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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관리 3大원칙 모르면 생고생만… '법정 밖의 법정'이 더 중요하다"
한 사람의 '진짜 내공'이 발휘될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위기 상황일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두 가지를 알게 된다.
그 사람이 우선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가치관),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능력은 있는지(판단력).
한마디로 개인의 '밑천'이 다 드러난다는 얘기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위기에 빠진 기업이 그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보면 알게 된다.
경영진은 어떤 철학, 판단력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때론, 그 철학과 판단력에 따라 멀쩡하던 회사가 무너질 수도,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고 더 강한 회사가 될 수도 있다.
위기관리 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배드 뉴스(bad news)'가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룹 총수는 구속되고, 고객 정보는 유출되고, 멀쩡하던 리조트는 붕괴한다.
어떻게 해야 위기를 극복하고 더 강한 회사가 될 것인가?
세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1. '사람들 마음 속의 법정' 여론에서 무죄를 얻어야 한다
세상의 법정은 둘로 나뉜다.
첫째는 법정 안의 법정. 한마디로 법원에 있는 진짜 법정이다.
여기서 적용되는 원칙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무죄 추정 원칙'이다.
피고인의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세상의 둘째 법정은 법정 밖의 법정.
다시 말해 진짜 법정이 아닌 사람들 마음속의 법정, 즉 '여론'이다.
여기선 이상하리만큼 반대 원칙이 적용된다.
'유죄 추정 원칙'이다. 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대중은 생각한다.
'뭔가 큰 잘못이 있는 게 확실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연예인 소문에 대해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기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법정 밖의 법정이다.
법원에서 아무리 무죄판결을 얻어내도
사람들 마음속에서 유죄판결을 지워내지 못하면 기업은 위태로워진다.
과거 공업용 우지 파동으로 고초를 겪은 삼양라면을 생각해 보자.
이 회사는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소비자 마음속의 유죄를 말끔히 지우는 데
실패했고, 오랜 기간 시장에서 고전했다.
그래서 중요한 게 경영진의 '적극적' 행동이다.
위기 상황에서 경영진의 행동은 선제적이고,
때론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해야 한다.
2011년 현대캐피탈의 전산망이 해킹을 당해
고객 정보가 줄줄이 새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현대캐피탈 경영진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사과를 CEO가 직접 하느냐, 담당 임원이 대신 하느냐'가 이슈였다.
현대캐피탈 정태영 사장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회사의 좋은 소식은 내가 직접 전해 왔는데,
잘못한 일은 임원에게 대신 전하라고 한다면
여론이 우리 회사를 어떻게 보겠는가?"
CEO의 사과와 회사의 초동 조치가 알려지면서 여론은 점차 호전됐다.
1994년 멀쩡하던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사상자를 수십명 낸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 사건은 시공사인 동아건설을 무너지게 할 정도의 초대형 참사였다.
사고 발생 직후 당시 최원석 회장은 끊어진 다리를
직접 찾아가 유족들 분노를 직접 대면했다.
또 상심한 유족들과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최대한 빠른 합의를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최 회장은 사람을 죽여 놓고 잘못은 모두 실무자에게 떠넘기는
'나쁜 재벌'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위기 상황에 진짜 법정에서 어떤 판결을 받느냐는 나중 얘기다.
중요한 건 여론(법정 밖의 법정)에서 죄의 형량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피해자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경영진의 과감하고 빠른 행동이 중요하다는 게 과거가 말해주는 교훈이다
2. 정보의 공백을 줄여라
최근 들어 기업 입장에서 위기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SNS로 대표되는 '정보화' 때문이다.
이제는 나쁜 뉴스를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작년에 이슈가 됐던 남양유업 사태를 생각해 보자.
유튜브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대리점주와 본사 간의 소송으로 끝났을 일이다.
하지만 유튜브에 욕설과 폭언이 공개되면서 국민의 공분을 사는 사회적 이슈가 됐다.
나쁜 뉴스가 수면 아래(인터넷)로 퍼져나가는
순간,
위기관리에 서투른 기업들이 신봉하는 잘못된 믿음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맞는 얘기다.
다 지나간다. 하지만 이미 고객은 떠나고, 회사는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중요한 게 위기 상황에서 빨리 입을 여는 것이다.
