계기로 널리 전파, 확산되었다. <그림 5> 용정 ‘3․13항일시위운동’에 모인 군중의 모습(김재홍 제공) 이러한 사실은 용정(龍井)의 3․13항일시위운동에 동참했던 최대 3만여 명 의 군증들을 탄압한 중국 당국의 보고문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당국은 “3월 13일 6도구(六道溝) 2만여 군중 해산 이후 각현(縣) 각부(埠)에 엄 히 사찰, 금지하라는 급령을 내려 다시 많은 인원이 모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러나 그 간민(墾民)들의 조수(潮水)와 같은 광열(狂熱)은 막을 수 없는 형세이 다”34)라고 한인들의 뜨거운 열기를 상부에 보고했던 것이다. 3월 13일 정오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독립축하의 취지 설명이 끝나자, ‘조선독립’ 만세 소리 가 천지를 진동했고, “군중은 기뻐서 흐느끼고(喜而泣), 흐느끼면서 뛰며(泣而 蹈) 태극기를 흔들었다”고도35) 한다. 이처럼 대단한 한인들의 지성(至誠)에 감 33) 윤병석, 1998, 북간도 용정 3․13운동과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 , 史學志 31집, 단국사학회, 467~469쪽. 34) 中華民國 外交檔案 1919년 5월 16일 吉林省長 密咨 제39호 ; 윤병석, 위의 논문, 463쪽에서 재인용. 35) 윤병석, 위의 논문, 464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77∣ 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이 독립 후의 정부형태로 이미 망해버린 고국의 구 황제가 통치하는 형태의 정부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근거는 3․ 13 항일시위운동 현장에 뿌려진 ‘독립선언 포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와 고평 중국 연변(북간도)지역에서 편성된 여러 독립군 부대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단체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였다. 대한군정서는 1910년 직후 조직된 대종교의 중광단(重光團)이 발전한 것이다.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 던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 등의 대종교 계통 인사들은 1910 년 전후 시기에 두만강을 건너 북상한 항일의병들과도 연계하여 1911년 3월에 왕청현(汪淸縣)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36) 중광단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10년대 초․중반부터 중국 연변일대 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추진코자 하였다. 그러나 건립 초기 중광단은 인재 와 물적 자원의 결핍, 특히 군자금이나 병력, 무기 등의 부족으로 본격적 군사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중광단은 먼저 대종교의 포교와 여러 학교의 건립과 교육을 통해 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독립운동을 위한 인 재를 양성코자 하였다. 서일․현천묵․계화․박찬익(朴贊翊)․고평 등 대종교 지도자들은 연변의 연길(延吉)․왕청․화룡현 등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대 종교의 사회적 기반을 넓히는 한편, 각종 학교 교육을 통해 항일무장독립운동 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37) 특히 1914년 5월 대종교 주도세력이 총본사를 화룡현(和龍縣) 청파호(淸坡 湖)로 옮겨오면서 이 지역의 항일민족운동과 교육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평은 대종교에서 1912년(일부 기록에는 1913년) 왕청현에 세운 중학교 과정의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연변지 역 독립운동과 교육운동, 대종교 포교활동에 매진하였다. 고평은 1946년에 작 성한 이력서에서 1917년 4월 신성중학(新成中學)의 교사로 근무했다고 밝혔는 데, 연변 학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종교 서일 총재와 함께 이 명동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특히 이 학교 졸업생과 학생들은 후일 대한군정서(북 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의 병사나 사관연성소의 학생으로 편입되어 독립군의 기간 인재들이 되고, 러시아로부터의 무기 운반에도 참여하는 등 1920년대 초 36) 김춘선, 2004, 중광단 , 한국독립운동사사전(운동․단체편) 6, 독립기념관, 705쪽. 37) 위와 같음. ∣78∣ 全北學硏究 제1집 연변지역 항일무장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이 시기 대종교 관련 단 체 활동이나 교육 현장에 투신한 고평의 업적은 직접적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나름대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연변측 기록을 보면 서일과 고평 등 대종교 지도자들이 직접 교편을 잡고 연변지역 교육운동에 헌신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는 사실을 확 인할 수 있다. “1917년 경부터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두었는데, 교사는 토목구조 로서 소학부는 류수하 동쪽 기슭에, 중학부는 서쪽 기슭에 자리잡았 다. ……사생들은 모두 대종교를 신앙하였다. (중략) 교원으로는 교 장 서일이 직접 교수를 겸임하였고, 고평, 계화 등도 교편을 잡았으 며, 졸업반 학생 최관은 소학부의 일부 과목을 맡기도 하였다. 1920 년 3월 1일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수요에 의해 중학부 학생은 거개 북 로군정서의 사관련성소 학생으로 편입되어 왕청 십리평 태평구로 갔 다. 개별적 학생은 소학부 교원으로 남고 어떤 학생은 무기운반대에 참가하여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재무 계화의 지도 밑에 무기운반 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38)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연변의 왕청현 십리평에서 문을 열 었는데, 위의 서술대로 북로군정서의 정예장병 양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교관과 생도모집,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분투하였다. 주 목되는 점은 이 사관연성소의 생도는 대부분 대종교 청년 신도와 고평이 교사 로 근무하고 있던 덕원리의 명동학교 학생들로 충원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사관연성소의 소장은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이 겸임하고, 사령부 부관 박 영희(朴寧熙)가 학도단장을 겸하였으며, 교관으로는 이장녕(李章寧)․김규식 (金奎植)․이범석(李範奭) 등이 있었다.39) 1920년 6월 서일․계화가 인솔한 무장경비대가 도수(徒手)부대 200명을 호 위하고 러시아 연해주에 가서 무기를 운반해 왔는데, 이로 인해 북로군정서 장병들과 사관연성소 생도들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게 되어 사기가 크게 높 38) 한옹, 1988, 민국 초기 왕청현 조선인 교육개황 , 연변문사자료 5집(내부자료), 용정 :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65~166쪽. 39) 한옹, 위의 글, 170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79∣ 아졌다. 그리고 이 해 10월 하순의 청산리전투에서 이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40) 그런데 연해주로부터 북간도(연변) 지역으로 무기를 입수하는 과정에서 고 평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인 데, 최근 일본인학자 사사 미츠아키의 연구성과로 새롭게 규명되었다.41) 고평은 이력서에서 대종교의 동도본사에 적을 두었다고 했는데, 대종교측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17년 당시에 서일이 영도하는 대종교 동일도본사(東一 道本司)의 주요 교도로 파악된다. 즉 대종교주 나철이 1914년 11월 자결한 뒤 에 그 뒤를 이은 제2세 교주 김교헌은 1917년에 교의회(敎議會)를 열어 새로 교구를 획정했는데, 고평은 이 때 계화․김좌진․이범석․백순(白純) 등 후일 의 북로군정서 요인들과 함께 동일도본사에 소속되어 주요 교도로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42) 1917년 당시 일제의 식민지 수탈 금융기관인 동양척식주식 회사에서 파악한 연변(북간도) 지역의 대종교도 숫자는 253호에 687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나,43) 이는 지나치게 적게 파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종교 동도본사는 중국 연변지역 등 동만주 일대와 러시아 극동 연해주지 방을 관할하는 교구였는데, 특히 고평은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 일대 한인들 과 대종교 세력을 연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일․계 화․백순 등 대종교도가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 주도세력이 연해주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운반해올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44) 이 무렵 고평은 대종 교의 블라디보스톡 관리 책임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북로군정서의 무기 조 달에 깊이 관여하여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등 항일무장투쟁의 발전에 크 게 기여할 수 있었다.45) 고평의 이러한 주목되는 활동은 아직까지 국내에서 조명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에 새로운 사실을 밝혀 그의 활약을 분명히 정리 해두고자 한다. 