위기를 만든 당사자가 침묵하면 대중은 스스로 만든 음모와
부정적인 자료로 '정보의 진공(information vacuum)'을 채운다.
'위기에선 입을 열라'고 하면 위기에 빠진
당사자들은 하소연한다.
"아니, 누구 잘못인지도, 원인도 확실히 모르는데 무슨 얘기를 하느냐"고.
오해하지 말자. 모든 것을 얘기하라는 게 아니다.
두 단계로 나눠서 말해야 한다.
위기 초기에는
무슨 일(what)이,
언제(when),
어디서(where) 일어났는지 이것만 밝혀도 된다.
위기 상황의 첫 입장 표명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간단한 메시지를 통해 '정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시간이 지난 후,
사실관계가 파악되고 난 다음에는
왜 일어났고(why),
누가 책임지며(who),
어떻게 대처할 것(how)인지 밝혀야 한다.
3. 창의적 위기관리가 필요하다
위기관리도 이제는 창의성이 필요하다.
단순히 위기를 수습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뭔가 더 큰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가 캐주얼 브랜드인 팀버랜드다.
2009년, 그린피스 회원들은 팀버랜드 CEO에게 항의 메일을 수만 통 보낸다.
팀버랜드가 납품받는 브라질산 소가죽이 비윤리적 방식으로 생산된다는 내용이었다.
팀버랜드 임원들은 납품 비중도 얼마 안 되니까 브라질과 거래를 끊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스워츠 사장은 이걸 받아들이지 않고 그린피스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잘못을 인정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 달라."
그린피스는 두 달 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가죽의 원산지 추적 시스템을 함께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결국 팀버랜드와 그린피스는 함께 시스템을 만들고 적이 아닌 동지가 된다.
흔히들 '위기는 기회'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이 이 말을 '그냥 하는 말'
또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위기는 진짜 기회가 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내공'이 있을 때만 그렇다.
위기관리의 원칙을 모르는 기업과
리더에게 위기는 그냥 '개고생'일 뿐이다.
"세상 기준으론…바보 의사랍니다(노숙인의 주치의 박용건) "
강남의 잘나가던 개업醫, 낮은 데로 병원 더 키우려고
인테리어 공사시간 남는 김에 복지병원 봉사 갔죠
얼마 후, 남아달라는 요청… 고민…
아내의 한마디가 나를 바꿨다"돈 벌 것, 다 벌고 하면
무슨 봉사냐 젊고 힘 있을 때 남 돕는 게 진짜다"
1977년 봄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서울 청량리 동산병원 응급실에 한 살배기 아기 환자가 도착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뛰어온 엄마는 "아이가 자꾸 숨이 멎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울먹였다.
이 병원 소아과 과장은 이제 막 수련의 생활을 시작한 인턴을 돌아봤다.
"박 선생이 좀 봐줘야겠어.
환자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숨이 멎으면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주는 거야."
그는 침상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기 환자를
지켰다.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르는 아기.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아기가 호흡을 멈출 때마다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어느새 밤이 지나고 동이 텄다.
꼬마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소아과장이 아침에 출근해 응급실에 들어서자
함께 밤을 지새운 아기 엄마가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이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19번이나 살렸어요. 내
아기를…."
그제야 깨달았다.
아기는 밤새 19번이나 숨이 멎는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이후 그 증세는 사라졌고 아기는 건강하게 퇴원했다.
며칠 후 소아과장이 그를 방으로 불렀다.
"오늘 그 꼬마 환자
엄마가 다녀갔네.
요구르트 두 병을 주고 갔어.
하나는 박 선생 것, 하나는 내 것."
과장이 요구르트 한 병을 내밀었다.
어쩐지 가난해 보였던 아기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막 의사의 길에 들어선 젊은 의사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세상엔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병들이 많다.
의사가 모든 걸 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충분한 실력과 자질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그로부터 37년 후 그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박용건(66) 성가복지병원 내과 과장이
최근 '제30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한 해 1만명 이상, 많게는 2만명이 넘는 노숙인과
알코올중독자를 치료해온 '노숙인의 주치의'였다.
지난해엔 '제1회 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도 받았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성가복지병원은 가톨릭 서울대교구 산하의 '성가소비녀회'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다.
박 과장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인터뷰 중에도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주인공은 이 병원이고
저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병원장인 이영순 수녀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인터뷰가 중단될 뻔했다.
◇강남 병원 닫고 시작한 새로운 삶
박용건 과장은 한때 서울 강남에서 '잘나가는 내과의사'였다.
경희대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없어진 영동병원에서
내과 과장을 하다가 1991년 11월 개업했다.
다행히 병원은 잘됐다. 하루 80명이 넘는 환자가 찾았다.
2000년 말 그는 병원을 더 키울 욕심으로 건물을 수리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병원을 더 잘해 보려고 시작한 그 인테리어 공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성가복지병원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병원 인테리어 공사가 두 달
걸린다고 했다.
마냥 놀 수는 없어서 봉사할 곳을 찾다가
성가복지병원에서 내과 의사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당장 와달라고 했다.
처음엔 두 달만 봉사하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어떻게 두 달 예정이었던 봉사가 '계속 근무'가 됐나.
"봉사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 때 병원 수녀들이 '계속 맡아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병든 환자를 위해
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약국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봐 집마저 날린 상황이었다.
한창 공부에 몰두해야 하는 두 딸은
어떻게 키울 것인지…. 쉽게 결론이 나질 않더라."
―그래도 최종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집사람에게 기도를 통해 답을 얻어달라고 했다.
3일 철야기도를 갔다 온 집사람이 말했다.
'의사는 어차피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도 그래야 하지 않겠나.
개업의가 돼서 돈 많이 모으고, 먹을 거 다 먹고, 집에 갖출 거 다 갖추고,
아이들 해줄 거 다 해주고 그런 다음에 머리 하얗게 돼서
이제 봉사 좀 해볼까 하는 건 봉사가 아니다.
젊고 힘 있을 때 남을 위해 일을 해야 진짜 봉사다'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 길로 오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후회하진 않았나.
"내가 가졌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가족들의 응원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딸들이 '아빠가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해줘 더욱 힘을 얻는다."
강남 의사 시절과 비교하면 그의 수입은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하지만 "이 길이 내 길이란 걸 의심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노숙인 주치의
처음엔 겁나는 일도 많았다.
강남에서 병원 할 때 만났던 환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환자들을 봐야 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영혼들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환자의 70~80% 정도가
노숙인이었다.
그중엔 술에 찌든 알코올중독자들이 많았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거나 목발을 휘두르며
병원 직원들을 위협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포기할 순 없다.
그들을 받아줄 곳은 우리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기 자신에게도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세상이 좋아진 건지 이젠 환자 중
노숙 알코올중독자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요즘은 독거노인, 외국인 노동자,
저소득층 환자들의 비중이 조금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에겐 그런 거친 환자들을 다루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이영순 병원장은 "박 과장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왜 또 술 먹고 왔어. 안 먹었으면 얼마나 좋아.
내일 다시 와서 진료받아. 알았지' 하고 다독이면 금세 순해지더라"고 말했다.
―거친 환자들의 마음을 여는 비결이라도
있나.
"모든 환자를 다 똑같이 대한다.
잘못하면 야단도 친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야단을 쳐도
진짜 나쁜 마음으로 야단치는 게 아니라는 걸 환자들이 잘 안다.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눈빛과 말투, 손길에서 그런 걸 느끼나 보다.
그들을 만져주고 안아주고 그런다.
환자들은 어리광도 부린다. 부성애 같은 걸 느끼는 것일까."
―환자들에게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고들 하던데.
"환자들이
납득할 때까지 설명해준다.
전문 용어나 영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한다.
환자 눈을 보면 내 말을 이해했는지 더 설명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환자도 있지만."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1974년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군의관 복무를 시작했다.
그해 여름 몇 달간 진지구축 공사를 마치고 복귀하자 몸이 펄펄 끓었다.
체온이 40도까지 올랐고 구역질이 나고 허리가 아팠다.
치사율 10%인 유행성 출혈열이었다.
그때만 해도 원인을 몰라 '불명열'이라 불리던 병이었다.
다행히 수도통합병원에 후송된 지 한 달 만에 건강을 회복했다.
불명열 환자는 통상 6개월간 치료를 받는데 몸이 일찍 회복됐으니
5개월간 쉬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의사라도 입원했는데, 환자가 환자를
돌보다니.