중광단은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전쟁’을 표방하며 40) 위와 같음. 41) 佐佐充昭, 2017, 靑山里戰鬪において大倧敎が果たした役割-ロシア革命派からの武 器入手を中心に , 朝鮮學報 242집, 奈良: 天理大學, 14~15쪽. 42) 玄圭煥, 1967, 韓國流移民史상, 어문각, 569쪽. 43) 위의 책, 570쪽. 44) 佐佐充昭, 앞의 논문, 14․32쪽. 45) 이러한 사실은 일본측 첩보기록에 비교적 상세히 파악되고 있다. 機密第46號 在露不 逞鮮人ノ現況ニ關スル報告ノ件 大正7年[1918년] 10月1日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 ノ部-在西比利亞[7](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일 2019년 10월 3일) 참조. ∣80∣ 全北學硏究 제1집 중국동북 일대의 대종교 신도와 북상한 의병 및 공교회원(孔敎會員) 등을 규 합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일반적으로 약칭 정의단으로 불림)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독립군적 조직을 갖춘 정의단은 1919년 8월 대한군정회(大韓軍政 會)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고 왕청현 춘명향(春明鄕) 서대파(西大坡)에 본영을 두었다. 이어 군정회는 같은 해 10월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명칭을 바꾸었 다. 그리고 12월에는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르기로 하고, 임시정부 국무원령 205호에 의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다시 명칭을 바 꾸어 임시정부를 봉대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대한군정서는 남만주(서간도) 지역에서 이상룡·지청천(池靑天) 등의 주도로 편성된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하여 ‘북로군정서’로 불리웠다.46) 고평은 자신의 이력서에서 1918년(1919년의 착오 - 필자) 5월 정의단(정식 명칭은 대한정의단)의 부총재로 임명되었다고 밝혔지만, 일본측 정보기록 등 공식문서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일본 당국 내부 보고문서에는 그가 대한군정부의 의회격 기관인 군정회의 ‘의원(議員)’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파악 되고 있다. 따라서 고평은 정의단이나 대한군정부, 나아가 대한군정서(북로군 정서)의 주요 간부로 활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7) 대한군정서에서는 김좌진(金佐鎭)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을 군사령관으로 맞 이하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까지 설치하여 독립군 장교 양성에 전력하였 다. 일본측 정보기관은 대한군정서가 청산리전투 직전인 1920년 8월 중순 현 재 독립군 약 1,200명에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 발, 기관총 7정 등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중광단 시절부터 근거지로 삼아온 왕청현 춘명향 유수천(楡樹 川, 德源里)에다 총본부격인 총재부를 두었으며, 춘명향 서대파 십리평(十里坪) 에는 군사령부를 두었다. 청산리전투 직전의 핵심 간부진을 보면 서일이 총재, 현천묵(玄天黙)이 부총재를 맡았으며, 그 휘하에 서무부장 임도준(任度準), 재 무부장 계화(桂和), 참모부장 이장녕(李章寧) 등이 있었다.48) 대한군정서(북로 군정서)가 1920년 10월 하순의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활약한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46) 신용하, 2004, 대한군정서 , 한국독립운동사사전(운동․단체편) 4, 독립기념관, 61~62쪽. 47) 고평은 정의단 부총재를 맡은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일제 정보자료에는 대한군정부 軍政會 의원 등의 직책을 맡은 것으로 다르게 파악되고 있다. 48) 박민영, 2002,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신편 한국사 48(임시정부의 편성과 독립 전쟁), 국사편찬위원회, 201~202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81∣ 한편 고평은 같은 해 4월, 연변(북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장(朝 鮮獨立期成總會長)의 지시에 따라 고덕승(高德勝)·이상호(李相鎬)·지송(池松) 등과 함께 인근지역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 시위운동으로 일본 영사관 경찰이 나 중국 관헌들에게 체포된 사람들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 였다. 이후 노령(露領)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에 서일 (徐一)·구춘선(具春先)·서왈보(徐曰輔)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또한 이 무렵 연 길현 명월구(明月溝)에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주요 간 부를 맡았다. 의군부는 본부 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 등이 선임되었고, 고평은 중부(中部) 의군부 참모장 으로 임명되었다. 의군부는 5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3) 봉오동전투의 산파역 - 최진동․홍범도․안무 독립군 연합부대의 성립을 가능케 하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논증하고자 한다. 즉 한국독립운동 사에서 청산리전투와 함께 불멸의 기념비적 성과로 꼽히고 있는 봉오동전투를 가능케 한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의 성립에 고평이 크게 기여한 사실을 새롭 게 주목하고 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주목한 한 일본 외무성 문서는 1920년 3월 말 의군단(의군부) 참모 고 평이 부하 이영근(李永根) 등을 데리고 군무도독부가 소재한 봉오동의 최진동 집에 가서 최진동의 도독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 독립 군의 협력과 연대를 제안하고 실현하려 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이로 볼 때 1920년 5월 말 약 700명 내외의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를 성립케 하고, 이를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명명한 일련의 통합 움직임에 고평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이 해 6월 이 대한북로독군부 의 참모부장을 맡아 여러 독립군 지휘관과 독립군 부대의 통합과 조정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래에 그 문서 원문과 해석 내용을 소개한다. 이 일본 비밀 보고문서는 대한북로독군부에서 고평이 참모부장을 맡고 있던 사실을 몰래 정탐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수괴(首魁) 홍범도(洪範圖)는 일 찍이 한족(韓族) 독립운동 기관의 통일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뒤 ∣82∣ 全北學硏究 제1집 일부의 양해가 있을 뿐으로 각 단체가 임의(任意)의 행동을 취하면 서 있다가 최근에 이르러 홍범도를 수령으로 하는 의군단(義軍團) 및 최명록(崔明錄- 일명 崔振東: 필자)을 수령으로 하는 도독부는 서 로 합체하기로 하여 그 명칭을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라고 칭하기 로 하였다. (중략) 3월 25일 도독부 소재지 봉의동(鳳儀洞 - 鳳梧洞: 필자)에 의군단 참모 고평(高平)은 이영근(李英根) 등을 데리고 와서 협의한 사실이 있다.”49) <그림 6> 고평이 봉오동전투 직전 독립군 연합부대의 성립에 중재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일본영사관 내부 보고문서 이 보고 직후 행적은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추후 관련 자료를 찾아 검증하고 자 한다. 49) 義軍團及都督府ノ活動ニ關スル件(1920.4.8) , 現代史資料 27, 東京: みすず書房, 1977, 346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83∣ <그림 7> 대한북로독군부 편제표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 베이스, 검색일 2019년 10월 19일) 고평이 ‘참모부장’을 맡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5. 1920년대 초 중국 연변지역(북간도) 독립운동 고평은 1919년 9월에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참여하였다. 이 조 직은 만주 동쪽 중․러 국경지대 각지에 산재한 한국 의병들을 중심으로 1919 년 4월에 조직된 민족운동 조직이었다. 이범윤(李範允, 1856~1940), 진학신, 최우익, 김청풍, 김현규, 신립, 지우강 등이 주동이 되어 연변의 화룡현 신풍동 명월구에 근거를 둔 조직으로, 이들은 연해주(沿海州) 신한촌(新韓村)을 왕래 하며 무기 구입과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면서 활동했다. 대한독립의군부(통칭 의군부)는 1910년 이후 중국 연변지역과 러시아령 연 해주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중심으로 3․1운동 후 조직된 대규모 독립군 조직 이었다. 간도관리사로 활동하던 이범윤이 중국 연변지역과 연해주(沿海州) 일 대에서 의병전쟁을 주도하던 허근(許瑾)․조상갑(趙尙甲)․최우익(崔于翼, 또 는 崔友翼) 등과 연계하여 이 부대를 주도하였다.50) ∣84∣ 全北學硏究 제1집 의군부의 전투부대는 허근을 대장으로 하는 약 100명의 ‘대한의군 전위대 (前衛隊)’와 최우익을 총무로 하는 ‘대한의군 산포대(山砲隊)’로 구성되었다. 특히 160여 명으로 구성된 산포대는 일반 독립군 편성과는 다른 정예부대였 다. 그러나 얼마 뒤 전위대와 산포대는 하나의 ‘대한의군’으로 통합되었다. 대 한의군은 이범윤 휘하에서 최우익이 대한의군부 총판(總辦)이란 직함을 가지 고 실질적으로 통솔하였으며, 다시 그 아래에 대한의군사령관 신일헌(申日憲) 이 전면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51) 1920년 8월 하순경에는 의 군부의 최고 전략가이며 핵심인물인 총무부장 최우익을 비롯하여 이을(李 乙)․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의 의군부원이 연길현 의란구(依蘭溝) 북동(北洞) 에서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순국하는 참변을 당하기도 하였다.52) 성립 당시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 본부 총재 이범윤, 총사령 김현규, 참모장 진학신, 총무부장 최우익, 군사부장 김청풍, 외교부장 지우강, 소모관 흥덕준, 소집관 조사선 * ‘중부’ 고평이 참모장으로 활동 사령관 신일헌, 참모장 고평, 서무부장 이을, 재무부장 김종헌, 외교부장 김종환, 통신부장 박재, 군법부장 허승완, 헌병대장 최상운, 군의감독 강 문주, 군대는 5개 중대53) 그런데 1920년 7월에 연길현 명월구(明月溝) 중간춘으로 근거를 옮긴 다음 부서를 개편했는데, 이 때 고평은 참모관 직책을 맡았다. 한편 활동지역은 화룡, 왕청, 혼춘 등지였고, 재정은 거주 한인들의 의연금으로 채웠다. 조직 후 1년 2개월의 시일이 경과하는 동안 군세가 증강되어 6개 대대로 발전하였다. 1920 년대 초 만주, 특히 연변(북간도)지역 현지사정은 중국 군벌정권의 관헌이나 군 경, 일본군, 마적이나 토비(土匪) 등의 탄압이나 습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54) 50) 박민영, 앞의 글, 205쪽. 51) 국가보훈처, 독립군단명부, 194~232쪽. 52) 채근식, 1949,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 77쪽 및 殉國諸氏의 略歷 , 獨立新聞(1923년 1월 10일자). 53) 채근식, 앞의 책, 75~76쪽. 54) 채근식, 위의 책, 77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85∣ 이러한 상황에서 의군부 중부는 1920년 8월 하순에 일본 경찰의 사주에 따 라 중국 지방군이 내습한다는 보고를 받고 참모장 고평이 이끄는 참모군의 발 의로 감사대(敢死隊) 150명을 선발하여 노야령(老爺嶺) 동북간에 매복시켰다. 노야령에서 중국군을 만나게 되자 독립군은 가능한 한 양보하고 무의미한 투 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부화뇌동하여 침입하는 중국군을 그대로 둘 수 없 어서 어쩔 수 없이 습격하게 되었지만, 쌍방이 손해가 적지 않았다. 이 급보가 의군부 본부에 이르러 최욱이 3개 중대를 거느리고 급히 중국촌에 도착했는 데, 이후 허세를 자랑하던 중국 지방군은 퇴각하고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후속 증원부대인 최우익 독립군부대는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곤경을 겪던 고평 부대와 합세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총격을 중지하고 군대를 정리할 때 당시 군무총장을 맡고있던 최우익, 이을(李乙), 강 도천(姜道天) 등 13인의 독립군 장병이 희생된 것을 발견했다.55) 참으로 안타 까운 일이었다. 이 때 연변에 거주하고 있던 재야사학자이자 유생출신 의병장 김정규(金鼎 奎)는 고평과 함께 활동했던 최우익 등의 전사 소식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기 록하며 매우 슬퍼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최운곡(崔雲谷)이 동지 열한 사람과 의림구 산책(依林溝山柵)에서 적병(賊兵)에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중략) 간 도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을 좇았는데, 지금 누가 있어 그를 대신하 리요!”56) 고평이 참모장을 맡았던 의군부 중부의 전투는 사실상 일본군의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의 서전이었다. 위의 노야령전투에서 뛰어난 전략 가 최우익이 전사한 뒤 의군부 부대는 1920년 8~9월경 일본군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백두산 동북의 청산리일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고평은 유명한 청산리 55) 채근식, 위의 책, 77~78쪽. 56) 金鼎奎, 野史 권17 1920년 10월 15일자 ; 윤병석, 1991, 龍淵 金鼎奎의 생애와 ‘野史’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집, 독립기념관, 132쪽. 원문은 “是何言也 崔丈雲谷 與同志十一人 在依林溝山柵 被賊兵禍害 同心同議相信相愛之深 散忘失恃失怙之痛 而 不覺驚且哭也 壯哉崔雲谷 惜哉崔雲谷 高談剛膓 各團體目之而英雄矣 于今難得 痛哉崔 雲谷 哀哉崔雲谷 慷慨好義艮상(間島)人 皆服其下風矣 誰後更存”(독립기념관 한국독 립운동사연구소, 1994, 용연 김정규일기 하(한국독립운동사 자료총서 8집), 독립기 념관, 674~675쪽) ∣86∣ 全北學硏究 제1집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북로군정서 등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이에 따라 북만주 밀 산(密山)을 거쳐 중․러 국경지대의 흑룡강(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시베리 아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사변’을 겪은 뒤 다시 만주로 되돌아 왔다. 6. 1920년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고려혁명군 조직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사와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고평은 1920년 6월 의군부를 해체하 고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그 총재에 뽑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착오로 보인다. 한국독립사(46쪽)에는 총사령관은 김규식(金奎植), 참모장은 고평(高 平)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혁명군의 조직을 보면 총사령 김규식(金奎植), 참모장 고평, 부관장 최 해(崔海), 기병사령 이범석, 사장(師長) 최준형(崔俊亨), 헌병대장 허승완(許承 完), 경무관 정모(鄭○)였는데, 군세는 400여 명에 달했다. 고려혁명군의 조직 은 민병제의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택하고 일반 한인 교민(僑民)의 교육계 몽에 주력하며, 군인의 자치를 도모하고 이주한인들의 부담을 적게하기 위해 군인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밥을 먹을 수 있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실 시하였다. 무기는 러시아에서 구입했으며, 군인들은 스스로 군수물자를 조달하 기 위해 농경(農耕)에 노력하였다. 청산리전투 이후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외 교문제 등 국제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정식 군사행동은 어려웠기 때문 에 군사훈련도 비밀리에 진행하며,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농민으로 가장하고 있었다.57) 고평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고려혁명군에서 나와 개인 자격으로 유럽의 군사 시찰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연도를 확인해보면 1924~25년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평의 이력서 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1920년대 초․중반 활동내용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독립운동 단체 간의 단합과 통일에 앞장서는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는 일본 경무당국의 보고자료가 있어 간단히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고평은 1922년 7월 러시아 연해주 추풍(秋風)의 송전관(松田關, 솔밭관)에서 열린 만주와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과 통일된 행동 을 위한 대표자 회의에 참가하여 ‘각 단체 통일시행위원회’의 비서장 임무를 57) 채근식, 앞의 책, 106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87∣ 맡은 것으로 파악된다.58) 1917년 러시아혁명 발발 이후 시베리아․연해주 등 극동지방에서 혁명파와 반대파인 백위파(白衛派)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는 가 운데,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고 사회주의 정권의 성립을 막기 위해 출동했던 일본․미국 등 시베리아 간섭군이 1922년 중반 철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호기 를 맞이하여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 대표자들은 이 때 모 여 통합과 통일된 행동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 때 모인 대표자들은 주로 기독 교․대종교 세력으로 파악되는데, ‘통일시행위원회’ 총무는 대종교도 현천묵, 고문은 이용(李鏞, 헤이그특사 이준의 아들), 재무는 김하석(金河錫), 평의원위 원장 김규면(金奎冕, 목사 출신) 등으로 구성되었다.59) 물론 이 정보에 대해서 