"공식적으론 환자지만 실제론 다른 환자를 돌보고 치료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닌데, 24시간 병실에 있는 군의관, 당직의사가 된 셈이었다.
남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내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기 말고 언제 어디서 이런 병을 연구할 수 있겠나' 싶었다.
많을 땐 환자들이 200~300명에 달했다.
나를 좋게 본 소령 군의관이 레지던트 2년차는 돼야
배울 수 있는 투석 방법도 가르쳐줬다."
―그곳 군의관이 아닌데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느 날 새벽 2시에 병사
환자가 도착했다.
상태가 심각했다. 콩팥이 심하게 망가졌고
몸속 칼륨 수치가 한계에 도달해 심장마비가 우려됐다.
담당 군의관에게 전화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미리 배워둔 복막투석을 실시했다."
―다음 날 군의관이 뭐라고 하던가.
"그는 '의사로
살아가는 동안 이 사람은 내가 아니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황과 맞닥트리는 건 쉽지 않다.
나 아니어도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중위는 바로 그런 상황을 만난 거네'라고 했다.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 되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영동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을 때도 심장이 멈춘 환자를
55분 심폐소생술을 시도한 끝에 살려낸 일이 있다.
"점심시간이었는데 40대 남자가 병원을 찾아왔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밥 먹으러 나간 시간이었다.
나는 평소대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는데 응급실 호출이 왔다."
남자는 처음엔 "체한 것 같다"고 했지만 잠시 후 의식을
잃었고 심장이 멈췄다.
박 과장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선 통상 20분 이내에 숨이 돌아와야 살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20분이 지나도 심장이 뛰지 않았다.
식사하러 나갔던 의사들이 돌아왔고 병원장은 설명을 듣더니
가망이 없으니 포기하라는 눈짓을 했다. 그
는 포기하지 않았다.
55분이 지났을 무렵 간호사가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다시 뛰어요!"
하지만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으며 일만
하는 성격 때문인지
그는 '사회성' 면에선 주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가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 성가복지병원 관계자는 "주변 사람과 워낙 교류가 없어
저녁 식사 한번 하자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머리 깎는 게 얼마인지도 모르는 사람
그는 병원에서 환자 돌보는 일 이외의 것은 잘 모른다.
집도 병원에서 3분 거리에 있어 혼자 걸어다닌다.
이 병원 자원봉사자 안향춘씨는 "머리 깎는 게 얼만지도 모르는 분"이라고 했다.
결혼 후 한 번도 이발소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앞머리와 옆머리는 내가 자르고 뒷머리는 집사람이 손봐준다.
집에서 깎는 머리치고는 꽤 괜찮지 않으냐"며 웃었다.
그는 쉬는 날도 거의 없다.
방사선과 직원인 김수연씨는 "과장님이 휴가 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월요일은 병원이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지만
입원 환자를 보려고 오전에 출근한다"며 오후에 만나자고 했다.
"환자들이 이틀이나 담당 의사를 못 보면 얼마나 불안하겠나 싶어서…"
라는 게 그가 병원 휴일에도 일하러 나오는 이유였다.
◇상상도 못할 욕설을 듣고도…
25일 오전 성가복지병원 5층 중환자실.
그가 들어서자 86세 강옥이 할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편이 죽은 후 쓰레기로 가득 찬 집에서 혼자 살던 할머니는
치매와 영양 부족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 달간 치료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이 뽀얗게 오른 할머니는
다음 날 요양 시설로 떠날 예정이었다.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속상해 우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곳으로 가는 거예요.
에이고, 울긴 왜 울어. 이따가 오후에 만날 때는 웃어야 해요."
박 과장은 할머니의 눈물을 손으로 연신 닦아주고 어깨를
다독거렸다.
할머니는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방긋 웃었다.
알코올중독과 간경화로 입원한 배경준(48)씨는
"과장님은 환자 마음을 정말 편하게 해 준다.
저런 선생님을 만나서 우린 참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 과장에게 환자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자원봉사자 안향춘씨는 "과장님은 환자들의 집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며
"병 치료보다 먼저 마음을 위로해준다"고 말했다.
방사선과 직원 김수연씨는 "환자들이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상상도 못할 욕을 퍼부어도 '우리 병원이 원래 그런 병원이지 뭐.