도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고평이 비서장의 직책을 맡아 교파를 초월하 여 해외 주요 운동 단체와 지도급 인사들의 통합을 위해 분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23년 초 고평이 중국 관내 의열단과 연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 과 같다(문장은 현대어법에 맞게 필자가 일부 수정함). “특무대 사단 편성 대장 고평 이하의 새로운 활동 의열단장과 운동방침을 협의 종래 중국과 노령에 접한 지방인 니콜리스크와 보크라치나야 등지 를 근거로 삼고 고평(高平)이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전성환(全成煥) 허승완(許承完) 최태순(崔泰淳) 기타의 동지로 더불어 조선독립군특 무대(朝鮮獨立軍特務隊)를 조직하여 사년동안 각처에서 활동하는 중 이더니 대장 고평은 금년 음력 이월중에 동지와 같이 함경남북도 방 면에 비밀리 들어와 여러 가지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간 후 그 전에는 여러 대대(大隊)로 편성하였던 특무대 독립군을 이번에 사단(師團)으 로 편성을 고치고 규모를 늘리기로 결정하고 방금 계획을 진행중인데, 금년도 경비 삼십육만원중 이십오만원은 모처의 원조로 얻게되었으 나, 십일만원이 오히려 부족하므로 이것을 구처하기 위하여 방금 고심 58) 大正11年9月6日 高警第2824號 露支國境方面不逞鮮人團ノ統一ニ關スル件, 朝鮮總 督府警務局長→外務省次官 , 1~5쪽(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일 2019년 11월 3일). 59) 위의 문서, 5쪽. ∣88∣ 全北學硏究 제1집 중이라 하며, 대장 고평은 사단 편성후 독립운동의 방침을 협의하기 위하여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만나보고자 모 방면으로 향하였는 데, 오월 상순에 다시 돌아와서 즉시 한편으로는 부족한 군자금을 모 집하고 한편으로는 사단 편성을 시작하리라더라(장춘).”60) <그림 8> 신문기사 내용(동아일보 1923.4.30, 3면) 다만 실제로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과 연계를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추후 관련자료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한편 동아일보의 다음의 기사는 1920년대 후반 고평의 동향을 알려주는데, 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지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一色軍 支部長 二年不服 控訴 공산당 최양희 본적을 강원도 홍천군(홍천군) 서석면(서석면) 풍암리(風岩里) 이 백십사번지에 두고 중국 중동선(中東線) 완분하 매매가(緩芬河賣買 街) 육십이호 최양희(崔養熹, 44)는 지난 구월 이십일일 신의주지방 60) 동아일보 1923.4.30(월), 3면.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89∣ 법원에서 제령 제칠호 위반급 치안유지법 위반(制令第七號違反及治 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 2년의 언도를 받고 지난 삼일에 평양복심법 원으로 공소를 하여왔는데, 그는 작년 십이월중에 중국 합이빈(哈爾 濱)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 피착당시공산당원으로 일심판결의 이유 는 피고는 대정 십삼년 팔월중에 농업을 목적으로 중국 중동선 목단 강(中東線 牧丹江) 연안에 이주하여 동 지방에 체재하던 중 조선 독 립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김좌진(金佐鎭)과 알게 되어 당시 중동선 구첨(九站)에서 김좌진 박두희(朴斗熙) 최호(崔灝) 조청범(曹靑範) 최 정호(崔正浩) 이일우(李一雨) 등으로부터 세포단체의 통일을 전제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그의 지방교육위원이 되어 동지에 있는 동명학교(東明學校)에 교편을 쥐고 한편 독립운동에 종사하여 오다 가 그후 대정 십오년 오월중에 중동선 오참(五站)으로 근거를 옮기 고 동년 칠월 중순에 그에서 서편 서모둔(西毛屯) 허필운(許弼云)의 집에서 전기 최정호 이영백(李永伯) 이범식(李範植) 고평(高平) 강좌 모(姜佐模) 박영태(朴永泰) 등이 모이어 조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 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조직된 일색군(一色軍)에 가입하여 전기 뽀구라니-지나야 의 지부장이 되어 공산당 주의 선 전에 노력하였다는 것으로 피고는 지난 오월중에 예심에 있어서부터 병중이라더라.”61) 이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고평은 1926년 7월 중순에 북만주 오참 서쪽의 서 모둔에 있는 허필운의 집에서 최정호 등과 함께 협의하여 공산주의 조직인 일 색군을 조직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 같이 모였던 최정호 등이 북만주 중동 선 철도 연변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으므로 고평도 이 조직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 재판관으로 추천되었을 때 제출한 이력서에서 신민부의 후과장(後課長)을 지 냈다고 밝혔다.62) 그런데 신민부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좌진․김종진․정신 등 대종교 계열 및 아나키즘 계열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한인 교민 자 치조직 및 독립운동 단체라고 할 수 있었다.63) 신민부 창립 당시 간부나 관계 61) 東亞日報 1927.10.7(금), 2면 62) 제1회 국회속기록 제122호(1948.10.11 85차 회의 결의), 1203~1205쪽 ; 자료 대한 민국사 제9권(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검색일 2019년 10월 3일) 63) 신민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박환, 1985, 신민부에 대한 일고찰 , 역사학보 108집, 역사학회 참조. ∣90∣ 全北學硏究 제1집 자 명단에 고평의 이름이 보이지는 않지만,64) 어느 시기에 신민부에 가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후과장’이라는 직책도 검증이 필요하다. 당시 관련 자료에 는 이 직책이 없다. 신민부는 북만주 지역의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투쟁 하였다. 따라서 강력한 대종교 조직과 관계를 맺고 투철한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고평이 신민부 간부로 활동하면서 공산주 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에 가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판단된다. 7. 1930년대 중국 관내(關內)지역 이동과 중국군 장교 활동 고평은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과 한인 독립운동 탄압, 일본의 괴뢰국 인 ‘만주국’ 당국의 민족운동, 민족종교인 대종교 탄압이 가중되자 큰 어려움 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933년 7월 대종교 서도본사 (西道本司) 관할인 북만주의 하얼빈(哈爾濱)으로 이주하여 대종교 선도회 포교 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5년 6월에 대종교 포교사를 사 임하고 중국 본토인 북경(北京)으로 이거했다.65) 그러나 고평의 이력서 기록과는 달리 대종교측 공식기록에 따르면 고평은 1937년 중국동북, 특히 북만주의 중심도시 하얼빈에 있던 대종교 하얼빈선도 회(哈爾濱宣道會, 하얼빈 시내 安平街에 위치) 조직의 전의사원(典儀司員), 상 교(尙敎) 직책을 맡아 대종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파악된다.66) 대종교 조직 에서 상교라는 직책은 사교(司敎)와 정교(正敎) 다음의 중견 교직으로 1916년 10월 참교(參敎), 1917년 5월 지교(知敎)를 맡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하면67) 한 단계 상승한 교직을 맡아 보다 더 원숙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68)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대종교의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 은 대종교의 포교 재기와 교세 확장을 위해 만주국 당국과 타협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69) 따라서 고평은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 64) 창립당시 신민부 참여자의 명단은 외솔회, 1981, 신민부 관계자료 , 나라사랑 41집 및 위의 박환 논문 참조. 65) 그의 이력서 단기 4266년(서기 1933년)과 단기 4268년(1935년) 항목 참조 66) 大倧敎倧經倧史編修委員會 編, 1971, 大倧敎 重光60年史, 大倧敎總本司, 916쪽 ; 佐佐充昭, 앞의 논문, 33쪽에서 재인용. 67) 조준희, 2012, 종문영질(倧門榮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2집, 284․294쪽 참조. 68) 대종교 교직의 위계(이를 ‘敎秩’이라 했음)는 都司敎(敎主) 이하 사교〉정교〉상교〉 지교〉참교 순으로 주어졌다(조준희, 2012, 이시열의 민족운동과 대종교 , 崇實史 學, 숭실사학회, 183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91∣ 려하여 활동무대를 북경으로 옮기지 않았나 추정된다. 이후 고평은 1936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방공구국연맹군(防共救國聯盟軍) 제2군단 사령부 최고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곧 중일전쟁이 일어 나던 해에는 앞의 방공구국연맹 제일군단 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또한 1939 년에는 하북성(河北省) 제3초비(剿匪)사령부 군법처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70) 모두 중국공산당 세력과 대치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정부 계열 지방군의 참모 장이나 군법무관(군 검찰관 또는 재판관) 관련 직책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후일 관련 자료 와 참고문헌, 중국측 기록을 통해 좀더 상세히 파악하고자 한다. 그는 1945년 4월에 어떤 중대 사명을 띠고 서울에 잠입했다고 한다.71) ‘중대 사명’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역시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과연 이 기록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현재로서는 확실히 정리할 수가 없 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일본제국주의의 태평양전쟁 도발 말기로서 중국․미국과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매우 엄중한 시기였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 내용은 추후 다른 자료와 참고문헌 등을 통해 객 관적으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 추후 보완 검토코자 한다. 8. 해방 이후 대종교 활동과 ‘반민특위’ 재판관 활동 - 제2의 독립운동 참여 고평은 1946년 작성한 이력서에서 1945년 8월 해방 후에 조선건국협찬회(朝 鮮建國協贊會) 회장으로 피임(被任)되고, 역시 같은 해 9월 3당의 당수로 피임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각 당의 통일 관계로 위 협찬회를 ‘해소(解消)’하고 회장직을 물러났다고 썼다. 그는 또 1945년 10월 ‘재만(在滿) 조선혁명동지회’ 본부를 서울(京城)로 이치(移置)하고, ‘조선혁명당’이라고 명 명(名命)하고 위원장으로 피임하여 ‘현재 활동중’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조선 건국협찬회’와 3당의 실체가 무엇인지 현재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1946~47년 경 김학규(金學奎) 등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당 계열 인사들이 69) 조준희, 2016, 단군교의 누명과 대종교의 친일문제 , 근대 단군운동의 재발견, 아라, 229~232쪽. 70) 고평 자필 이력서 참조 71) 위와 같음. ∣92∣ 全北學硏究 제1집 서울에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했는데, 이 정당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추후 고증이 필요하다. 1920년대 후반 대종교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중국 군벌정권의 금압조치 로 다시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1930년대 초반에는 그러한 난관을 어느 정 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말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소위 ‘임오교 변(壬午敎變)’ 사태가 일어나 국내외에서 다수의 관련인사가 체포되었고, 이 가운데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한 애국지사 열사람이 희생되는 등 많은 어려움 을 겪었다. 이러한 수난과 우여곡절을 거치며 해방을 맞이한 대종교 지도부는 당시 본 부가 소재한 만주(현재는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 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하여 1946년 초에 대종교 총본사의 서울 이전을 결의하 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3월 주요 인사들이 환국해서 대종교의 조직을 재정비 하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되었다.72) 고평이 자기의 이력서에서 밝힌 ‘모 중대사명’은 이러한 대종교의 국내 이전 계획과 관련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림 9> 귀국 후 서울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 앞에서 대종교 요인과 기념촬영한 고평(1946.2.13) 72) 장세윤, 1998, 大倧敎 敎報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집, 441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93∣ <그림 10> 대종교 요인들과 서울에서 기념촬영한 고평(1946.6.16). 이시영・황학수・조성환・조완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보인다. 대신 그가 이력서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활동근거가 되었던 대종 교측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활동한 사실은 관련 자료를 통해 부분적으로 복원 해 볼 수 있다. 즉 그는 귀국한 직후인 1945년 말 경부터 대종교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서울에서 발행되었던 중앙신문 1945년 11월 12 일자 기사에는 그러한 활동 내용이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민족정신을 앙양(昻揚) 대종당(大倧堂)의 신발족(新發足) 민족정신의 근원을 북돋워주기 위하여 시내 중학정(中學町)에 있 는 대종교당(大倧敎堂)에서는 임시기구로써 교당의 신발족을 결의하 고 국민정신을 올리는 선전활동을 해나가기로 되었는데, 교역자 씨 명은 다음과 같다. 전사(典事) 김동욱(金東旭) 찬사(贊事) 이규채(李 圭彩) 양세환(梁世煥) 시교(侍敎) 김종만(金鍾萬) 선교(宣敎) 고평(이 하 생략)”73) 73) 중앙신문 1945.11.12자 기사 ; 이규채 지음(박경목 엮음), 2019, 이규채 기억록,일 빛, 99쪽에서 재인용. ∣94∣ 全北學硏究 제1집 이로 미루어 볼 때 고평은 대종교 선교 관련 직책을 맡아 적극 활동했던 것 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듬해 초인 1946년 2월 13일(수요일) 서울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 園, 현재 명동 롯데호텔 자리)에서 대종교 요인들이 모여 중요한 회의를 할 때 여기에 참석하였고, 이 모임이 끝난 뒤 이 식당 앞에서 대종교 요인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이는 현재 남은 사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이 때 대종교 3대 교 주 윤세복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조성환․조완구, 그리고 만주에 서 이청천과 함께 한국독립군 간부로 활동했던 이규채(李圭彩), 참의부 요인 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74) 이 사진 아래에는 ‘종문제형연환기념촬영(倧門弟兄聯歡記念撮影)’이란 문구가 적혀있어 대종교 주요 간부들의 해방 직후 귀국과 결속을 기념하고 환영하는 모임의 성격을 말 해 주고 있다. 또 1946년 6월 16일(일요일) 서울의 황학정(黃鶴亭) 아래에 있는 대종교 교 당에 모여 대종교 종교행사에 참석한 뒤, 그 앞에서 역시 대종교 요인들과 함 께 기념촬영한 사실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대종교 3대 교주 윤 세복과 이시영․조성환․조완구․황학수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한글학 자 이극로․정열모, 신민단 대원으로 만주 봉오동․청산리전투에 참여했던 이 흥수(李興洙) 등과 함께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사진은 대종교 敎報(記念號)(1946.8.25 발간) 3쪽에 흑백사진으로 실려있는데, 아래 쪽에 ‘대종교 총본사 환국기념’, ‘開天 四千四百三年 六月 十六日’이라고 적혀있어 중국 동북(만주) 등지에서 대종교 총본사 요인들이 무사히 귀국한 것을 기념 하기 위해 이 사진을 찍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75) 1945년 8월 해방 직후,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수립된 이후 주목 되는 고평의 활동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일반사회 재판관’으로 활 동한 경력이라고 판단된다. 이 시기 관련 기록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 다. 즉 자유신문 1948년 12월 7일자 보도에 띠르면 고평은 함태영(咸台 永)․민병기․이의식(李義植) 등 15명과 함께 ‘특별재판관’ 및 검찰관으로 ‘반 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反民特委)’에 공천되었는데,76) 이 신문의 다음날 74) 이규채 지음(박경목 엮음), 위의 책, 124쪽 참조. 75) 이 교보에 대해서는 장세윤, 1998, 大倧敎 敎報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집 참조. 76) 이 때 공천된 사람은 咸台永, 민병기, 李範來, 申鉉基, 鄭珍容, 鄭弘巨, 高平, 申鉉商, 李春昊, 金鎬楨, 柳道祐, 심상돈, 李宗聖, 姜明圭, 金毅漢, 李義植이었다(자유신문, 1948.12.7자 1면).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95∣ 짜 보도에 의하면 고평은 함태영, 노진설(盧鎭卨) 등 26명과 함께 특별재판관 및 검찰관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77) <그림 11> 고평을 이시영 비서로 발령하는 내용이 담긴 대종교 교보 기념호(1946.8.25 발간) 그런데 제1회 122차 국회본회의 속기록(1948년 12월 6일자)에 따르면 이 반 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추천한 특별재판관 및 검찰관 후보명단 및 약력이 제출되었다고 한다.78) 이 때 제출된 고평의 약력은 현재 직업이 없고, 나이는 64세, 구한국시대 판사, 의병대장, 신민부(新民府) 후과장(後課長) 등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79) 그리고 제1회 123차 국회본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 위원회 특별재판관·특별검찰관 선출 내용에 따르면 고평은 1948년 12월 7일 77) 자유신문 1948년 12월 8일자 1면(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 베이스, 검색 2019년 10월 3일). 