소외되고 외로운 분이 활개치고 넋두리하고…
어디 가서 그럴 수 있겠어'라고 말하곤 한다"고 했다.
무료 병원의 노숙자 환자 주치의는 처방과 치료 방법도 달랐다.
영양사 임정수씨는 약 10년 전 이 병원 근무를 시작했을 때
당뇨병 환자 식사 문제로 박 과장과 부딪혔다.
병원 측은 당뇨병이 심한 환자에게 양이 적은 식사를 하루 6번 주자고 했다.
박 과장은 반대했다.
"괜찮다. 밥 많이 주고, 더 먹고 싶어하면 더 주라"고 했다.
그는 "이곳 환자들은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혈당이 급한 게 아니다.
우선 밥 잘 먹게 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혈당은 약으로 조절해주면 된다"고 했다.
성가복지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 과장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만 쏟아냈다.
병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 아나다시아 수녀는
"박 과장님은 일 년에 몇 번씩 원장 수녀님 모르게 수십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고 간다"며
"그 돈으로 소뼈와 고기를 사다 도가니탕을 끓여내면
환자와 인근 배 곯는 사람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소화 데레사 법인사무국장은 "박 과장님은 연말 정산 때
세금을 환급받으면 그 돈을 모두 내놓는다"며
"이번에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3000만원도 전액 병원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언제나 너그러웠다.
한 노숙인이 추운 겨울 밤에 벤치에서 벌벌 떨며 잠자는 모습을 본 뒤
신혼 때 장만한 이불을 가져다주고, 할머니 환자가 "입은 조끼가 참 좋다"고 말하면
며칠 후 그 조끼를 세탁해서 봉투에 담아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인터뷰가 끝날 때쯤엔
"난 의사니까 오직 환자만 보고 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해 그가 '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을 받을 때
갈멜수녀원 수녀들이 추천서를 썼다. 내용은 이랬다.
"아프리카에는 슈바이처와 이태석 신부님이,
요셉의원에는 선우경식 선생님이,
저희에게는 박용건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 말이 의사 박 선생님께 드리는 저희의 최대 존경의 표시입니다."
"덩샤오핑, 고이즈미, 그리고 박근혜"
광둥 경제특구 관철한 中 지도자, 脫규제로 장기 호황 이끈 日 총리… '특공대' 앞세워 黨·官 반대 제압
福祉·경제
민주화 겉멋에 매달려 경제 혁신·규제 철폐 미룬 朴 정부… '경제 分身' 임명해 위기 돌파해야
에즈라 보겔이 쓴 '덩샤오핑 평전'(민음사)에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1980년대 초 광둥 경제특구가 개혁·개방 정책 덕분에 활기를 띠자 내부에서 적들이 등장한다.
광둥만 번창하는 자본주의 실험에 반대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개방 직후 밀수(密輸)가 늘고 공무원 부패가 몰라보게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개방 정책의 적들은 광둥의 이런 약점을 공격 무기로 삼았다.
베이징의 공산당 관료들은 외자 도입·공장 설립 같은
정부 규제에서 광둥만 예외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나왔다.
다른 지역의 반발도 좋은 핑계거리가 됐다.
조심스럽게 열어둔 중국의 '남대문'이 다시 닫힐 수 있는 순간을 맞았다.
이때 덩샤오핑이 나섰다.
"그곳은 경제특구이지 정치특구가 아니오."
정치 논리로 걸고 넘어지지 말라는 경고였다.
일본이 20년 침체에 빠진 동안 고이즈미 총리 시절 반짝 호황을 누렸다.
경기 회복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은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장관이다.
고이즈미는 게이오 대학 교수를 입각시키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처절한 싸움이 될 것이다. 함께 전쟁터로 나가자."
다케나카가 전쟁을 치러야 할 적군은 관료와 자민당이었다.
다케나카는 우선 규제를 깨기 위해 주요 부처의 엘리트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관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동료 관료라고 믿었다.
그들이 규제의 고리를 파괴하는 특공대 역할을 맡았다.
집권당은 더 큰 적이었다.
규제 개혁이 벽에 부닥칠 때마다 고이즈미가 카메라 앞에 섰다.
관료 집단에게는 '한 주먹도 안 되는 공무원들'이라고 깔보며 공격했다.
"자민당을 깨부수겠다"는 말도 내뱉었다.
자신을 총리직에 올린 집권당마저 저항하면 해체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기득권 세력과 싸우며 4년 8개월 장기 호황을 이끌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는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라고 했다.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나갈 때까지 안 놓는 진돗개 정신으로"
일하라는 압박에 공무원들은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가 '비장한 각오' '절박한 마지막 기회'라는 표현을 쓰고
끝장 토론회에서 장관에게 면박을 줬다고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도 있다.
고이즈미에 비하면 박 대통령의 어법(語法)이 품위를 잃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비수를 꽂는 수준도 아니다.
경기 회복을 위해서라면 지도자는 그보다 더 거친 말로 방해꾼들을 공격하고,
때로는 행동으로 그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줘야 국민은 직성이 풀릴 것이다.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친 장벽은 DMZ와 다를 게
없다.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이 곳곳에 출입금지 간판을 세우고 철조망을 둘러쳤다.
벤처기업이 비집고 들어설 땅은 없다.
자기들만의 낙원에 입장한 대기업들이 기득권을 지키느라 문을 열지 않는다.
공기업의 높다란 성(城)에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만 교체될 뿐이다.
DMZ에는 노루가 뛰고 귀하게 천연기념물도 보인다.
하지만 발을 헛디디면 지뢰가 터지고 총알이 쏟아진다.
우리 경제도 DMZ 풍경처럼 평화로워 보이지만 탈출구가 없다.
누군가 돌파구를 뚫어주지 않으면 삼성전자·현대자동차 같은
몇 개 희귀종(稀貴種) 구경에 만족하며 세월을 보내야 한다.
사실 박대통령이 요즘 하고 있는 일은 모두 작년 초에 했어야
했다.
그때는 경기가 피어날 기색조차 없는데 새 정권은
복지(福祉)에 꽂혀 있었고 경제 민주화로 멋을 부렸다.
가을이 되어서야 경기 회복이 늦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이나 규제 철폐 작업을 집권 초기에 시작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호황 분위기를 맛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방향은 잡혔다.
그러나 DMZ를 뚫고나갈 지휘관이 보이지 않는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밀어붙이면서 개방파 공산당 원로와
광둥성 당 서기장에게 실무 책임을 맡겼다.
그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곤란한 처지에 빠지면 현지 방문을 통해
직접 격려하거나 당에 지침을 내려보냈다.
"특구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9년 3개월 일했던 김정념씨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장관에게 전화로 독려했고,
매월 경제동향보고 때는 물론 매 분기 정부사업 심사보고 때도 집중적으로 점검했다."
경제 규모가 작고 대외 관계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럴 수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
매월, 매 분기마다 대통령이 일일이 직접 챙길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이 규제 철폐, 경제 혁신에 정권의 승부를 걸겠다는 비장한 심정이라면
덩샤오핑·고이즈미처럼 자기 경제 분신(分身)부터 찾아야 한다.
DMZ 지뢰와 철조망을 제거할 특공부대는 어디에 있는가.
"왜 우린 작은 일에도 화를 내는가?"
자살,성형,악플...그 뒤엔 낮은 자존감
외모 콤플렉스도 자존감에 영향..키 작은 사람이 공격 성향 더 강해
자신의 존엄성 훼손하지 않으려면
타인의 인격부터 긍정하고 헤아려야
공자가 말한 마음의 못을 빼는 법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맹자'에는 공자가 이 동요를 인간의 자기형성에 비유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물이 먼저 흐려진 다음에 누군가 와서 발을 씻는 것처럼,
내가 먼저 나를 업신여기면 남도 나를 푸대접한다."
모멸감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바로 서고, 자존감이 굳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중년 남자가 펄펄 뛰며 성을 내고 있다.
얼굴 가득 경멸과 혐오의 열꽃이 핀다.
압력솥이 김을 뿜듯 요란하게 욕설이 쏟아지는 풍경.
보기 안쓰러운데 웬걸, 점원은 담담하다.
영화에서 1000만 관객이라는 숫자는 이 세상에 대해, 거기 사는 사람에 대해
말해준다.
'겨울왕국'이 흥행한 배경 중에는 사회적 감정도 있지 않을까.
엘사는 "숨겨라, 느끼려 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는 강박에 짓눌려 있다.