이 때 특별재판관 및 검찰관으로 결정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申鉉基, 李靑昊, 金鎬楨, 鄭弘巨, 高平, 鄭珍容, 申鉉商, 민병기, 李範來, 金用茂, 金瓚泳, 李種冕, 崔榮煥, 申泰益, 李弼斌, 尹元上, 裵廷鉉, 金秉愚, 李義植, 李宗聖, 沈相殷, 金毅漢, 姜明圭, 柳道 祐, 徐淳永, 盧鎰煥. 78) 제1회 국회속기록 제122호(1948년 12월 6일), 1203~1205쪽(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 베이스) 79) 위와 같음. ∣96∣ 全北學硏究 제1집 국회 본회의에서 이루어진 선거에서 72표를 얻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된 사실 을 확인할 수 있다.80) 그는 사회인사 대표자 10인중의 1인으로 선출되었고, 이 듬해 3월 초 제2부(재판장 노진설) 배석판사(재판관)로 결정되어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정의의 심판을 내리게 되었다. 동아일보 1949년 3 월 6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재판부 구성을 보도하였다. “反民族行爲特別裁判部, 재판 진용을 구성 반민특위 특별재판부 대변인 담에 의하면 공판개정 日割은 제1부 월·목, 제2부 화·금, 제3부 수·토로 각각 결정을 보았다 하는데 동 공 판 사무분담은 전 사건의 3분의 1은 재판장이, 3분의 2는 차석재판 관이 각각 담당하고 기타의 재판관은 배석판사로 심의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하며 공판 개시는 오는 15일 내지 20일경에 열게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박두한 반민 공판을 심의할 재판장·차석재판관· 배심판사는 각각 다음과 같이 결정을 보았다 한다. △제1부 재판장 申泰益, 차석 李鍾免, 배석 吳澤寬 洪淳玉 金鎬禎 △제2부 재판장 盧鎭卨, 차석 金秉愚, 배석 申鉉琦 高平 金長烈 △제3부 재판장 徐淳永, 차석 崔永煥, 배석 李春昊 鄭弘巨 崔國鉉“81) 80) 자유신문 1948년 12월 8일자 기사.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회 123차 국회본회의,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特別裁判官·特別檢察官을 선출 반민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특별재판관과 특별검찰관을 다음과 같이 倍數公薦하여 작 7일 국회본회의에서 선거하였다. 이번 공천한 재판관은 일반 사회인사 중에서 10명, 법조계서 10명, 검찰관도 법조계와 일반사회서 6명을 후보로 하여 각각 수를 선출한 터로써 過般에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한 재판관 5명, 검찰관 5명과 법조계에서 선출된 재판부장과 검찰관을 합쳐 특별재판부(16명), 특별검찰부(9명)는 반민법에 규정된 대 로 완전히 구성되었다. 작7일 국회에 공천된 후보와 당선자는 다음과 같다.(○印이 당선) ◊ 특별재판관(사회인사) : ○申鉉琦(96) ○李春昊(96) ○金鎬楨(77) ○鄭弘巨(74) ○ 高平(72) ○鄭珍容(72) 申鉉商(66) 閔丙棋(55) 李範來(45) 咸台永(16) ◊ 특별재판관(법조계) : ○盧鎭卨(121) ○金用茂(97) ○金璿泳(95) ○李鍾冠(81) ○崔 榮煥(67) 申泰益(57) 李弼斌(45) 尹元上(38) 裵廷鉉(37) 金兼愚(27) ◊ 특별검찰관 : ○李義植(108) ○李宗聖(82) ○沈相駿(80) ○金毅漢(59) 姜明圭(58) 柳道祐(23) 그리고 특별재판관 부장재판관 3명은 국회의원 법조계 일반사회에서 당선된 재판관 중에서 각기 多點者로 하고 검찰관차장 1인은 국회의원 중에서 당선된 검찰관 중에서 多點者로 하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부장재판관 3명과 검찰관차장은 다음과 같이 결정 되었다. ◊ 부장재판관 : 徐淳永 申鉉琦 盧鎭卨 ◊ 검찰관차장 : 盧鎰煥 81) 동아일보 1949년 3월 6일자.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97∣ 이에 따라 고평은 1949년 전반기부터 이 해 10월 경까지 친일반역자들에 대 한 심판에 종사하였으나, 반민특위의 활동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용두 사미로 끝나고 말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림 12> 고평의 반민특위 재판관계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 베이스, 검색일 2019년 10월 19일) 고평은 재판관으로 활동할 때 항상 엄정하고 공정하게 재판에 임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 일제에 빌붙어 살고 온갖 반민족행위를 한 자 들을 처단하고 민족정기를 앙양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법집행은 어 디까지나 공정하고 엄격해야 한다. 절대로 어떤 선입견을 갖고 다루거나 감정 이 앞서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82) 고평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방장관을 하라는 교섭을 받았으나, 대신 자기 휘하에 있던 이범석을 추천했 다고 한다.83)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범석은 뒤에 국무총리가 되었다. 1950년 6월 82) 이치백, 반민특위의 재판은 엄격하고 어디까지나 공정해야… , 부안저널, 부안저널 사(2019.10.24. 인터넷 검색). 고재흠 선생 자료 제공(2019.10.23) 83) 양만정, 앞의 논문, 133쪽. ∣98∣ 全北學硏究 제1집 25일에 전쟁이 일어나자 고평은 서울에 남아있다가 북한군에 납치되어 북쪽으 로 끌려갔다.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다.84) 9. 고평의 유족 고평의 첫 부인 연일(延日, 영일) 정씨(鄭氏)는 자녀도 없이 1920년대에 고 평과 사별했다. 그 후 고평은 독신으로 20여년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전력하였 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34년이나 연하인 하동(河東) 정씨(鄭氏) 정옥희(鄭玉 姬, 1918~1952)와 결혼하여 1남 영태를 낳았는데 불행히도 영태는 1948년에 사망했다. 이어 정씨 부인도 1952년에 부군이 납북된 지 2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의 조카인 영기(永基, 1921~2000)가 뒤늦은 1993년 양자 로 들어와 가계를 이었다.85) <그림 13> 1992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훈장증 84) 박찬승 외, 2015, 전북지역 항일의병과 독립운동, 전주시․전주역사박물관, 327쪽. 85) 앞의 장흥고씨 대동보 및 양만정, 앞의 논문, 133쪽. 고영기 제적등본(2019년 12월 18일 발행) 참조(고재흠 선생 제공).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99∣ 그는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지만, 불행히도 북한으로 납북 되어서 그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건국훈장 독립장)이 1992년 8월에야 이루어졌다.86)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 일에 앞장선 사람도 없었던 듯 하다. 그런데 그에겐 최기환(崔基煥)이라는 생질이 있었다고 전하지 만, 그도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87) 생전에 최기환은 그의 외숙 고평의 비문도 받고 글씨도 받았지만 아직도 그 비석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 ‘전북 지역의 잊혀진 독립유공자’ 고평(高平) 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기념 및 현창사 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10. 맺음말 고평(高平, 본명 高高鑽)은 전라북도 부안군의 장흥(長興) 고씨 전통명가에 서 1884년에 태어났다. 8세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고씨 종가로 입양되어 8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후 서울로 가서 보광학교와 관립 법관양 성소를 졸업하고 춘천 지방법원의 검사로 한달간 근무하고 사임하여 고향 부 안으로 돌아왔다. 1911년 7월 신흥 민족종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하여 주요 직책을 맡았는데, 대종교 조직과의 연계가 만주지역(중국동북지역)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고평은 1913년 4월 대종교 동도본 사(東道本司)의 전강(典講) 직책을 맡아 대종교 신도들이 이주하던 중국 길림 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대종교 세력을 대표하여 중국 연변(延邊, 북간도)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용정(龍井) 3․13 반일시위운동’의 기획에 참가하여 연변(북간도) 지 역의 항일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노력한 결과 1919년 3월 13 일 중국 연변지역의 용정에서는 3만 여명의 한인들이 대거 참가한 ‘3․13 반 일시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평은 1919년 연변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의군부(義軍府)’가 조직 되었을 때 참모장 직책을 맡았는데, 이듬해 8월 하순 대일 독립전쟁에 앞장섰 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그해 10월의 청산리전투 시기에도 독립군 부대 86) 전주 거주 고용석 선생 훈장증 사본 제공. 