감정노동이다. '렛 잇 고(Let It Go)'는 그것을 훌훌 털고 자유를 노래한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가 쓴
'모멸감'(문학과지성사)과
곽금주 서울대 교수의 '마음에 박힌 못 하나'(쌤앤파커스)는 감정이라는 블랙박스를 연다.
감정은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지만 내 마음조차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높은 자살률, 성형 수술, 악플…. 김찬호 교수는
"이런 정황 아래에는 낮은 자존감이 숨어 있다"고 진단한다.
곽금주 교수는 못난 모습, 즉 콤플렉스(열등감)를 통해 '나는 누구인지' 묻는다.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하며 위장에 능하다. 감정은 또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과거에는 범죄자를 처형할 때 군중이 구경했다.
지금 같으면 눈뜨고 못 볼 것을 축제처럼 즐겼다.
한국이 일군 경제적 성취는 경이롭지만 '피로사회' '불안증폭사회'
'허기사회'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같은
책에 비친 우리의 마음 풍경은 사뭇 음울하다.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넘어왔다"는 해석도 있다.
김찬호 교수는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기는 힘들고,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은 견디기 어렵다"고 썼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받고,
그 앙갚음으로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억누른다.
최근 문제가 된 감정노동이나 '디스(상대방의 허물을
공격해 망신주는 것)'는 그런 병리 증상이라는 것이다.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다.
응당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대접을 받지 못하면 과민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비스업체 직원이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격앙하는 소비자,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면
난감해하는 부유층, 하급자가 깍듯하게 떠받들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상사….
무시당했다고 느낀 그들은 자괴감을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한다.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 못지않게 위험한 게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이다.
'낮은 자존감'은 또 다른 모멸감을 확대 재생산한다.
◇콤플렉스, 또 하나의 나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진은 어릴 때 키가 작았던 사람은
사교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자부심이 약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키 1인치(2.54㎝)마다 연봉 차이가 789달러 난다며 수치도 제시했다.
그런데 나폴레옹 콤플렉스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키 작은 사람들이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더 큰 지배욕을 갖는다는 점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송사리 연구에 따르면 다툼의 78%는 덩치 작은 물고기가 일으킨다.
패배의 아픔은 작고 승리의 기쁨은 크다면 싸움을 거는 게 낫다고 생각해
작은 사람들이 더 공격적인 성향을 띨 수 있다.
'마음에 박힌 못 하나'는 타고난 성(性)이 달갑지 않아 생기는 다이애나
콤플렉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공을 회피하는 요나 콤플렉스,
사소한 억울함에도 목숨 걸고 보복하는 몬테크리스토 콤플렉스 등 18가지 콤플렉스를 소개한다.
유래와 원인, 내면의 심리를 신화와 문학을 통해 짚는다.
곽금주 교수는 "똑같은 상황을 겪어도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를 사는 사람과 과거에 붙잡혀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콤플렉스를 스스로 병적인 것이라 낙인찍고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순간,
콤플렉스는 마음에 박힌 못이 되어버린다"고 썼다.
◇감정의 주인이 되는 길은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체 고용인구 1600만명 중
70%에 이르는 1200만명이 서비스업 종사자다.
감정노동자는 6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피로감이나 짜증을 감추고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감정과 표현을 억지로 분리하는 '감정 부조화'가 노동자의 내면을 소진시킨다.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게 더 치명적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내 위신을 확인하려는 문화는 강하게 남아 있는 반면,
개인을 감싸주고 인정해주는 공동체는 급격히 붕괴했다.
일상은 흉흉하다. 저마다 분노의 화약고를 가슴에 쟁여 두었다가
신경질과 화풀이로 탕탕 쏘아대는 사회에 사람다움이 들어설 자리는 비좁다.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면 타인의 인격부터
긍정해야 한다.
'모멸감'에는 이 감정을 주제로 만든 10개의 곡(작곡 유주환)이 CD에 담겨 있다.
김찬호 교수는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감수성이 사회적 기풍으로 정착돼야 한다"면서
"내면이 강해져야 하고 결국 자존감의 문제"라고 말했다.
곽금주 교수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는 사람은
그 '약한 고리'를 다독이며 다치지 않게 끌어안고 사는 것이 건강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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