이에 사의를 표한다. 87) 양만정 선생 증언. ∣100∣ 全北學硏究 제1집 의 무기구입과 운반, 각 부대의 연합과 후원, 조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 에 역시 연변지역에서 1923년 5월 조직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독립군부대 의 참모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1920년대 북만주 지방에 서 조직된 독립운동조직이자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신민부(新民府)의 과장(課 長)을 맡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한인 교민 자치운동에 기여하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 국민당정부의 참모장이나 군법처장 등 법관을 맡아 한․중 연대 항일투쟁에 기여했다. 1945년 4월 귀국하여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49년 후반기 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친일 민족반역자의 심 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납북된 뒤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관련 자료를 더 발굴․수집하고 정리 하여 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평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3년 뒤인 1913년 4월 30세 때 부모와 처자를 멀 리하고 낯설은 만주(북간도)․연해주로 건너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항일무 장투쟁에 헌신하여 거의 10여년을 투쟁하였다. 해외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험난한 장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중국 연변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용정의 ‘3․13반일시위운 동’에 고평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실, 그리고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의 최진동 진영을 중개하여 대규모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형성케 하고, 결국 그 유명한 ‘봉오동전투(봉오동대첩)’를 가능케 한 사실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1920년 10월 하순 김좌진․ 홍범도․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청산리일대에서 대규모 일본군을 격파하 는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대첩)’를 수행하기 전에 연변 동부지방인 훈춘(琿 春) 일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사실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그는 62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주로 대종교 활동과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제2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서울 중 구에서 거주했는데, 1950년 여름 한국전쟁(6.25전쟁) 기간동안에 피난하지 못 한 채 서울에 남아있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되고 말았다. 그때 이미 67세였으니 그가 지금 생존해 있을 것 같지는 않다.88) 명가의 후손으로 편안히 살 수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비장한 삶을 살다가 북한에 납북되어 최후도 알 수 없는 상 88) 양만정, 앞의 논문, 134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101∣ 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연구와 기념 및 추모, 현창사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호남이나 전북지역의 독립운동 사 연구는 전반적으로 부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3․1운동과 대한 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전북지역 독립운동사 진작(振作)과 관련 인물, 사건, 단체, 다양한 유형의 독립운동에 대한 조사․연구가 매우 시급하 다고 하겠다. 경북의 경우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세워 안동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만주 망명 과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조사․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 둔 바 있다. 특히 최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 개편하여 경북지역의 독립운동과 지역출신 독립운동가들을 크게 현창하고 있어 여타지역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발굴, 현창에 귀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호남의병의 맥을 계승하여 해외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고평 선 생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정리하여 전북인의 독립운동사 연구 를 심화하고 지역민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을 고양할 필요가 있다. 또한 편협한 민족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유․정의․평등․인도(人道) 등 세계인류의 보편 적 가치구현에 매진한 고평 선생의 생애를 보편적․세계사적 관점에서도 평 가, 조명하여 길이 현창해야 한다고 본다. 추후 고평의 연고지인 전북 정읍과 출신지인 부안, 8년 동안 종손으로 지냈 던 전남 창평 등지 현장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출신학교인 보광학 학 및 법관양성소, 불교․대종교 관련 연고를 추적하여 문헌자료로 파악할 수 없는 사실을 발굴, 정리할 필요도 있다. 또 중국 동북지역(만주)과 연해주 지역 조사와 자료발굴, 문헌자료로 파악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을 반영할 수 있 는 현지 지역민들의 증언이나 관련 학자들의 의견 청취도 필요하다. 아직 미 진한 국내외 1차 사료와 참고문헌을 추적하여 최대한 관련 사실을 발굴, 정리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신 전주의 고재흠(독립운동가 고광계 선생의 양 자)․고용석 선생님과 연구비를 지원해 준 전북연구원에 감사드린다. ∣102∣ 全北學硏究 제1집 참고문헌 姜德相․梶村秀樹 編, 現代史資料 25~29(朝鮮編), 東京: みすず書房, 1967-197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제4권, 1985. 金正明 편, 朝鮮獨立運動(明治百年史叢書) 제2․3권, 東京: 原書房, 1967.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4, 청계연구소, 19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5권, 1980/1982.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독립문화사, 1965. 양만정, 항일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 전라문화연구 제2집, 전 북향토사연구회, 1988;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라문화연구 27집 재수 록, 2016. 이동언, 서일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8집, 독립기념 관, 2011. 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장세윤,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조준희, 이시열의 민족운동과 대종교 , 숭실사학 28집, 2012, 177-206쪽. 조준희, 종문영질(倧門榮秩)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2집, 2012, 273-301쪽. 佐佐充昭, 靑山里戰鬪において大倧敎が果たした役割-ロシア革命派からの武器 入手を中心に , 朝鮮學報 242집, 奈良: 天理大學, 2017.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 1949. 최기영, 한말 법관양성소의 운영과 교육 , 한국근현대사연구 16집, 2001, 39-75쪽. * 기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독립기 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일본 아시아자료센터 온라인검색 시스템 등 참조.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103∣ <부록> 高平 자필 이력서89) 履歷書 原籍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흥리 639 現住所 한성시(漢城市) 중구 대화정(大和町) 3정목(丁目) 18의 8 고평(高平) 단기(檀紀) 4217년(1884년: 필자 - 이하 같음) 4월 8일 생90) 學 歷 (단기) 4224년(1891년) 1월 전남 창평군 현단면(縣丹面) 유천(柳川)에서 한학 을 습득 4232년(1899년) 3월 京城 普光中學校에 입학 4235년(1902년) 4월 同校를 졸업 4235년(1902년) 4월 京城官立 法官養成所에 입학 4238년(1905년) 3월 同所를 졸업 4239년(1906년) 8월 철학연구 목적으로 全北 扶安郡 來蘇寺에서 佛經을 講習 4243년(1910년) 10월 특별한 事故로 因하야 위 철학연구를 정지 經 歷 4238년(1905년) 4월 法部에서 成法學士의 칭호를 拜受 4238년(1905년) 4월 京城地方法院 春川支廳 檢事를 被任 4238년(1905년) 5월 事故로 因하야 同職을 사퇴 4239년(1906년) 9월 哲學硏究中 湖南書畵展覽會 회장을 被任. 同年 11월에 解任 4242년(1909년) 4월 철학연구중 三南書畵展覽會 회장을 피임. 동년 7월에 해임 4244년(1911년) 7월 京城북부 苑洞 大倧敎 南道本司에서 祖檀師佛의 목적으로 大倧敎에 입교91) 89) 본 이력서 사본은 전주 거주 高溶錫(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전라북도 지부장) 선생이 제공한 것이다. 이에 사의를 표명하는 바이다. 당초 이 이력서는 고평 선생의 양자 高永基 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2019.10.21, 전주 보훈회관에서 청취) 90) 양력으로는 5월 2일이다(韓甫植 編, 1987, 韓國年曆大典, 영남대학교 출판부, 1884쪽). 91)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자신의 이름(高高鑽, 혹은 高人鉐)을 두자 이름인 ‘高平’으로 개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04∣ 全北學硏究 제1집 4245년(1912년) 2월 대종교 남도본사 管內에 布敎員으로 被任 4246년(1913년) 4월 同職을 辭하고 대종교 東道本司 典講을 被任하야 該 관내 間島 汪淸縣으로 이거 4246년(1913년) 10월 同職을 辭하고 吉林省 延吉道 台府 기관인 延邊實報 사 장을 피임 4247년(1914년) 3월 朝鮮人 설치의 墾民勸學所長을 겸임 4247년(1914년) 5월 延邊實報社 主筆을 겸임 4250년(1917년) 4월 同職을 辭하고 만주 中東線 篠綏芬 新成中學 강사로 피임 4251년(1918년)92) 3월 3월 1일 독립만세로 因하야 同職을 辭하고 독립활동을 개시 4251년(1918년) 5월93) 正義團 副總裁를 피임 4251년(1918년)94) 9월 同職을 辭하고 義軍府 參謀長을 피임 4253년(1920년)95) 6월 同 義軍府를 取消하고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總裁로 피임 4254년(1921년)96) 4월 歐洲列國의 군사를 시찰키 위하여 登程 4258년(1925년) 8월 歐洲에서 대소 18개국 군사단체 시찰을 종료하고 本 大本 營에 귀환 4261년(1928년) 11월 露滿 각지에 주둔한 군인 군속의 무기를 해제 동시에 재 만혁명 동지회를 조직 4262년(1929년) 11월 北滿 哈爾賓(하얼빈-필자) 行政長官公署 所管인 法政大 學政治科 전임강사로 피임 4265년(1932년) 10월 滿洲事變의 관계로 同職을 사퇴 4266년(1933년) 7월 대종교 西道本司 관내 哈爾賓(하얼빈-필자) 대종교 宣道 會布敎師로 피임 4268년(1935년) 6월 중국을 遊歷키 爲하야 同職을 辭하고 北京으로 이주 4269년(1936년) 4월 중국 河南省 防共救國聯軍 제2군단 사령부 최고 參議를 被任 4270년(1937년) 3월 同職을 辭하고 同 제1군단 사령부 參謀長으로 被任 92) 1919년의 착오로 보임(필자) 93) 1919년의 착오로 보임 94) 1919년의 착오로 보임. 의군부는 1919년 4월 조직된 것으로 파악된다(채근식, 무장독 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 1949, 75쪽). 95) 1923년 5월의 착오로 보임(채근식, 위의 책, 105~106쪽) 96) 1924년 혹은 1925년의 착오로 보인다.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105∣ 4272년(1939년) 9월 위 職을 辭하고 河北省 제3剿匪司令部 軍法處長을 被任 4273년(1940년) 4월 同 軍官學校 교장을 겸임 4274년(1941년) 2월 위 本․兼職을 辭하고 北京 外城 廣安問內 善果寺에서 불 교철학을 연구 4278년(1945년) 4월 某 중대사명을 帶하고 京城으로 來任 4278년(1945년) 8월 解放 후에 朝鮮建國協贊會 회장으로 피임 4278년(1945년) 9월 3黨 黨首로 피임 4278년(1945년) 10월 각 당 통일의 관계로 위 會를 해소하고 本職을 辭 4278년(1945년) 10월 在滿 조선혁명동지회 본부를 京城으로 移置하고, 朝鮮革命 黨이라 名命한 동시에 위원장으로 피임하야 현재 활동중
위 各項에 依하야 相違가 無함
檀紀 4279년(1946년) 위 高 平
∣106∣ 全北學硏究 제1집
Life and Independence Movement Efforts of Ko Pyeong, Independence Activist from Jeollabuk-do Province 97)Chang, Se Yun* Ko Pyeong was born in 1884, to a traditionally reputable family of Jangheung Ko clan at Buan-gun, Jeollabuk-do Province. At the age of eight, he was adopted to the Head House of Ko clan in Changpyeong-myeon, Damyang-gun, Jeollanam-do Province, where he spent eight years studying Chinese literature. Afterwards, he went to Seoul and graduated from Bokwang (middle) school and governmental training school for judicial officers. Then, he resigned after working for a month as a prosecutor at Chuncheon district court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of Buan. On July 1911, he entered Daejonggyo, which was expanding its influence as an emerging religion of people and took an important position. The connection with Daejonggyo organization became his major motivation to dedicate himself into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Northeast area of China). On April 1913, Ko Pyeong took a position as a lecturer at Eastern headquarters of Daejonggyo, moved to Wangqing-hyeon, Jilin Province, to which the believers of Daejonggyo were immigrating, and devoted his life into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particular, he represented Daejonggyo at the planning of ‘Lungjing March 13th Anti-Japanese Movement,’ contributing significantly to the development of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in Yanbien (North Gando) area. That is, as a result of his effort, ‘March 13th Anti-Japanese Movement,’ where about 30,000 Koreans participated in, took place in Lungjing of Yanbien, China on March 13, 1919. In 1919, when Euigunbu, an Anti-Japanese armed resistance group was organized, Ko Pyeong became the chief of staff and played a leading role in Anti-Japanese resistance movement. During the Battle of Bongodong on June 1920 and Battle of Qingshanli on October the same year, he made huge * Chief Research Fellow,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_ 장세윤 ∣107∣ contribution for the unification, sponsoring and management of independence army. Again in 1920, he became the chief of staff for the independence army of Korean Revolution Army organized in Yanbien and underwent battles with the Japanese military. Later on, Ko Pyeong joined Shinminbu, an independence and autonomy movement organization of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as section chief and contributed to independence movement and autonomy movement of Korean residents in Northern Manchuria area during the 1920s. During the 1930s and the first half of 1940s, he moved to mainland China and led Korea-China joint Anti-Japanese movement as chief of staff or judicial officer at the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 In 1945, he came back to Korea and worked as an executive of Daejonggyo. In late 1949, he played a leading role as a judge at the Special Committee for Investigation of National Traitors. Unfortunately, however, in 1950, Ko Pyeong was kidnapped to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and soon was forgotten by the public. That is why we should discover, collect and arrange relevant materials of him to shed light on his life and let him be recognized by people in-and outside of Korea. Key Words : Ko Pyeong, Daejonggyo, Lungjing March 13th Anti-Japanese Movement, Battle of Bongodong, Euigunbu, Korean Revolution Army, the Special Committee for Investigation of National Traitors, a judge 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